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01
1101회. 이길 자신은 있고요?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대장군 베르나르도 후작 막사.
해거름 무렵.
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세 남자가 마주 앉았다.
에스카토스 왕국군 원수인 에스카토스 공작과 대장군 베르나르도 후작, 그리고 후작가의 불사조 기사단 부단장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에스카토스 공작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마족과의 협상에 대한 건은 접어 두어야 할 것 같소. 북부의 대귀족들에게 이야기를 꺼내 봤지만, 마족과 타협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할 정도로 반발이 심했소.”
그러자 베르나르도 후작이 슬며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안색을 살폈다.
말이 죽겠다는 것이지 그건 전쟁을 의미했다.
그리고 대귀족들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마족과의 전쟁에 앞장서 주기를 바랐다.
엘리오가 무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마족과 전쟁을 하겠다는 건가요?”
“그렇소.”
“이길 자신은 있고요? 공작님은 히르헤라에서 마족과 싸워 봤으니 잘 아시겠네요.”
“북부 대귀족들은 아직 마족의 군세가 얼마나 강한지 실감하지 못하오. 그들이 본 거라고 해 봐야 균열 인근을 오락가락하는 마수가 전부니까.”
“다 죽을 겁니다.”
“지금 히르헤라에는 북부 여덟 개 왕국과 제국의 한 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소. 그래도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시오?”
“어둠의 에테르가 지난번보다 훨씬 강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전력을 보강한 건 이쪽만이 아니라는 거죠.”
“흐음…….”
에스카토스 공작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솔직히 북부 왕국들이 지금처럼 많이 모인 적도 없었다. 제국과 전쟁을 할 때도 세 개 왕국이 연합한 게 전부다.
그런데 그 엄청난 전력이 다 죽을 거라니?
솔직히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말이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대화가 끊어지자 베르나르도 후작이 슬쩍 끼어들었다.
“협상 제안을 거절당한 라고아 경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라고아 경이 이번에도 마족들을 격퇴해 줄 거라고 믿소.”
엘리오는 답하지 않았다.
마족과 북부 왕국과의 싸움은 이제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빙벽에 구멍이 뚫려 있는 한 마족들은 계속 침공해 올 게다.
어쩌면 십 년, 백 년간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히르헤라에 남아서 마족과 싸울 수는 없었다.
냉정히 말해 자신이 이세계에 온 것은 북부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천자마와 금사로 인해 이세계가 혼란에 빠지는 걸 막는 게 자신의 사명이다.
그게 마족과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저는 곧 제도(帝都)로 떠날 생각입니다.”
“…….”
충격적인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말에 공작과 후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몰록의 군단과 싸워 본 그들에게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건 소드마스터인 에스카토스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라고아 경, 히르헤라에는 절대적으로 경이 필요하오. 경은 히르헤라뿐 아니라 북부의 희망이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시오.”
공작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그런 표현은 자신이 생각해도 불경스러웠기 때문이다.
“농담이 아닙니다. 마족과의 협상을 말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
에스카토스 공작이 멍하니 있자 베르나르도 후작이 나섰다.
“곧이라면 정확히 언제를 뜻하는 것이오?”
“이번 마족의 침공이 정리되는 대로 떠날 생각입니다.”
순간 잔뜩 긴장하고 있던 후작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족의 침공을 막고 난 뒤에 떠난다니 안심되는 모양이다.
“설마 제도로 이주하기 위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요. 흑마법사의 배후를 잡기 위해 가는 겁니다.”
뒤늦게 정신을 수습한 에스카토스 공작이 말했다.
“천공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오?”
“예.”
“아! 그래서 제도를…….”
에스카토스 공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공성에 관한 것을 아는 사람은 마탑의 마법사들 뿐이다. 그러니 배후를 잡으려면 마탑이 있는 제도에 가야만 했다.
“제도에 아는 사람이 있소? 없다면 내가 지인을 소개해 줄 수 있소만.”
“코르보 마법 병단의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이나 애슐리 넬슨 남작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입니다.”
“아하.”
킬리언 헤일 공작의 이름이 나오자 에스카토스 공작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슐리 넬슨 남작이야 별거 아니라 쳐도 킬리언 헤일 공작은 자신의 지인보다 위라 나서는 의미가 없었다.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엘리오는 불사조 기사단 막사로 돌아갔다.
***
베르나르도 후작군 진영.
저녁 식사 후에 기사단 막사로 돌아가는 엘리오의 뒤를 파비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자작님. 아까 후작님 막사에서 공작님과 만났다면서요?”
“어.”
“떠나겠다고 말씀드렸습니까?”
“어.”
“어쩐지.”
파비안의 말에 처음으로 엘리오가 관심을 보였다.
“왜?”
“지금 주둔지 분위기 장난 아닙니다. 완전 초상집 분위깁니다. 자작님이 제도로 간다고 벌써 소문났습니다.”
“네가 퍼트린 게 아니고?”
“제가요? 제가 왜 그런 소문을 퍼트립니까? 저 입 무거운 사람입니다.”
파비안이 정색을 하자 엘리오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면 말고.”
“십중팔구 막사에서 시중들던 병사들이 퍼트렸을 겁니다.”
“상관없어.”
“물론 자작님이야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아까 세라 양을 만났는데 묻더라고요. 자기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뭘 어떻게해?”
“저도 없는데 히르헤라에 남아 있고 싶겠습니까?”
“두 사람이 그 정도로 친한 사이야?”
“모르셨습니까?”
“만나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지. 그런 사람이 있으면서 술집에 그렇게 다녔어? 너도 어지간하다.”
“술집은 소위들과 좀 친해지려고 간 겁니다.”
“꼭 술을 마셔야 친해지냐?”
“예. 그건 소위들과 어울리지 않았던 자작님이 잘못한 겁니다.”
“미녀 바르도스에게 빠져서 술집을 들락거리고서 소위들 핑계는.”
“솔직히 저보다는 소위들이 에리카 양을 더 좋아했습니다.”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해라. 아주 볼 때마다 헤롱거리더만.”
은근히 찔린 파비안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지금 에리카 양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세라 양에게 뭐라고 해야 합니까?”
“인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세라 양이 네 애인이지 내 애인이냐?”
“제도에서 일을 마치고 히르헤라로 돌아오실 겁니까?”
“남부로 갈 거야.”
“대수림요?”
“어.”
“천공성에 어비스까지 둘러보시겠다는 거네요?”
“나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거 아냐. 한 번에 해치워야지.”
“수년이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말이 수년이지 파비안은 그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모험가들이 수백 년 동안 천공성과 어비스를 찾아다녔지만 누구도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악담하냐? 나는 그렇게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예에, 여하튼 히르헤라로 돌아올 일이 없다는 거네요?”
“어.”
엘리오가 짧게 답했다.
한번 떠나면 두 번 다시 북부에 올 일은 없을 터였다. 천자마와 금사를 죽인 뒤에 고향으로 갈 테니까.
“그럼, 영지로 돌아가라고 하겠습니다.”
“세라 양이 있는 팬텀 기사단에서 그걸 허락할까?”
“자작님이 기사단장님에게 한 말씀 해 주십쇼.”
“내가?”
“예. 세라 양을 이곳에 남겨 두고 가면……. 마음이 놓이질 않을 것 같습니다.”
“말은 해 볼게. 내 말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약한 소리 하지 마시고요. 칼이 길이고 열쇠라면서요.”
“세라 양이 그렇게 좋냐?”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엘리오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천상 바람둥이인 줄 알았는데 일찌감치 한 여자에게 정착하다니 의외다.
심통은 이미 틀렸고, 파비안이라도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
다음 날.
아침부터 히르헤라 주둔지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어둠의 에테르가 빙벽 가까이 접근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타메이온에 진출했던 감시 부대가 빙벽 안쪽으로 후퇴했다.
방벽을 쌓던 기술자와 일꾼 들도 후방으로 빠졌다.
북부 왕국 연합군은 하루 종일 중무장을 하고 비상 대기 상태로 지냈다.
정오 무렵.
마침내 어둠의 에테르가 스멀스멀 빙벽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캬오오!”
“크르르릉!”
이전처럼 마수들이 가장 먼저 균열을 넘어왔다.
화이트 울프 떼와 거대 스밀로돈이 히르헤라를 질주했다.
그 뒤로 아이스 오우거들이 몰이라도 하듯 포효를 내질렀다.
“크허헝―!”
“크헝!”
자이언트 베어와 예티 같은 대형 마수들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화이트 울프와 거대 스밀로돈의 뒤를 따라붙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마수들이 파도처럼 히르헤라를 덮쳤다.
얼마 전 몰록의 군단보다 족히 다섯 배는 많아 보였다.
균열 앞의 감시 부대는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마수에 쓸려 나갔다.
마수가 내는 소리에 가려 인간의 비명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북부 왕국 연합군 지휘부.
전방을 응시하던 탈린 왕국의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마족의 군세가 강하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싸웁시다!”
균열 감시 부대가 몰살당하자 그는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그를 에스카토스 공작이 만류했다.
“룬드그렌 공작, 저 마수들은 단지 선발대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마물의 웨이브가 시작될 때까지는 참으십시오.”
그제야 울리크 룬드그렌은 들끓는 화를 가라앉혔다.
그러는 동안 히르헤라 주둔지까지 밀려온 마수들이 북부 왕국 연합군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북부 왕국 연합군은 군데군데 세워진 석벽에 의지해 마수들과 싸움을 벌였다.
과거 목책이 제구실을 못 하자 석벽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마수들의 일격에 바스라진 목책과 달리 석벽은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에 비해 마수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마수에 북부 왕국 연합군은 조금씩 뒤로 밀렸다.
북부 왕국 연합군 지휘부는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소드 익스퍼트들을 대거 투입했다.
팔 왕국 소드 익스퍼트들의 활약에 무너진 전열이 조금씩 복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마수들에 이어 마물들이 물 밀듯 몰아닥친 것이다.
케르베로스, 코발로스, 구울, 그루브, 광염의 히드라, 베히모스는 물론이고,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언데드 형 마물까지 등장했다.
마치 히르헤라가 타메이온의 중심부로 옮겨진 것 같았다.
소드 익스퍼트들의 숫자는 많았지만 각종 마물들에 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소드 익스퍼트는 초인이 아니다.
마수까지는 우위를 지킬 수 있었지만 마물은 무리였다.
체력이 고갈된 소드 익스퍼트들이 죽어 나가자 북부 왕국 연합군 진형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흐트러졌다.
어느 한 순간을 기점으로 북부 왕국 연합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북부 왕국 연합군이 마물에게 쓸려 가기 직전, 뒤에서 이를 갈던 소드마스터들이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열세 명이나 되는 팔 왕국 소드마스터의 투기가 히르헤라를 뒤덮었다.
소드마스터들이 내뿜는 정순한 마나의 파동에 노도처럼 밀려오던 어둠의 에테르가 한순간 주춤했다.
열세 명의 소드마스터들은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소드마스터들이 휘두르는 마나 블레이드에 마물의 사지가 떨어져 나갔고, 마수의 육체는 짓뭉개졌다.
그들의 선전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와아아!’ 함성을 내질렀다.
북부 왕국 연합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다.
소드마스터의 선두에서 펄펄 날아다니던 탈린 왕국 원수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이 에스카토스 왕국군 진영을 힐끔 보았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 내가 힘이 없어서 그대에게 머리를 숙였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내가 히르헤라에 온 것은 마족을 죽이기 위해서다!’
힘차게 공중으로 도약한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이 멈칫했다.
마물들의 후미에 마족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