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00
1100회. 기사는 악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균열을 넘어오지 말라고 부탁이라도 하겠다는 거냐?’는 파비안의 질문에 엘리오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해 봐야지. 밑져야 본전이잖아.”
“자작님. 아까는 ‘공생’보다 ‘옳고 그름’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악(惡) 그 자체인 마족과 공생해도 되는 겁니까?”
“이 공생이 그 공생이냐?”
“다릅니까?”
“다르지. 아까 내가 말한 공생은 나쁜 놈을 걸러 내지 않고 더불어 가는 걸 지적한 거고, 지금은 피차 선을 넘지 말고 각자의 영역에서 살아가자는 거잖아.”
엘리오의 설명에도 파비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마족을 옆에 두는 것과 나쁜 놈을 옆에 두는 게 뭐가 다릅니까? 마족을 옆에 두고 사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은데요?”
엘리오가 답답하다는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이 세계 사람들의 마족에 대한 인식은 극단적이어서 대화가 어려웠다.
“봐 봐. 나쁜 놈은 내 삶에 똥처럼 널려 있지? 그런데 마족은 어디 있어? 균열 너머에 있지? 그 차이를 모르겠어? 똥들이 뒷간에 모여 있으면 나도 상관 안 해. 타메이온의 마족들처럼 저들끼리 물고 뜯으면 누가 뭐래. 그 차이라고. 파비안, 너는 똥이 집 앞에 있어도 공생하자면서 안 치울 거냐?”
“그렇게 말하면 마족도 똥이잖습니까. 그런데 왜…….”
“야 이 새끼야! 마족은 타메이온에 살잖아. 넌 뒷간에 있는 똥을 치울 거야? 타메이온이 뒷간이라고.”
참다못해 엘리오가 화를 버럭 냈다.
마족과 싸울 능력도 안 되면서 왜 자꾸 타메이온에 살고 있는 마족을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욕을 먹어서인지, 극단적인 비유가 통했는지 파비안은 더 이상 딴지를 걸지 않았다.
엘리오는 노파심에 한마디 덧붙였다.
“나쁜 놈은 뒷간으로, 마족은 타메이온으로. 그게 내가 말하는 ‘공생’이야. 알겠어?”
“예에…….”
“대답이 영 시원치 않다?”
엘리오의 집요함을 알고 있는 파비안은 슬며시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마족과 대화가 되겠습니까? 말이 통하는 것과 협상은 다르지 않습니까.”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어떻게요?”
“부탁할 거야. 죽고 싶지 않으면 협상에 응하라고.”
“그래도 응하지 않으면요?”
“어떻게 할 것 같아?”
엘리오가 허리춤에 걸려 있는 천둔검의 퍼멀(손잡이 끝의 무게추)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밀어 보였다.
“아, 예, 말씀하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단순 명료해서 좋네요.”
“진리는 본래 간단한 거야. 꾸밈이 많은 건 눈속임을 하고 있다는 뜻이지.”
“칼이 진리입니까?”
“진리까지는 모르겠고, 전에 말했잖아. 검은 곧 길이요 열쇠라고.”
“마족들에게 통할까요? 몰록의 최후를 알면서도 오는 걸 보면 최소한 몰록보다 더 강한 마족일 텐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만나 보면 알겠지.”
“북부 왕국들이 자작님의 생각에 동의할지도 의문입니다.”
“마족과 싸우고 싶다면 안 말려.”
“자작님은요?”
“나 뭐?”
“북부 왕국들이 끝까지 마족과 싸우겠다면 자작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히르헤라에 남아서 계속 싸우실 겁니까?”
“아니, 난 제도로 갈 거야.”
“왜요? 북부를 지키셔야지요? 평화를 지켜 주기 위해 왔다고 하셨잖습니까?”
엘리오가 의아해 하는 파비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타협을 제안했잖아. 그걸 거부하고 자기들 방식대로 싸우겠다면, 나도 내 방식대로 싸울 거야.”
“제도로 가는 게 싸우는 겁니까? 마족은 북부에 있는데요?”
“마족을 대륙으로 끌어들인 마그눔 오프스를 찾아야지. 그놈이 균열을 또 만들 수도 있으니까.”
“…….”
일리 있는 주장이라 파비안은 반박하지 못했다.
“북부 왕국들은 자작님이 제도로 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상관없어. 내가 누구 허락 맡고 움직이는 사람으로 보여?”
“반역자나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 소리 하기 전에 마족들에게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순간 글라체스 요새를 떠올린 파비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자리에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없었다면 모두 죽었을 것이다.
“자작님이 히르헤라를 떠나면 북부는 마족에게 짓밟힐 겁니다. 엄청난 희생이 뒤따를 텐데……. 그래도 가실 겁니까?”
파비안이 거듭해서 묻자 엘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파비안.”
“예?”
“그래서 내가 타협을 제안하겠다는 거잖아. 거기까지가 내 최선이라고. 북부의 귀족들이 전쟁을 선택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되는 거냐? 나냐? 북부의 귀족들이냐?”
“부, 북부의 귀족요.”
“그런데 왜 자꾸 나한테 그들이 선택한 전쟁의 책임을 떠넘기려고 그래? 내가 북부 귀족들의 꼭두각시야? 결정은 그들이 내리고, 뒷수습은 내가 해 줘야 돼?”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나한테는 그렇게 들리니까 생각 좀 하고 말해. 인마.”
“죄송합니다.”
파비안은 히르헤라를 떠난다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그는 정말로 균열 일대를 안정시키고 떠날 생각인 것이다.
반대하는 마족은 죽일 테지만, 북부의 귀족까지 죽일 수 없으니 그냥 방치하고 떠날 게 분명했다.
“내가 왜 이 세계에 왔는지 말했지? 히르헤라를 지키는 것도 좋지만, 균열을 일으킨 자를 잡는 건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야. 이 세계 전체를 위해서라도 나는 제도로 가야 돼. 북부 귀족들이 다 너처럼 멍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그건 엘리오의 진심이었다.
북부 귀족들이 어떻게 나오든 자신은 히르헤라를 떠날 테니까.
***
마족의 재침공을 앞두고 히르헤라 주둔지가 발칵 뒤집혔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 의해 생포된 흑마법사 딜런 던포드 때문이다.
그로 인해 5개월 전 히르헤라에 메테오 스웜이 떨어졌다는 비밀이 공개되었고, 연합군 대귀족들은 지금까지 그걸 숨겨 온 에스카토스 왕국을 맹비난했다.
히르헤라 왕국 연합 지휘 본부.
에스카토스 왕국군 참모장 메토 로베르트 자작이 북부 왕국 대귀족들 앞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덮었다.
“……이것으로 딜런 던포드에 대한 조사 결과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그러자 라미노프 왕국의 원수인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이 말했다.
“에스카토스 왕국이 히르헤라에서 일어난 중대한 사건을 왜 비밀로 했는지 따지지는 않겠소. 히르헤라에 계속 병력을 주둔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 만약 에스카토스 왕국군이 히르헤라에 주둔하지 않았다면, 욕을 퍼부었겠지만…….”
공작은 잠시 좌중의 반응을 살폈다.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걸 보니 비슷한 마음인 것 같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딜런 던포드에게 그 일을 지시한 배후가 누군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알아낼 방법이 있소?”
“아직은 배후가 천공성으로 갔다는 것밖에 알지 못합니다.”
“태양신의 거처로 알려진 그 천공성을 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건 배후에 태양신이 있다는 소리와도 같은데……. 우리가 흑마법사인 딜런 던포드의 말을 믿어야 하오?”
그의 말에 대귀족들이 가볍게 술렁거렸다.
차마 태양신에 대한 불경을 저지를 수 없던 그들은 옆사람에게 ‘흑마법사는 믿을 수 없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이어진 메토 로베르트 자작의 말에 대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궁정 마법사 메이지 칼로스 경께서 ‘진실의 눈’으로 딜런 던포드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대귀족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카토스 공작이 메토 로베르트 자작에게 물러나라는 듯 턱짓을 해 보였다.
뻘쭘한 얼굴로 서 있던 메토 로베르트 자작은 요령껏 조용히 뒤로 빠졌다.
이윽고 에스카토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먼저 히르헤라의 메테오 스웜을 끝까지 비밀로 한 것에 대해 사과하겠습니다. 히르헤라에 주둔한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그런 것이었다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딜런 던포드가 타메이온에 설치한 테르미누스의 제단을 완전히 파괴하였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이로써 히르헤라는 메테오 스웜의 위험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제야 굳어 있던 북부 연합 대귀족들의 얼굴이 펴졌다.
그들에게 메테오 스웜은 과거의 참극이 아니라 현재에도 일어날 수 있는 대재앙인 까닭이다.
얼마나 기뻤는지 무심코 박수를 치는 귀족들도 있었다.
박수 소리가 가라앉자 에스카토스 공작은 계속해서 말했다.
“천공성으로 돌아간 배후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타메이온에 또다시 어둠의 에테르가 뭉치고 있습니다. 몰록의 군단이 내뿜던 것보다 더 크고 거대합니다. 마족의 재침공이 임박한 현상이라고 보여집니다. 몰록의 군단보다 더 크고 강하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군세일 게 분명합니다.”
“…….”
북부 대귀족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에스카토스 공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아침, 딜런 던포드를 생포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만났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지난 마족의 침공 시 글라체스 요새에서 몰록을 죽인 히르헤라의 영웅이지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이름이 나오자 분위기가 묘해졌다.
대귀족들 앞에서 야인 출신의 검사를 영웅이라 떠받드니 심기가 불편한 것이다.
하지만 용병왕과의 결투 결과를 알기에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 마족 재침공을 두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가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그것은 ‘마족들이 계속 균열로 넘어오려 할 텐데, 그때마다 싸운다면 북부의 피해가 클 것이다. 차라리 마족과 상호 불가침의 협상은 어떤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대귀족들이 곧바로 반발했다.
“마족과 협상이라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절대악과 타협하자는 겁니까!”
“마족이 약속을 지킬 것 같습니까? 야인 출신이라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마족은 인간의 불행을 자양분으로 삼고 사는 존재입니다. 협상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설사 협상한다 해도 그것은 거짓입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소문이 따라다니던데……. 결국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법정에 세워야 합니다.”
“마족과의 협상은 기사도를 거스르는 발언입니다! 나 살자고 절대악과 손을 잡자고요? 그게 기사가 할 소립니까!”
마족에 대한 비난은 이내 엘리로 라고아 자작에 대한 성토로 바뀌었다.
대뒤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공격했다.
대귀족들의 반발이 예상보다 거세자 에스카토스 공작은 난감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사실 대귀족들의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인간에게 마족은 상종하면 안 되는 악 그 자체였으니까.
오죽하면 트레이더를 발견하는 즉시 죽일까.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악의 근원인 마족과 협상하자니, 대귀족들이 뒤집어질 만도 하다.
탈린 왕국의 원수인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귀족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에스카토스 공작께서도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그런 의견에 동의합니까?”
소드마스터이자 노련한 정치인인 에스카토스 공작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급진적인 제안과 거리를 두었다.
“히르헤라에서 세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공을 생각해 그런 의견도 있다는 걸 소개한 것일 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검술이 소드마스터 중에 으뜸일지는 몰라도, 그의 생각은 양치기만도 못하군요. 어린아이들도 알 겁니다. 마족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척살의 대상이라는 것을. 기사는 악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악과 타협하느니 죽음을!”
그가 선창하듯 외치자 북부의 대귀족들이 주먹을 허공으로 뻗으며 소리쳤다.
“죽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