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05
1105회. 그대를 모쿠바스의 군주로 인정한다
인간과 군주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발람이 마지못해 나섰다.
“부라퀴족의 후예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엘리오 라고아.”
엘리오는 마족 간의 대화라 작위를 갖다 붙이지 않았다.
“부라퀴족의 챔피언 엘리오 라고아여. 지금이라도 오해를 풀게 되어 다행이다. 나는 그로네미아의 군주인 발람이다. 우리와 더불어 인간을 죽이고, 인간의 땅을 차지하자.”
말과 함께 발람은 뚫어져라 엘리오 라고아의 눈을 응시했다.
누가 봐도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마몬, 랍바, 샤모스의 시선이 일제히 엘리오 라고아를 향했다.
그들은 엘리오 라고아가 발람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믿었다.
자신이 마족의 일원임을 주장했으니 그래야 마땅했다.
“이거 어쩌지?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엘리오의 말에 나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그대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듣고 싶군.”
발람은 속이 뒤집혔지만 몰록을 죽인 자이기에 일단 화를 눌렀다.
“챔피언인 내가 몰록을 죽였으니까 모쿠바스의 군주잖아. 안 그래?”
“그대가 몰록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는 부라퀴족의 챔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직 그대는 모쿠바스의 군주라고 보기 어렵다.”
“에이, 이거 왜 이래? 아직이니 뭐니 해도 결국 여기 있는 군주들이 인정하면 되잖아? 무슨 절차가 따로 있어? 인간들처럼 마왕의 허락이라도 받아야 돼?”
발람과 군주들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72명의 마족 군주들 중에 최강자가 마왕이지만, 인간 세계와 달리 마왕은 군주를 임명하는 데 관여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강자가 쟁취하는 게 마족의 율법인 까닭이다.
발람을 대신해 여성 마족인 샤모스가 나섰다.
“그대의 말대로 절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직 우리 군주들은 그대를 모쿠바스의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그대는 몰록을 죽인 챔피언일 뿐이다.”
“어이, 어이, 나를 호구로 생각하나 본데 그럼 안 돼. 나를 모쿠바스의 군주로 인정해. 그래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어.”
엘리오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손해 보기 싫어하는 심보도 작용했지만, 자신이 모쿠바스의 군주가 되어야 히르헤라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샤모스가 황당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를 보았다.
챔피언이 군주들을 제 뜻대로 움직이려 하다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의 요구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몰록을 죽인 챔피언이 모쿠바스의 군주인 것은 사실이니까.
사실 엘리오 라고아를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였다. 군주보다는 챔피언 신분이 다루기 수월하니까.
그런데 상대가 그걸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도 전장 한복판에서.
문득 전쟁 중이었음을 자각한 샤모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게 엉망이다.
마물과 마수 들은 소드마스터들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엘리오 라고아를 피해 마족이 흩어져 이제는 통제도 불가능한 상태.
마족 챔피언들마저 빠진 전선은 그야말로 대혼돈이었다.
샤모스가 다시 엘리오 라고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보니 이 전쟁의 성패는 그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샤모스는 승리를 위해 한발 양보했다.
“하아! 그래 좋다. 나는 그대를 모쿠바스의 군주로 인정하겠다.”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를 노려보던 발람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나 역시 그대를 모쿠바스의 군주로 인정하지.”
발람 역시 일단은 엘리오 라고아를 다독이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샤모스에 이어 발람까지도 인정하자 마몬과 랍바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대를 모쿠바스의 군주로 인정한다.”
“나 역시 인정한다.”
모두가 동의하자 발람이 대답을 재촉했다.
“엘리오 라고아여. 우리는 그대를 모쿠바스의 군주로 인정했다. 이제 그대의 생각을 말해라.”
네 명의 군주들은 물론, 다섯 명의 챔피언들과 주변에 있던 마족들까지 숨을 죽였다.
“너희들은 내 허락 없이 모쿠바스를 침공했다. 일단 모쿠바스 밖으로 군대를 물려라. 그런 후에 군주 대 군주로 협상을 재개하겠다.”
“…….”
한순간 네 명의 군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공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이제 와서 모쿠바스 밖으로 군대를 물리라니?
이미 인간의 땅에 진출한 상황에서 그건 들어주기 어려운 억지였다.
가장 먼저 거인 랍바가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헛소리! 우리는 모쿠바스를 침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지나갔을 뿐이다! 게다가 이곳은 모쿠바스도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모쿠바스 밖으로 군대를 물러야 하느냐!”
마몬도 한마디 거들었다.
“들어줄 수 없다. 우리가 모쿠바스를 지날 때, 모쿠바스에는 아직 군주가 없었다. 그러니 허락 운운하며 군대를 빼라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그런 발언은 우리 군주들에 대한 모욕이다. 당장 사과하고 철회해라.”
샤모스 역시 기가 막혔지만 더 말해 봐야 잔소리에 불과한지라 노려보기만 했다.
‘교활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르겠군.’
군주로 인정받겠다는 게 저 소리를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것만 보면 교활하지만, 네 명의 군주들을 자극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당장 발람만 봐도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폭발할 분위기건만 엘리오는 한술 더 떴다.
“혹시 대가리 수 믿고 그러는 거야? 내가 침공이라면 침공이고, 빼라면 빼는 거야. 사과하라고? 말 잘했다. 군대를 빼고 사과할래? 그냥 내 손에 다 죽을래?”
순간 발람이 벼락처럼 검을 뽑아 엘리오를 찍었다.
“뒈져라!”
발람의 급습에 엘리오는 물론 다른 군주들도 깜짝 놀랐다.
엘리오는 이형환위의 수법으로 발람의 뒤로 돌아갔다.
발람은 군주답게 바로 돌아서 엘리오의 허리를 베어 갔다.
쉬익―!
엘리오가 천둔검으로 발람의 검을 막았다.
쾅!
검과 검이 부딪쳤는데 귀청을 울리는 폭발음이 터졌다.
엘리오와 발람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상대에게 검을 휘둘렀다.
쾅! 쾅! 쾅! 쾅! 쾅―!
기습을 한 쪽은 발람이지만 조금도 우세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발람이 조금씩 밀리는 기색이다.
보다 못한 거인 랍바가 들고 있던 거대한 도끼로 엘리오를 내리찍었다.
그걸 피하지 않고 엘리오는 오라 블레이드를 발산해 후려쳤다.
콰창―!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도끼가 엘리오를 비껴 떨어졌다.
도끼 공격이 실패하자 랍바는 발을 들어 엘리오를 밟았다.
엘리오가 나비처럼 부드럽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발람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가며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 뜬 채로 엘리오는 발람의 검을 막았다.
채앵―!
이 대 일의 상황에 놓이자 엘리오는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조금 여유가 생긴 발람은 마법까지 썼다.
바닥에서 검은 손그림자들이 솟구쳐 올라 엘리오의 다리를 붙잡았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그를 향해 ―타락한 소드마스터의 영혼으로 만든― 다크나이트들이 떼지어 돌진했다.
다리를 붙들린 엘리오가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지만, 놀랍게도 발람이 만든 손그림자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오는 즉시 포룡검으로 다가오는 다크나이트들을 소멸 시켰다.
뒤이어 ‘사주파해(邪呪破骸)’의 주문과 함께 왼손 검결지로 바닥을 가리켰다.
“천계멸유(天計滅類) 신력일하(神力一下)!”
수백 개나 되던 손그림자들이 모래성 부서지듯 허물어져 내렸다.
그때 엘리오의 머리 위로 집채만 한 도끼가 떨어져 내렸다.
“잔재주는 거기까지다!”
슈아아악―!
순간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오른 엘리오가 천둔검을 치켜세웠다.
“누구더러 잔재주래!”
롱소드의 형태를 유지하던 천둔검이 크기를 키워 나갔다.
쑤우우욱―! 콰창―!
거대화된 천둔검에 도끼가 튕겨 났다.
하지만 엘리오는 그것으로 성에 안 차는지 계속해서 천둔검의 크기를 키워 나갔다.
마침내 거인 랍바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천둔검이 커졌다.
순간 엘리오가 거대한 천둔검으로 랍바를 내리찍었다.
몸이 두 조각 나기 직전 랍바는 도끼를 들어 올려 거대한 검을 막았다.
콰앙―!
묵직한 폭발음과 함께 랍바의 무릎이 꺾였다.
두 손으로 도끼를 잡고 버티는 랍바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발람이 구경만 하고 있는 마몬과 샤모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뜨거운 시선에 마몬이 먼저 움직였다.
마몬이 들고 있던 두 개의 륜을 엘리오 라고아를 향해 던졌다.
휘이잉― 휘잉―.
지름이 3미터나 되는 거대한 륜 두 개가 엘리오의 좌우편으로 파고들었다.
발람은 엘리오 라고아가 움직이지 못하게 다시 손그림자들을 불러낸 후, 검 끝으로 엘리오 라고아를 가리키며 외쳤다.
“모레토(죽어라)!”
순간 검 끝에 시커먼 마력이 뭉치는가 싶더니 이내 마력탄처럼 앞으로 날아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엘리오는 천둔검을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사주파해의 주문을 외우며 힘껏 공중으로 도약했다.
손그림자들이 엘리오의 발목을 잡고 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두 개의 륜이 손그림자를 꿰뚫고 지나갔다.
쐐액― 쐑―!
륜과 거의 동시에 날아든 마력구는 엘리오를 따라 허공으로 솟구쳤다.
휘이잉―!
그때 도끼를 짓누르던 천둔검이 하늘로 빙그르르 돌아 방향을 바꾸었고, 때마침 도약했던 엘리오가 검신에 착지했다.
강호에 전설로 전해지는 어검비행(御劍飛行)이다.
엘리오가 천둔검 위에서 군주들에게 호통을 쳤다.
“어이! 잔챙이들. 개떼처럼 덤비면 이길 줄 알았어?”
때마침 날아오른 발람의 마력구가 천둔검을 강타했다.
퍼엉―!
천둔검이 한차례 요동쳤지만 엘리오는 떨어지지 않았다.
“아! 씨발 깜짝이야. 발람아! 힘 좀 더 써야 되겠다.”
발람을 조롱하던 엘리오는 두 개의 륜이 날아오자 급히 북쪽으로 날아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발람이 그의 뒤를 추격했다.
마몬도 서둘러 두 개의 륜을 회수한 뒤에 발람의 뒤를 따랐다.
도끼를 챙기던 랍바가 지금까지 구경만 한 샤모스에게 말했다.
“샤모스. 설마 부라퀴족 놈 편에 설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내 팬텀 스피어도 엘리오 라고아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고.”
말과 함께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렸다.
츠츠츠츳―.
아무것도 없던 텅 빈 허공에서 거대한 은빛 창이 나타났다.
랍바는 은색 창과 샤모스를 번갈아 본 후에 북쪽으로 달려갔다.
쿵! 쿵! 쿵! 쿵―!
랍바가 멀어지자 샤모스의 손에 들려 있던 은색 창이 스르륵 모습을 감추었다.
군주들과 함께 북쪽으로 향하던 샤모스는 빙벽이 나타나자 눈을 찌푸렸다.
‘달아난 건 아닐 테고, 설마 타메이온에서 싸우겠다는 건가?’
그녀는 균열을 넘기 직전 뒤따라오던 챔피언들에게 명했다.
“너희들까지 올 것 없다. 너희는 이곳에서 군단을 정비하도록.”
챔피언들이 마족들에게 돌아가자 샤모스는 균열로 뛰어들었다.
균열을 넘어간 샤모스의 눈에 엘리오 라고아와 군주들의 대치가 들어왔다.
‘역시! 달아난 게 아니었구나.’
그녀는 엘리오 라고아의 담력에 혀를 내둘렀다.
조금 전의 싸움으로 자신이 군주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텐데, 끝까지 해보겠다는 태도가 가상했다.
네 명의 군주들은 자연스럽게 동서남북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오 라고아가 달아날 길을 미리 봉쇄한 것이다.
이윽고 발람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말했다.
“엘리오 라고아. 미련하고 욕심 많은 부라퀴족의 군주여. 우리는 너와 함께 인간의 땅을 나누려 했지만, 너는 그걸 거부하고 도리어 우리를 조롱했다. 이제 너를 죽이고, 너의 땅 모쿠바스까지도 우리가 나누어 갖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