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06
1106회. 마왕님만큼 강하다고요?
엘리오가 자기를 둘러싼 군주들을 쓰윽 둘러본 후에 말했다.
“미련하고 욕심 많은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살고 싶은 군주는 뒤로 빠져. 두 번의 기회는 없어.”
발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누가 봐도 제가 죽을 자리에서 도리어 군주들을 협박하다니?
저 정도면 미친 게 분명했다.
“부라퀴족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더니 무슨 소린지 알겠다. 기억하는가! 모쿠바스의 마족들은 몰록을 위해 복수한 자를 군주로 섬기겠다고 했다. 저 어리석고 오만한 부라퀴족을 죽인 자가 모쿠바스의 주인이 될 것이다. 에르구에테(일어나라)! 세르보 레아이스(충직한 종들이여)!”
주문과 함께 발람이 검을 들어 엘리오 라고아를 가리켰다.
그러자 검은 안개와 함께 백여 기의 다크나이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발람이 수집한 소드마스터들의 영혼이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소드마스터들이 각자의 칼을 뽑아 들고 금방이라도 달려갈 듯 상체를 수그렸다.
이에 질세라 마몬도 두 개의 륜을 머리 위로 던졌다.
차라라라락―!
수백 개로 분열한 륜들이 엘리오 라고아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거인 랍바가 대형 도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더니 두 손을 좌우로 펼쳤다.
대형 도끼는 어느새 손도끼로 변해 그의 양쪽 손에 하나씩 들려 있었다. 손도끼라고 해도 날의 길이만 2미터에 달했다.
손도끼를 양손에 나눠 든 랍바의 몸이 마기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샤모스는 팬텀 스피어를 사용하기에 앞서 엘리오 라고아를 보았다.
군주 둘의 합공에 쩔쩔매던 엘리오 라고아에게 넷이 달라붙었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느끼는 게 당연한데,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녀는 손에 쥐고있던 팬텀 스피어에게 마음으로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부라퀴족 군주를 죽일 수 있겠어?
자아를 가진 에고 웨폰(Ego Weapon) 팬텀 스피어가 속삭이듯 답했다.
―무서워.
―군주들이 넷이나 있는데도?
―소멸당하고 말 거야.
팬텀 스피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팬텀 스피어의 반응에 샤모스는 눈을 찌푸렸다.
―진정해. 그가 달아나는 걸 봤잖아. 그는 군주들을 이길 수 없어.
―몰라. 무서워. 그가 무섭다구.
―소멸당할 것 같으면 달아나도 돼. 잡지 않을게.
―…….
팬텀 스피어는 침묵했다.
위기의 순간 달아나겠다는 건지, 끝까지 곁에서 싸우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샤모스는 캐묻지 않았다.
곧이어 샤모스의 손에서 은색으로 빛나던 창이 스르륵 사라졌다.
엘리오가 천둔검으로 회색 하늘을 가리키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하늘에 ‘검의 화신(化身)’이 별처럼 맺혔다.
비처럼 쏟아지는 ‘검의 화신’ 속을 뚫고 다크나이트들이 달렸다.
하늘 위에서 원을 그리며 돌던 수백 개의 륜이 엘리오를 향해 내리꽂혔다.
대부분의 륜은 ‘검의 화신’과 충돌해 가루가 되어 사라졌지만, 운 좋게 ‘검의 화신’을 피한 륜들이 엘리오를 강타했다.
콰자자작―!
엘리오의 호신강기가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다.
‘검의 화신’을 뚫고 오느라 너덜너덜해진 다크나이트들이 파도처럼 엘리오를 덮쳤다.
엘리오와 다크나이트들의 싸움이 시작됐다.
미처 포룡검을 쓸 틈이 없던 엘리오는 천둔검으로 다크나이트를 상대했다.
생각도 없고, 어떤 의도도 없이, 엘리오는 천둔검을 휘둘렀다.
쾅! 쾅! 쾅! 쾅―!
무초식의 경지에 든 그에게 그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다크나이트들은 살아생전 검술의 최고봉에 이른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들과의 싸움인 만큼 치열한 것은 당연하다.
위기는 기회라던가!
무아지경에서 검을 휘두르던 엘리오의 기세가 조금씩 변해 갔다.
천둔검을 두고 도가에서 해석한 ‘천둔검법’의 요결은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놓아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는 것[無爲而爲]’이다.
검선 여동빈은 그것을 ‘무하유(無何有)의 검’이라 칭했다. 어찌 보면 ‘무하유의 검’은 무초식에 대한 여동빈의 깨달음이었다.
무초식은 정해진 규칙이 없으므로 내재된 흐름도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지금 엘리오의 격검은 강이 흐르듯 유려했다.
마치 검술이라 착각할 정도로, 즉흥적인 움직임 속에 도도한 흐름이 느껴졌다.
여동빈이 득물(得物)의 경지에 올라 만든 법기(法器)가 ‘천둔검’이라면, ‘무하유의 검’은 검술에 대한 궁극의 깨달음.
‘네 번째 하늘’에 와서 엘리오는 여동빈의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엘리오도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를 알아차렸다.
무초식의 경지에서는 그때그때 다크나이트의 검을 쳐 내기에 급급했는데, ‘무하유의 검’을 깨달으니 자신의 검에 다크나이트들이 검을 맞춰 주는 느낌이다.
여유가 생기면서 끓어오르기 직전이던 호흡이 안정됐다.
덕분에 엘리오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전황을 분석할 수 있었다.
머리 위를 벌 떼처럼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륜들과, 다크나이트들 뒤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쌍도끼의 거인, 그리고 무슨 수를 쓰려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 여자 마족.
운 좋게 부지불식간에 천둔검법의 오의(澳意)인 ‘무하유의 검’을 깨달았다고 해서 상대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자신은 마족 군주 둘을 상대하기도 벅차다.
꼭꼭 감춰 둔 구천검령이 아니었다면 아예 비벼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인간과 마족이 빙벽 너머 히르헤라에 있으니 소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기회를 엿보던 거인 랍바가 다크나이트들의 위로 훌쩍 몸을 띄웠다.
순간 허공을 선회하던 마몬의 륜들이 꼬리를 물고 엘리오에게 떨어져 내렸다.
발람도 다크나이트에 이어 마력구를 쏘아 보냈다.
샤모스는 자신의 모든 마력으로 다크 랜스(Dark Lance)를 만들어 던졌다.
사실 다크 랜스는 시선 끌기용에 불과하고 주공(主攻)은 팬텀 스피어였지만, 다크 랜스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엘리오는 꼭꼭 숨겨 두었던 구천검령을 끄집어냈다.
고오오오―.
갑자기 군주들에게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압력이 가해졌다.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압박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랍바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거대한 검이 머리로 떨어지고 있었다.
“뭐야!”
랍바는 황급히 두 개의 손도끼를 교차시켜 칼끝을 막았다.
퍼석―!
그러나 랍바의 손도끼는 허망하게 바스러졌다.
뒤이어 거대한 검이 랍바의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양단했다.
발람은 랍바의 최후를 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그러나 구천검령이 그보다 빨랐다.
거대한 검은 발람의 등을 콕 찍어 설원에 깊숙이 처박았다.
마몬의 최후도 발람과 비슷했다.
구천검령에 꿰뚫린 마몬의 몸은 설원 위에 한 무더기 핏물만 남기고 사라졌다.
동료 군주들의 죽음을 본 샤모스는 재빨리 설원에 납작 엎드렸다.
“모쿠바스의 군주시여!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군주가 아니라 마치 마왕을 대하듯 그녀는 머리를 설원에 처박았다.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던 구천검령이 그녀의 뒤통수에서 멈췄다.
엘리오가 손짓하자 네 개의 구천검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샤모스는 찍어 누르는 힘이 사라지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 엘리오 라고아와 눈이 마주치자 억지로 웃어 보였다.
엘리오가 그런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
“누구라고?”
“저는 헤일록의 군주인 샤모스입니다.”
“샤모스, 내가 당신을 살려 둔 이유를 알아?”
“가르쳐 주십시오.”
“타메이온에 내가 아는 마족이 없어. 모쿠바스의 군주라는데, 정작 모쿠바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왜 그런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
“군주님의 종족이 오랫동안 타메이온을 떠나 있었으니 당연합니다.”
“맞아. 나를 도와줄 마족이 하나쯤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남겨 둔 거야.”
“감사합니다! 불편함이 없도록 군주님을 모시겠습니다.”
“그건 지켜보면 알겠지. 그리고 오늘 본 것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마. 그랬다가는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 버릴 테니까.”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만 일어나도 될까요?”
이제 살았다고 생각한 샤모스는 딱딱하던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앞세워 그와 친해지기 위해서다.
“마음대로.”
허락이 떨어지자 샤모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키는 3미터에 달해서 엘리오가 올려다보아야 했다.
“이거 불편하네.”
그러자 샤모스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엘리오와 눈높이를 맞췄다.
샤모스의 커다란 가슴골이 눈에 들어오자 엘리오가 손을 휘저었다.
“눈 버리겠다. 저만치 떨어져.”
엘리오의 지시에 샤모스는 서둘러 엘리오와 거리를 벌렸다.
오 미터쯤 떨어지자 엘리오가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지 않아도 됐다.
“할 일을 알려 주지. 지금 당장 인간의 땅에 있는 마족 군대를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 나는 내 영역을 누가 침범하는 걸 아주 싫어해.”
“예.”
대답만 하고 샤모스가 움직이지 않자 엘리오가 말했다.
“왜 안 움직여? 가서 마수, 마물, 마족 들을 싹 다 돌려보내라니까!”
“그러면 됩니까?”
“되다니? 보내고 와. 모쿠바스까지 안내를 해 줘야지.”
“아, 예.”
어딘지 김빠진 소리로 답한 샤모스는 서둘러 균열로 달려갔다.
잠시 후 마족, 마물, 마수 들이 타메이온으로 되돌아왔다.
살아남은 챔피언들이 마족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헤일록의 군주 샤모스와 챔피언 에피알이 엘리오의 앞에 나란히 섰다.
엘리오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에피알에게 물었다.
“너는 왜 남았어?”
“샤모스 군주님을 돕기 위해서 남았습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오가 샤모스에게 말했다.
“인간의 땅에서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올 때까지 얼음숲에서 기다려. 그동안 마족과 마물이 균열로 가지 못하게 하고.”
“마수들은요?”
“마수들은 괜찮아. 두 발 달린 짐승이 어딘들 못 가겠어.”
“예.”
샤모스는 새색시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공손히 대답했다.
“일주일 안에 돌아올 테니까 그런 줄 알아.”
말을 마친 엘리오는 어기충소의 신법으로 까마득히 솟구쳐 오른 뒤, 빙벽으로 날아갔다.
엘리오 라고아가 사라지자 에피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군주님, 다른 군주들이 정말 그의 손에 죽었습니까?”
“일격에 죽었다.”
“엘리오 라고아 군주는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았는데요?”
“그는 마왕님만큼이나 강하다. 그러니 그의 눈 밖에 날 일은 하지 마라.”
“마왕님만큼 강하다고요?”
“더 강할 수도 있고.”
“마왕님은 악신 샤이틴님의 적자(嫡子)로 불릴 만큼 큰 권능을 받았는데……. 마왕님보다 더 강하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모른다. 하지만 팬텀 스피어까지도 그를 두려워했다. 팬텀 스피어가 두려워 하는 마족은 그가 처음이다.”
“에고 웨폰도 두려움의 감정이 있나요?”
“있더구나.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하아! 내 키가 너만 했어도 엘리오 라고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는데…….”
샤모스가 아쉬운 눈으로 에피알을 보았다.
마족치고 체구가 작은 에피알은 부라퀴족보다 컸지만, 그래도 고개를 들고 쳐다봐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평소에는 작은 키의 에피알이 한심했는데 오늘은 부럽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