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71
1171회. 애들 자존심 좀 세워 주십쇼
탑캐슬에서 내려온 파비안은 나올 때와 달리 느긋하게 선수로 돌아갔다.
“전함이 아니라 일반 상선을 개조한 해적선 같습니다.”
“확실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물음에 파비안이 자신 있게 답했다.
“예, 선체가 납작합니다. 전함은 선체 측면에 함포를 달아야 해서 선체가 엄청 높거든요.”
“갑판에도 없고?”
“그건 망원경으로 확인했습니다. 깨끗합니다.”
“진짜 해적선인가 보네. 제국의 바다에서 해적질이라니 간이 부었나?”
“남부와 전쟁이 나서 어수선하니까 몰려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의 해역에 해적이라…….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생각해 봐. 마의 해역을 누가 다닌다고 해적선이 여기까지 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날카로운 지적에 파비안은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우리를 콕 찍어 뒤따라온 것 같잖아. 안 그래?”
“좀 수상하기는 하네요.”
“뭐, 해적들을 잡아 보면 알겠지. 우연인지, 내통한 사람이 있는지. 천공성은 안 나타나고, 웬 똥파리들이 꼬인데. 젠장.”
투덜거리던 엘리오는 의자에 앉은 채로 두 발을 길게 뻗어 난간에 걸쳤다.
파도에 부딪친 배가 거칠게 출렁거렸지만 그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부 아드리아 왕국 사략선(私掠船, privateer ship) 옥토퍼스 호.
선수에서 망원경으로 마력범선을 살피던 아르코스 아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쯤이면 우리가 뒤에 붙었다는 걸 알 텐데……. 속도에 변화가 없군.”
그러자 갑판장인 캐머런이 물었다.
“우리를 상선으로 생각한 걸까요?”
“식별 깃발도 올리지 않았는데……. 그렇게까지 멍청할까?”
“밀거래를 하는 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확실한 게 좋겠지? 포술장!”
그의 부름에 갑판에서 대기 중이던 포술장 우리엘이 큰 소리로 답했다.
“예! 선장님!”
“지금 즉시 위장포를 걷어 내고, 마력범선의 주돛을 날려라. 주돛이 파괴될 때까지 포격을 멈추지 마라.”
“알겠습니다. 1포대, 2포대, 위장포 걷어! 마력포 발포를 준비한다!”
선원들이 위장포를 벗겨 내자 선수에 2문의 마력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거리와 풍속 등의 계산을 끝낸 포수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1포대 발포 준비됐습니다!
“2포대 발포 준비됐습니다.”
“쏴!”
포술장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2문의 마력포가 불을 뿜었다.
쾅! 쾅!
한 발은 마력범선의 좌측 수면에 떨어졌지만, 다른 한 발이 마력범선의 선미에 맞았다.
발사 각도를 수정한 포수들이 계속해서 마력포를 쏘았다.
이차 포격은 전부 마력범선을 맞추었다.
망원경으로 마력범선을 살피던 아르코스 아달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어렸다.
두 번째 포격으로 명중이라니, 포수들의 실력도 뛰어나지만 운이 좋았다.
하지만 마력범선의 주돛이 파괴된 것은 네 번째 포격에서였다.
주돛이 파괴되자 마력범선은 백기를 올렸다.
정지한 마력범선 옆으로 사략선 옥토퍼스 호가 빠르게 다가갔다.
곧이어 옥토퍼스 호의 선원들이 마력범선에 갈고리를 걸어 두 배를 붙였다.
잠시 후 아르코스 아달은 해적들과 함께 마력범선으로 건너갔다.
알트헬름 선장이 굳은 얼굴로 해적들을 맞이했다.
“송구한데 어느 왕국의 분들이십니까? 저희는 군함은 물론 상선도 아닙니다. 혹 배를 탈취하러 오셨습니까?”
그러자 갑판장 캐머런이 옥토퍼스 호의 선장을 대신해 나섰다.
“우리는 아드리아 왕국의 사략선이다. 이 배에 제국 귀족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을 내주면 너희는 무사할 것이다.”
“제국 귀족이라고요? 그분들은 제국의 귀족이 아닙니다.”
알트헬름 선장이 황당한 얼굴로 해적들을 보았다.
출항하기 전 조타수와 항해사에게 귀족들을 모시고 항해할 거라고 했는데, 그게 제국 귀족으로 와전된 모양이다.
“제국의 귀족이 아니라고? 그럼 누구란 말이냐?”
“그분들은 북부의 귀족분들이십니다.”
“북부?”
캐머런이 기막힌 눈으로 아르코스 아달 선장을 돌아보았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르코스 아달 선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국 귀족을 잡아 몸값이나 벌려고 했는데 북부 귀족이란다.
물론 해적이니 어느 왕국 귀족을 잡아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기껏 아드리아 왕국의 사략선이라고 거창하게 말해 놓고, 북부 귀족을 잡아가는 건 영 모양새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남부 왕국과 제국 간 전쟁이 터진 상황에서 북부 귀족을 잡아가는 건 아드리아 왕국에도 부담이 될 터였다.
어쩌면 사략 허가장이 취소당할 수도 있었다.
북부 귀족의 몸값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사략 허가장만큼은 아니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아르코스 아달이 마력범선 선장에게 물었다.
“북부 귀족들은 어디 있느냐?”
그러자 알트헬름이 선수 쪽을 가리켜 보였다.
아르코스 아달의 시선이 상대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차양막이 쳐진 선수에 세 남자가 ―의자까지 놓고―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마력범선이 해적선에 나포됐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들이다.
태평스러운 그들을 본 아르코스 아달의 심기는 좋지 않았다.
사략선이라 해도 근본은 해적.
전쟁 중인 왕국이 자국에서 활동하는 해적들에게 ‘적국의 배는 털어도 그 죄를 묻지 않겠다’고 부분적으로 노략질을 허가해 준 것이 사략선이다.
그러다 보니 해적선과 사략선의 차이도 사실상 미미했다.
해적질은 해적질대로 하면서 사략선이라 주장하는 해적들도 있었다.
물론 아르코스 아달이 그 정도까지 막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태평스러운 북부 귀족들을 보니 슬쩍 짜증이 났다.
해적이 자신들의 처우를 두고 고민하는 지금도 남의 일 구경하듯 하다니!
그들에게 포탄값이라도 뜯어내야겠다고 생각한 아르코스 아달이 마력범선 선장에게 말했다.
“북부 귀족들을 데려와라.”
해적 선장의 말에 알트헬름은 황급히 선수로 다가갔다.
“해적들이 오시랍니다.”
그러자 엘리오가 바다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용무 있는 놈이 오라고 해요.”
“…….”
머뭇거리던 알트헬름은 다시 해적들에게 돌아갔다.
“직접 오시랍니다.”
그는 차마 북부 귀족의 말을 다 전하지 못하고 해적선장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생각하던 아르코스 아달이 선수로 걸음을 옮겼다.
무장한 해적들이 그와 함께 우르르 선수로 이동했다.
선수로 다가갈수록 아르코스 아달의 얼굴이 굳었다.
‘뭐지? 느낌이 좋지 않아.’
그러다 초로의 노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서고 말았다.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산을 보는 것 같았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인 그는 초로의 노인이 자신보다 월등히 강함을 알았다.
‘헉! 소드마스터인가?’
그는 단번에 눈을 내리깔았다.
소드마스터의 일검에 옥토퍼스 호가 양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력범선과 옥토퍼스 호의 거리가 상당하다면 마력포로 때려 부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두 배가 붙은 상태라면 무조건 소드마스터의 승리다.
그가 꼬리를 내리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입을 열었다.
“해적 주제에 소드 익스퍼트라니 제법이구나. 어디의 누구냐?”
“아드리아 왕국의 아르코스 아달 자작입니다.”
“거기서는 해적에게 작위도 내리나?”
“아닙니다. 오래전 몰락한 가문입니다만……. 제국과 전쟁이 나자 국왕께서 사략 허가와 함께 사멸됐던 작위를 되살려 주었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나는 베일럼 왕국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다. 내가 모시는 북부의 영주님과 함께 마의 해역을 탐사 중에 있다. 그런데 자작의 사략선이 우리 배를 노리고 온 거다.”
“용서해 주십시오. 북부 귀족분들이 탄 배라는 걸 알았다면 공격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국 귀족들이 탔다고 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지금 즉시 주돛을 교체해 드리겠습니다.”
항해 중 돛대가 부러지는 일이 종종 있기에 대부분의 배들은 목재를 싣고 다니다가 자체적으로 고쳐서 쓰곤 했다.
특히나 해적들은 전투를 자주 치르는 만큼 선박 수리에 능하다. 그래서 파괴된 주돛을 교체해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교체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교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빠를 필요는 없다. 내일 저녁까지 교체하면 되겠다.”
“내일 저녁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일 저녁까지다. 시간을 엄수할 수 있겠느냐?”
“오늘 저녁까지 해 드릴 수…….”
“머리가 나쁜 친구로군. 나는 그 일을 내일 저녁까지 해 주기를 바란다.”
“아, 예. 내일 저녁까지 교체하겠습니다.”
아르코스 아달은 의아했지만 소드마스터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해적들은 옥토퍼스 호와 마력범선을 더 단단히 결속시키는 한편, 자신들의 포격으로 파괴된 마력범선의 주돛 교체에 들어갔다.
***
그날 밤.
사략선 옥토퍼스 호.
모두가 잠든 시간, 옥토퍼스 호의 조타장 월터가 아르코스 아달에게 슬쩍 물었다.
“선장님, 그냥 이대로 저 북부 귀족들을 보내실 겁니까?”
“무슨 소리냐?”
“북부 귀족들 때문에 우리가 엄청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까?”
“주돛 수리를 말하는 거냐?”
“시간이며 물자 측면에서 손해가 막심합니다.”
“저 배에 북부 귀족들이 탄 줄 모르고 부쉈으니 고쳐는 줘야지.”
“그 북부 귀족들이 문제입니다. 정작 백작은 조용한데, 그 옆에 떨거지들이 아주 속을 박박 긁어 댑니다.”
“내일만 참으면 된다.”
“미친놈들처럼 하루 종일 하늘만 쳐다본다고 애들이 한마디 했다가 얻어 맞았습니다. 아무리 북부 귀족이라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북부 귀족 놈들을 그냥 두면 안 된다고 슬슬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냥 두지 않으면? 저쪽에 소드마스터가 있는데 싸우기라도 하자는 소리냐?”
“수리를 마치면 헤어질 거 아닙니까. 거리가 좀 멀어졌을 때 포격으로 끝장내면 되잖습니까? 소드마스터도 배가 침몰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쯧쯧! 북부 귀족들을 죽였다가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남부 왕국들이 북부 왕국과의 동맹을 되살리려고 애쓰는거 모르느냐? 우리가 북부 귀족들을 죽인 게 소문나면 사략 허가장이 날아갈 게다.”
“마의 해역에서 배 한 척 침몰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요? 배가 침몰해서 싹 다 죽으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겁니다. 저희 애들 자존심 좀 세워 주십쇼. 한 시간 정도만 포격하면 두 동강 날 겁니다.”
아르코스 아달이 애매한 눈으로 월터를 보았다.
사실 거리만 확보되면 포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 해도 백 미터를 날아올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고작 해적 몇 놈 맞았다고 소드마스터가 탄 배를 침몰시키자?
솔직히 그래도 되나 모르겠다.
“하루만 참으면 안 되겠나?”
“불만 많은 놈들 입을 통해서 ‘우리가 북부 귀족놈들 배를 고쳐 준 것은 물론 두드려 맞기까지 했다’는 소문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아르코스 아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일이 알려지면 해적들 사회에서 호구 취급을 당할 게 뻔했다.
공포스러운 이름으로 알려지기 바라는 해적들에게 그건 치명적이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입 닥치고 주돛의 교체에만 집중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가서 포술장 불러와.”
“예.”
포술장을 부르러 가는 월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 늦은 시간에 은밀히 포술장을 찾는 걸 보면 자신의 말이 통한 게 분명했다.
‘개새끼들, 다 죽었어.’
북부의 귀족이건, 소드마스터건 상관없다.
누구라도 바다에서 해적을 건드리면 좆 된다는 걸 알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