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76
1176회. 신분의 고하보다 강한 자연의 법칙
정오 무렵.
탑캐슬 감시 겸 갑판원 라이트가 주돛 상층부의 탑캐슬로 올라갔다.
“어이, 마일로. 뭐 좀 보이는 게 있어?”
그러자 새벽부터 탑캐슬에 올라와 있던 마일로가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
“없어. 있으면 안 되지.”
“크큿! 안 된다고? 북부 귀족들 열받는 소리 하지 마라. 전에 귀족들 앞에서 입 털다가 얻어터진 선원들 있었다더라.”
“눈치 없는 것들은 맞아도 싸. 갑판 분위기 어때? 오늘도 저기압이냐?”
“야 야, 말도 마라. 라고아 자작 눈치 보느라 다들 숨도 크게 못 쉰다. 오죽하면 내가 한 시간 일찍 올라왔겠냐?”
라이트가 올라왔음에도 마일로는 바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 역시도 갑판에서 눈치를 보느니 탑캐슬이 편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이해가 안 가. 천공성을 찾아서 뭘 한다고 이 짓거리를 하나 몰라.”
“그 사람들은 남는 게 시간이잖아. 그래도 감사한 일이지. 그런 사람들이 없었어 봐라. 우리는 그물질하고 있어야 돼.”
“하긴. 그나저나 하루 삼교대로 견시만 하라니, 좋긴 좋은데 너무 심심해. 이젠 바다만 봐도 멀미가 나려고 해.”
“요령껏 해야지.”
“견시에 무슨 요령이 있냐?”
그러자 라이트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 앉아서 잠깐잠깐 졸아도 아래서는 몰라. 난 어제부터 꿀잠 중이다.”
“미친. 그러다 뭐가 나타났는데 못 보면? 너 그러다가 좆 된다.”
“너 소문 못 들었구나? 북부 귀족들 중에 소드마스터가 있어. 마의 해역 인근에 있던 해적들이 싹 다른 데로 옮겨 갔단다. 요 며칠 배 한 척 본 적 있냐? 없어. 씨가 말랐다고.”
“아무리 그래도 잠은 아닌 거 같다. 아우! 씨발, 생각만 해도 오싹하네.”
“길게 자면 안 되지. 그래서 요령껏이라고 말했잖아. 잠깐잠깐은 괜찮아. 시간도 잘 가고.”
“난 간이 작아서 그런 건 못 하겠다. 말만 들어도 심장이 벌렁거리네. 나 내려간다.”
갑자기 라이트가 부담스러워진 마일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로 슬슬 기어 내려갔다.
마일로가 사라지자 라이트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우, 쫄보 새끼. 그러니 저렇게 말랐지.”
이윽고 그는 주돛에 등을 기대고 먼 바다를 응시했다.
‘악마를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수평선에 고깃배 한 척이 등장했다.
벌떡 일어나 아래를 향해 외치려던 그는 ‘아!’ 하더니 도로 주저앉았다.
뒤늦게 ‘고깃배와 상선은 알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떠오른 것이다.
북부 귀족들은 ‘기상이변이 일어나는 징후’나, ‘이전에 보지 못한 섬, 또는 인공 구조물’이 발견되면 알리라고 했다.
마의 해역에는 섬이 없다.
섬이 없으니 당연히 인공 구조물도 없다.
견시 선원의 입장에서 이건 놀고먹으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
피에스트라.
하데스 항.
오후 5시.
항구 중심부를 가로지른 금발의 여기사가 항구 관리 책임자의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보리스 기사단의 벤젤이다.
그녀가 저택의 문을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 깁슨 캐넌이 나왔다.
“벤젤 경?”
“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깁슨 캐넌은 들어오라는 듯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간 벤젤은 거실을 슬쩍 살폈다.
성공한 라무스답게 거실이 화려했다.
“잠시 앉으시지요.”
깁슨 캐넌이 가죽 소파를 가리켜 보였다.
벤젤이 소파에 걸터앉자, 깁슨 캐넌은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플루티 남작님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희 아이를 매일 1시간씩 가르쳐 주실 거라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네.”
“사례비는 한 달에 10실버고요?”
벤젤은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타이스 플루티 남작이 교육 시간과 보수까지 정했을 줄은 몰랐다.
“네, 맞아요.”
“남작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오랫동안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봄이 되면 큰아이가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을 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벤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10월이니 봄이 되려면 아직 다섯 달이나 남았다.
북부 귀족들이 언제까지 하데스 항에 머물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도 그들이 남아 있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깁슨 캐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이콥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깁슨 캐넌이 자리를 비우자 벤젤은 거실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관리 책임자의 저택답게 항구 중심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문득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걱정도 됐지만, 작위를 얻으려면 눈에 띄는 공적을 쌓아야 한다.
위험이 큰 만큼 얻게 될 이익도 크다.
그녀가 주먹을 불끈 말아 쥘 때, 깁슨 캐넌이 12살 난 아들 제이콥과 함께 돌아왔다.
벤젤은 제이콥과 인사를 나눈 뒤에 항구 관리자의 집을 나섰다.
치안대와 기사단이 철수한 거리는 묘하게 낯설었다.
어제까지 돌아다닌 거리건만 마치 타국의 땅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항구 중심의 태번(tavern)으로 향했다.
‘바닷바람’이라는 간판을 보니 며칠 전에 만났던 북부 귀족들이 떠올랐다.
피식 웃던 그녀는 바닷바람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느 때처럼 셀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맥주와 간단한 먹거리를 주문했다.
“그런데 오늘 기사단 분들이 안 보이더라고요? 무슨 일이 있어요?”
“아, 내성에서 훈련 중이야.”
“기사단이 전쟁터로 파병 간다는 소리가 있던데 맞아요?”
벤젤이 황당한 눈으로 셀리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그래?”
“누구라기보다는 손님들이 그러더라고요.”
“아냐. 기사단이 하데스 항구를 지켜야지 가긴 어딜 가? 남부 왕국군이 국경선까지 밀려온다면 모를까?”
“아하! 헛소문이었나 보네요.”
탄성을 흘리던 셀리가 허리를 굽혀 벤젤에게 속삭였다.
“오늘 제도에서 온 기사들이 남아 있던 방을 죄다 세냈어요. 그런데 표정이 너무 차가워요. 어쩌다 눈이 마주쳤는데, 소름이 오싹 돋더라고요. 으으.”
셀리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다가 주방으로 돌아갔다.
특무대 대장인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방문 너머에서 조금은 나른한 중년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상대가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소드마스터이자 특무대 대장인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답했다.
“콜드월 백작입니다. 지금 저녁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기다리게.”
“예.”
잠시 후 중년의 기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묵례를 해 보였다.
고개를 까딱인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케이사 콜드월 백작을 지나쳐 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태번 일 층으로 내려갔다.
무료한 얼굴로 실내를 둘러보던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의 눈이 한순간 빛났다.
창가 자리에 보기 드문 금발의 미녀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미녀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누군가 다가오자 벤젤은 무심코 고개 들어 상대를 보았다.
한순간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특무대라서 놀란 게 아니라 상대가 너무 고위층 같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호. 말투를 보니 기사인가 보군. 맞나?”
“제가 입고 있는 옷도 보리스 기사단의 정복입니다만.”
“보리스 기사단?”
그가 중얼거리자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 뒤에서 한마디 했다.
“각하, 보리스 기사단은 벨라누스 백작의 기사단입니다. 너는 누구냐? 기사단이 항구에서 철수했는데, 왜 너는 남아 있지?”
“아, 저는 벤젤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 항구에 들렀을 뿐입니다.”
“개인적인 용무? 말해라.”
“항구 관리 책임자 깁슨 캐넌 씨의 집에서 검술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캐넌 씨의 아들이 내년 봄에 기사 아카데미 입학을 앞두고 있어서…….”
“흥! 허튼소리. 보나 마나 오늘부터 가르치기로 했겠지?”
벤젤이 답하기 전에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손을 들어 대화를 끊었다.
“콜드월 백작, 숙녀분에게 말이 너무 거칠군.”
“각하!”
“잠깐, 이제부터는 생각하고 말하게. 내 어깨 위에 달린 것도 머리라네. 나는 이 숙녀분이 마음에 들어. 이 궁벽한 촌에서 볼 수 없는 미모를 지녔거든. 그것 하나만으로도 숙녀분은 대접받을 자격이 있네. 경은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은 무슨 소리를 해도 여색을 밝히는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의 귀에 들어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노파심에 실수를 했습니다. 각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말과 함께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벤젤 양, 합석해도 되겠지?”
“네…….”
벤젤은 일단 상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사실상 그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벤젤을 빤히 보았다.
정면에서 보니 제도의 미녀들 못지않아 마음이 흡족했다.
“벤젤 양은 라무스인가?”
“아닙니다. 부모님 모두 평민이십니다.”
“벤젤 양의 얼굴에서 고귀한 혈통이 느껴지는데 평민이라고?”
“아버지는 떠돌이 용병이셨고, 외조부는 영주님의 숲을 관리했습니다. 그런데 송구한 질문입니다만, 누구십니까?”
“나? 나는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네.”
그 말에 벤젤은 저도 모르게 상대를 뚫어져라 보았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그 유명한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의 동생인 까닭이다.
‘세상에…….’
인류 최강의 검사로 알려진 크나우프 대공은 ‘미완의 그랜드 마스터’라 불린다.
소드마스터들을 수도 없이 꺾은 그에게 ‘미완’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건,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 본인의 뜻이었다.
“놀란 얼굴이군?”
순간 벤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후작 각하!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손을 휘저었다.
그가 발출한 마나의 파장이 벤젤을 강제로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앉아라. 나는 지나친 예의를 좋아하지 않아.”
“예…….”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정색을 하고 말하자 벤젤은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세상에는 신분의 고하보다 강한 자연의 법칙이 있다. 그게 뭔지 아느냐?”
“그런 것이 있습니까?”
“있다.”
“신분의 고하보다 강한 자연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다.”
“…….”
순간 벤젤은 기가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크나우프 대공가의 후작이나 되는 사람의 입에서 저런 저질스러운 말이 나오다니.
한편으로 혼외자인 그녀에게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의 말은 오히려 상처가 됐다.
“동의하지 않는 얼굴이군.”
“신분에 걸맞은 상대를 만나야 서로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에 묻지. 너의 꿈은 작위를 받는 것일 테지?”
“그렇습니다.”
“나의 은총을 입으면 작위를 받게 된다. 너는 꿈을 이루고, 나는 미녀를 얻는다. 이것도 서로가 행복해지는 것 같은데, 아니냐?”
“각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의 꿈은 기사로서 공적에 합당한 작위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하의 말씀대로 하면 각하만 행복해질 뿐입니다.”
“재밌군. 나는 너처럼 가시 돋친 장미가 좋아. 너무 고분고분해도 취하는 맛이 없거든.”
노골적인 희롱의 말에 벤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의 말씀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후회할 텐데.”
“각하의 말씀을 따르면 더 큰 후회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벤젤은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후 물러났다.
그녀가 떠나자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케이사 콜드월 백작에게 손을 까딱였다.
“예, 각하.”
“벤젤을 조사해 보게. 뭔가 감추는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