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61
1261회. 대수림의 밤이 원래 이렇게 조용한가?
루나 마일러스는 엘리오의 다소 과격한 반응에 가슴이 철렁했다.
강호에서 함께 지낼 때 두 사람은 언성조차 높인 적이 없었다.
마음이 잘 맞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엘리오가 자신의 뜻에 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엘리오가 자신의 말을 끊고 항의하듯 따져 물으니 루나 마일러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너를 싫어하고, 실망해?”
“그럼 왜 나한테 거리를 두는데요? 나랑 함께 있고 싶어서 왔다면서, 왜 나를 밀어내냐고요.”
엘리오가 원망 어린 눈으로 루나 마일러스를 쏘아보았다.
사실 그는 하루 종일 루나 마일러스의 옆을 맴돌며 지분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웃으며 다 받아 주었다.
하지만 받아 주기만 했지 단 한 번도 먼저 엘리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삼십여 년간의 독수공방이 만들어 낸 철벽이거나, 엘리오에 비해 늙었다는 자격지심으로 인한 것이리라.
아니, 어쩌면 그 둘이 섞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그런 복잡한 감정을 ―그렇지 않아도 단순한― 엘리오가 알아차리기는 어려웠다.
머뭇거리던 루나 마일러스가 힘겹게 입을 뗐다.
“너는 아직도 이십 대 후반이지만…….”
“설마 나이 때문에 그런 거예요? 괜찮다고요. 누가 누님을 환갑이 넘은 나이로 보겠어요? 누님은 지금도 이십 대로 보인다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잖아. 나이에 맞지 않게 주책이라고 생각할까 봐…….”
“내가요? 어딜 봐서요? 내가 하루 종일 누님에게 껄떡댄 거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해요?”
“풋!”
엘리오의 말에 루나 마일러스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확실히 그는 오늘 꽤나 짓궂게 굴었다.
심하게 말하면 마치 발정 난 개처럼 자신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의 평소 성품을 생각하면 이세계에서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왜 웃어요?”
대답 대신 루나 마일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예? 어디로요?”
“어디긴 방이지. 오늘 밤 편히 쉴 생각하지 마. 너는 일 년이지만, 나는 삼십 년이나 참았다고.”
이윽고 그녀는 엘리오의 팔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안았다.
팔꿈치에 루나 마일러스의 몸이 닿자 엘리오는 허겁지겁 이 층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
다음 날.
엘리오 일행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대수림으로 들어갔다.
대수림은 말과 마차가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길이 험난하다.
당연히 엘리오 일행도 두 발로 이동해야 했다.
숲에 난 좁은 길을 선두 그룹에서 걷던 파비안이 질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와아! 설마 끝까지 이런 길은 아니겠죠? 그런데 이 길이 맞기는 합니까?”
그러자 하워드 솔론 남작이 답했다.
“일단 길이 하나뿐이니 맞을 겁니다. 나중에 길이 갈라지면, 그때는 별자리를 보고 가야 하지만요.”
“어비스에 가 본 적 있습니까?”
“저도 처음입니다. 어비스까지 가는 방법은 아카데미에서 이론으로만 배웠습니다. 남부 왕국에서 어비스 여행을 실습하는 곳은 아드리아 왕국의 아카데미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아드리아 왕국 아카데미 출신인 크레아가 슬쩍 끼어들었다.
“어비스까지는 아니고 딱 사흘 동안 대수림에 머물다가 돌아가요. 아, 제가 아드리아 왕국 아카데미 출신이거든요. 졸업반에 한해 대수림 체험이 있었어요.”
“아!”
파비안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크레아를 보았다.
검술 실력도 수준급인데, 대수림의 경험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뭐 대단한 건 아니니까 기대하지는 마세요. 사흘이라고 하지만 사실 대수림 초입에서 머물다가 돌아간 것뿐이니까요.”
그러자 하워드 솔론 남작이 한마디 했다.
“대수림에서 사흘이면 대단한 거다. 어비스까지 보름 정도 걸린다지?”
“길만 헤매지 않는다면요.”
“너만 믿는다.”
“남작님도 별자리는 볼 줄 알잖아요?”
“책으로 배운 것과 실제는 다르니까. 오늘 밤에 별자리나 확인해 봐야겠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이론과 실제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러마.”
“그게 다예요?”
“응? 뭐가 빠졌느냐?”
“고맙다거나, 보답으로 뭘 해 주겠다 이런 거 없어요?”
“아, 고맙다. 내가 뭘 해 주면 되겠느냐?”
“음, 생각해 볼게요.”
“그래, 아무 때고 말만 해라.”
“말하면 다 들어주실 건가요?”
“내 능력이 된다면.”
두 사람의 꽁냥거리는 대화를 듣던 파비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성녀에 이어 이젠 솔론 남작과 크레아까지 염장질이다.
둘의 대화에 끼지 못한 그는 슬금슬금 뒤로 처졌다.
얼마 안 가 파비안은 뒤따라오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성기사 틈에 섞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입이 무거운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성기사는 아무런 말도 없었고, 파비안은 다시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세 번째는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성녀였다.
파비안의 걸음은 더 느려졌고 마침내 가장 후미에 있던 타인록과 만났다.
하지만 타인록의 입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성기사보다 무거웠다.
반나절을 함께 걸었지만 그는 파비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침묵을 견디다 못한 파비안이 먼저 물었다.
“타인록 씨도 영기를 수련했겠죠?”
“그렇소.”
“타인록 씨의 영기도 보통이 아닌 것 같던데, 무슨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타인록이 파비안을 힐끔 쳐다보았다.
비법이라면 오히려 자신이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묻고 싶은 것이었다.
“어릴 때 너클스 산맥에서 뜨거운 사과를 먹고 며칠 앓아누운 적이 있소. 그 뒤로 다시 그런 사과를 본 적이 없소. 부락 어른들께 물어봤지만 모두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하셨소. 내 영기가 다른 야인들보다 많은 이유는 어쩌면 그 사과 때문인지도 모르오.”
“왜 사과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불에 굽지도 않았는데 뜨거운 사과를 본 적이 있소?”
“없습니다.”
“그걸 먹고 몸에서 열이 나 사흘 동안이나 끙끙 앓았소. 그 뒤로는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고. 영기도 마찬가지요. 영기를 수련한 시간이 특별히 많지 않았지만 남들보다 두세 배는 많았소.”
“뜨거운 사과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내 인생에서 남들과 달랐던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영기를 늘려 주는 뜨거운 사과라……. 신기하네요.”
“라고아 경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오. 내가 촛불이라면 라고아 경의 영기는 태양이니까. 솔직히 라고아 경이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소.”
파비안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고아 경의 영기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혹시 아시오? 나처럼 뭘 먹었다든지, 아니면 특별한 수련법이 있다든지 하는 것 말이오.”
“그건 직접 라고아 경에게 물어보시죠. 아마 가르쳐 주실 겁니다.”
“클라우드 경은 모르오?”
“짐작 가는 것은 있지만, 주군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파비안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사실 여기까지 알려 준 것도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그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해서다.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모른다고 부인했을 것이다.
타인록도 기사인지라 더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 뒤로 한 시간쯤 지났을까?
노을이 붉게 타오를 즈음, 선두의 솔론 남작과 크레아가 멈춰 섰다.
솔론 남작은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숲길에서 조금 벗어난 공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야영지로 적당해 보여서요. 크레아가 대수림에서 저런 자리도 드물다고 하더군요.”
주위를 둘러보던 엘리오 일행은 숲길을 벗어나 공터로 들어갔다.
누군가 야영지로 사용했던 듯 곳곳에 불을 피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결국 엘리오 일행도 그곳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하룻밤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엘리오 일행과 성녀만 남의 일인 양 한가하게 앉아 있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잠자리를 고민하던 솔론 남작은 파비안을 살짝 불러냈다.
“라고아 님의 잠자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나 말고 라고아 경의 잠자리를 만들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누굽니까? 혹시 성기사님입니까?”
솔론 남작이 기대 어린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성녀와 라고아 백작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아뇨. 라고아 경의 잠자리는 라고아 경께서 준비하실 겁니다.”
“라고아 경이요? 백작 각하께서 직접 그런 일을 하신다고요?”
솔론 남작이 황당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남부 왕국의 백작들도 제 손으로 뭐 하나 하는 게 없는데, 제국 백작이 잠자리를 만든다니?
“내 말 믿고 기다리십쇼. 나와 오마르 경이 놀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왜 준비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잠자리도 라고아 경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말하다 말고 파비안은 솔론 남작을 힐끔 보았다.
솔론 남작 일행과 역마차를 타고 올 때 몇 번 노숙을 한 적이 있지만, 엘리오 라고아 백작은 남들 앞에서 아공간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성녀 일행과 솔론 남작 일행 모두 잠시 스쳐 지나갈 인연이 아니었다.
성녀는 말할 것도 없고, 마검사인 솔론 남작과 야인 출신인 타인록은 ―본인들은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눈에 든 사람들이다.
그들 앞에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아공간 마법을 감출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성녀와 웃고 떠들던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돌연 허공에서 천막과 침상을 꺼냈다.
천막이 있다고 잠자리가 완성되는 건 아니다.
파비안은 멍하니 서 있는 솔론 남작의 어깨를 툭 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자, 천막이나 치러 갑시다.”
“저, 저건, 아공간 마법입니까?”
“라고아 경이 마검사라는 거 알면서 새삼스럽게 뭘 물어요?”
“…….”
솔론 남작이 황망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마검사라고 해도 대부분이 4서클 미만의 마법을 사용할 뿐이다.
마법은 검술만큼이나, 아니 어떤 점에서는 검술보다 더 어렵다.
마검사가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아공간 마법은 고위 마법사들의 비술로 4서클 이하의 마법사들은 주문을 알지도 못한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그랜드 마스터라는 건 알았지만 마법 경지마저도 높을 줄이야!
엘리오가 마하담에서 꺼낸 천막은 두 개였다.
파비안과 솔론 남작은 부지런히 천막을 치고, 안에다 침상을 들여다 놓았다.
엘리오와 성녀는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천막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나머지 하나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 그리고 성기사가 쓰기로 했다.
솔론 남작 일행은 두 개의 천막 사이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잠자리라고 해 봐야 평평한 바닥에 나뭇잎을 까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나뭇잎 위에 비스듬히 누워 검은 숲을 보던 솔론 남작이 크레아에게 물었다.
“대수림의 밤이 원래 이렇게 조용한가? 아카데미에서 배우기로는 야수들이 미쳐 날뛴다던데.”
“이렇게 조용한 밤은 처음이에요.”
그러자 타인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시카의 잊혀진 신전을 보는 것 같군.”
솔론 남작과 크레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이 기묘한 평화는 이시카의 잊혀진 신전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