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06
1406회. 월아는 뭐래?
다음 날 오전.
연적하는 남궁연의 권유에 따라 남궁세가를 방문했다.
검왕의 은퇴로 위축됐던 남궁세가 사람들은 그의 연이은 방문을 환영했다.
남천 연적하를 은월각까지 안내하고 돌아서는 총관 유정유검 남궁산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연적하가 이전처럼 남궁세가에 드나들어야 무림세가들이 나대지 못할 텐데.’
지금은 호랑이가 사라진 산에 여우들이 왕 노릇 하느라 바쁘니 애석할 뿐이다.
연적하가 섬돌에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가자 방문이 드르륵 열렸다.
“왔느냐?”
남궁벽의 음성은 탁하고 힘이 없었다.
연적하는 왜 남궁연이 ‘더 늙으시기 전에 찾아봬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핏기 없는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은 도저히 검왕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애써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제는 형님과의 대화가 길어져 미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됐다. 그래도 새 가주와 시간을 보냈다니 오히려 고맙구나. 새 가주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이라도 자주 들여다봐다오.”
“…….”
연적하는 답하지 않았다.
남궁세가에 드나들면 분명 남맹이 들썩거릴 텐데 그러고 싶지 않아서다.
이제야 겨우 남맹의 관심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남맹의 늪에 빠질 수는 없었다.
남궁벽은 기다려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내 욕심이 과했구나. 조금 전의 내 부탁은 신경 쓰지 말아라. 그만한 풍파도 헤쳐 나가지 못한다면 남궁가의 사내도 아니지.”
“형님은 잘 해내실 겁니다.”
연적하의 표정과 음성은 담담했다.
새 가주 남궁천이 남맹에서 견제를 받겠지만 단지 그뿐이다.
남궁세가의 힘은 여전히 강하고, 또 한 다리 건너 자신이 있다.
남궁천의 정치력이 약한 것과 별개로 그가 위험에 빠질 일은 없었다.
다 내려놓은 얼굴로 연적하를 보던 남궁벽이 말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예.”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느냐?”
“예?”
연적하는 예기치 못한 질문에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네가 상계를 두 번이나 다녀왔다니 묻는 소리다. 죽으면 악인은 지옥으로 가고, 선인은 천궁으로 가고 그러는 것이냐? 부처에게 귀의하거나, 우화등선하면 상계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느냐?”
여느 노인들처럼 칙칙하던 남궁벽의 눈동자가 한순간 뜨겁게 타올랐다.
연적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지옥? 천궁? 상계?
지옥과 천궁은 가 보지 않았지만, 염마왕과 마물이 된 인간은 봤다.
상계는 두 곳이나 가 봤다.
과거라면 자신도 ‘모른다’고 답했겠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안다.
지옥과 천궁, 상계란 결국 다른 차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불교의 삼십육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과 비슷한 삶이다.
“장인어른.”
“말하게.”
“제가 지옥과 천궁은 가 보질 못했습니다. 하지만 상계를 다니다 보니 깨달아지는 게 있더군요.”
남궁벽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묵묵히 듣기만 했다.
“불가의 삼십육천도, 상계도, 다른 차원의 세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우화등선해서 갈 수 있다는 상계를 두 곳이나 가 봤습니다만……. 그곳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이 이 세상과 그닥 다를 게 없었습니다.”
“모두가 같더라는 말이냐?”
“다른 게 있다면…… 시간의 흐름 정도였습니다. 누군가는 천 년, 만 년, 혹은 영원히 죽지 않고 신이라 불리기도 했으니까요.”
“불사(不死)…… 신(神). 그래 내가 알고 싶은 게 그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바람이 아니더냐? 그 모든 게 불가나 도가의 관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더란 말이지?”
“실재하기는 합니다만…… 지금 인간의 삶과 다른 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계든 상계든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똑같았습니다.”
천 년 만 년을 살아도,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연적하의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남궁벽은 달랐다.
“영원히 죽지 않고, 신이 되는 것보다 중한 게 뭐가 있다고?”
“장인어른.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주어진 시간이 다를 뿐입니다. 상계로 갔다고 해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히 투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싸우고, 미워하고, 헐뜯고, 빼앗는…… 그런 삶 말입니다.”
“너는 아직 젊어서 인생의 무상함을 모르니 그렇게 말하겠지만……. 불사야말로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락이니라.”
“사람의 변하지 않는 본성을 생각하면 영겁(永劫)은 복락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습니다.”
“그거야 앞날이 창창한 젊은 사람들의 치기 어린 말이고. 나 정도로 나이를 먹게 되면, 누구라도 불사에 연연하게 될 것이다.”
“심 노인의 나이도 많지만…… 그는 불사를 꿈꾸지 않습니다.”
“흐음.”
갑자기 남궁벽이 헛기침을 흘렸다.
정파의 대협객인 자신과 녹림 도적인 심통을 비교하니 불편한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연적하가 물었다.
“그래서 장인어른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상계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느냐?”
“그걸 원하신다면 불가나 도가에 귀의하면 되지 않습니까?”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내가…… 이제 귀의해 어느 세월에 득도를 하라고. 네가 자유로이 상계를 드나들기에 묻는 것이다. 과거 유명교주는 심통을 ‘왕들의 하늘’로 보내 준 적이 있지 않느냐? 너는 어떠하냐?”
“유명교주는 염마왕의 힘으로 그게 가능했습니다만…… 저는 불가능합니다. 저조차도 창조신의 도움 없이는 상계로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장인 어르신의 몸 상태로는 어느 상계를 가도……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내 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 못한다는 말이구나.”
“예.”
“이럴 때는 유명교주가 죽은 게 아쉽구나. 허허.”
“…….”
가슴이 답답해진 연적하는 암암리에 날숨을 길게 내뱉었다.
유명교주의 죽음을 아쉬워하다니.
아버지도, 장인어른도 왜 제 몸 생각밖에 안 하는지 모르겠다.
허탈하게 웃던 남궁벽이 문득 말했다.
“궁금한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육 년 전, 그러니까 두 번째 상계로 가기 전에 너는 남맹을 도울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남맹의 무림대회에 참석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 뒤로 갑자기 태도를 바꿔 발길을 끊었다. 왜냐? 무엇이 너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느냐?”
“무림대회 전날, 심통이 총사 하나를 두드려 팼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로 황룡방을 없앴는데 모를 리가 있나.
“심 노인에게 사과하라고 시켰다는 말에 화가 나서 따지러 갔다가…… 장인어른과 대총사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남궁벽의 입에서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고작 있으나 마나 한 황룡방 하나 때문에 연적하를 잃었다니 기가 막혔다.
“며칠 뒤 제가 남궁세가의 의협심을 의심하는 듯 말했더니…… 장인어른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나와 대총사는 단순히 너의 변덕으로 생각했었다. 이십 대의 마음은 갈대와 같으니까.”
“장인어른과 달리 누님은 ‘나무가 모여 숲이 된다’고 하더군요. 저도 누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날 이후 장인어른과 남맹을 멀리하게 됐습니다.”
“황룡방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잠시 침묵하던 연적하가 말했다.
“저도 나무만 보는 건 아닙니다. 장인어른께서 누님의 일로 화가 나서 황룡방을 없앴다면…… 남맹에 남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장인어른과 대총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남맹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저에게는 누님과 지안이가 전부입니다. 장인어른도 가족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한 날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한참을 굳어 있던 남궁벽이 웅얼거리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연이의 아비로 부끄러우면서 고맙구나. 부디 그 마음 변치 말거라.”
이윽고 남궁벽은 지친 얼굴로 그만 가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연적하는 그런 남궁벽에게 꾸벅 인사를 올린 뒤 밖으로 나갔다.
남궁벽과 만났음에도 마음은 여전히 개운치 않았다.
마치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것 같은 느낌이다.
노인의 생각은 바꾸기 어렵다더니 끝까지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연적하가 마당에 내려서자 총관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새 가주가 안채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오늘은 장인어른을 만나러 왔습니다. 형님께는 다음에 인사드리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럼 이만.”
연적하는 총관의 대답을 듣지 않고 허공으로 도약해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남궁산호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쩝, 천이도 좀 만나고 가 주면 좋았을 텐데. 맺고 끊는 게 칼 같구나.”
자신이 연적하라면 천하를 호령할 텐데, 왜 저렇게 무림과 담쌓고 살려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그는 안채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
여강현 석경장.
정오 무렵.
대문 안으로 들어선 연적하를 향해 심통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다가갔다.
집안 분위기도 조금 어수선해 보이고, 이상함을 느낀 연적하가 심통에게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하아! 진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뭔데? 또 이상한 놈한테 사기라도 당했어?”
“비슷합니다.”
“비슷해? 어떤 놈이야?”
과거 심통과 함께 사기를 당한 바 있던 연적하의 숨이 거칠어졌다.
“조양상방의 행수 하나가 매파를 보냈습니다. 월아와 자기 아들을 혼인시켰으면 한다나요?”
“응? 매파? 사기라며?”
“월아가 어떤 놈팽이에게 걸려든 것 같습니다. 사기가 분명합니다.”
“잠깐만, 그러니까 월아가 어떤 남자와 사귀는데, 그 남자의 집안에서 매파를 보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월아는 뭐래?”
“지금 월아의 말이 중요합니까? 사기꾼이 틀림없다니까요!”
심통은 핏대를 올리며 사기꾼 타령을 했다.
“아 진짜. 헛소리 말고 월아와 어떻게 만났는지나 말해 봐.”
“일 년쯤 전 그놈이 도적에게 털리고 있을 때 지나가던 월아가 구해 주었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 만나기 시작했다는데……. 그놈이 월아를 노리고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심 노인 같은 줄 알아? 그래서 월아는 그 남자가 마음에 든대?”
“…….”
심통은 입을 삐쭉이 내밀고 대답하지 않았다.
“월아가 좋아하는 모양이네.”
“아직 어려서 허우대만 멀쩡하면 다 좋은 줄 아는 겁니다. 그 쌍놈의 새끼를 내가…….”
“뭐? 다리라도 분지르게?”
“못 할 것도 없지요. 분근착골로다가…… 아니, 장주님이 언법(言法)으로 좀 확인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린 월아가 뭘 알겠습니까?”
“어리긴 벌써 스무 살이구만. 심 노인이야말로 자기가 키운 제자의 안목을 그렇게 못 믿겠어? 내가 남자에게 언법을 사용하면, 그쪽 집안에서 퍽도 좋아하겠다.”
“모르게 하면 되잖습니까!”
“당한 사람이 알잖아.”
“그건 입단속을…….”
“퍽도. 세상에 비밀은 없어. 나중에라도 남자 집안에서 알게 되면 월아만 힘들어져. 집안에 별문제가 없으면 월아의 안목을 믿어 줘.”
“월아를 힘들게 하면 대가리를 싹 다 부숴 버릴 겁니다.”
“아이고! 헛소리 그만하고. 매파는?”
“조금 전에 가모님까지 만나고 돌아갔습니다.”
“누님이 뭐래?”
“괜찮은 집안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님까지 그렇게 말했는데 뭐가 걱정이야?”
“제가 가모님의 능력은 인정하는데, 남자를 보는 여자의 안목을 믿지 않습니다. 여자는 기본적으로 남자를 볼 줄 모릅니다.”
“아이고! 헛소리 말고 혼례 준비나 해.”
연적하가 눈을 부라리자 심통은 억울한 얼굴로 돌아갔다.
문득 연적하는 날짜를 세어 보았다.
상계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오 년.
심통의 남은 수명이 이 년임을 생각하면 늦장 부릴 여유가 없었다.
‘그나저나 세월 참 빠르네. 꼬맹이 월아에게 매파가 다 찾아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