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05
1405회. 세월유수(歲月流水)
퍼퍼퍼펑―!
또다시 폭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폭죽과 사람들 환호에 연적하와 심통의 대화도 자연히 멈추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가라앉자 심통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장주님 나이도 서른이네요. 그런데 아직도 이십 대로 보이십니다?”
“심 노인도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젊어 보여.”
“그야 반로환동을 했으니까요.”
연적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심통의 까만 머리를 보았다.
심통은 반로환동이라고 좋아하지만 연적하는 알고 있었다.
그의 수명이 오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네 번째 하늘’에서 루나 마일러스로 육화(肉化)한 남궁연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네가 떠나고 칠 년 후에 두 분 다 노환으로 돌아가셨어. 심 노인이 죽고, 이튿날 당 노인이.”
“오늘내일하더니 칠 년이나 더 살았군요.”
“그래도 월아와 금아가 혼인하는 걸 보고 돌아가셨으니까 다행이지.”
“월아와 금아는 잘 살아요?”
“그럼. 명절마다 가족들을 데리고 인사를 왔어. 월아가 아들을, 금아가 딸을 낳았지.”
거기까지 생각한 연적하가 문득 심통에게 물었다.
“월아와 금아가 지금 몇 살이지?”
“열일곱입니다.”
“이제 슬슬 짝을 찾아볼 때가 됐네?”
“어이쿠! 무슨 말씀을. 아직 애기들입니다.”
심통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애기는 우리 지안이가 애기고. 월아와 금아는 다 컸어. 심 노인이 평생 데리고 살 거야?”
“그럴 리가요. 좀 더 크면 짝지어 보내야죠.”
“뭐, 알아서 잘하겠지.”
연적하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심통이 월아와 금아가 시집가는 걸 봤다니 털어 버린 것이다.
그때 당운망이 어슬렁어슬렁 마당을 가로질러 왔다.
“장주님, 점심 식사 하러 가셔야죠?”
연적하와 심통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당운망과 함께 안채로 향했다.
***
해가 바뀌었음에도 남맹과 호천맹의 영역 다툼은 여전했다.
남직례성에서 대륙으로 약진하려는 남맹을 호천맹이 틀어막는 형국이었다.
다만 과거와 달리 양측이 격돌해도 대규모 살육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호천맹도 남맹도 열세에 몰리면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났다.
본래 호천맹과 남맹은 같은 뿌리를 가졌던 바, 승자는 패자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호천맹의 고육지책이 열매를 맺은 걸까?
언제부터인가 남맹은 연적하를 찾지 않았다.
삼 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남맹에서는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무림대회를 통해 선발된 신진 고수들이 요직을 차지한 때문이다.
호천맹의 고육지책은 남맹의 분위기에도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무림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남맹이 한 개인에게 연연하면 안 된다!
―남맹의 주인은 지금까지 피 흘리며 싸워 온 남맹 무인들이다!
―남맹은 왜 남맹에 무관심한 남천 대협에게 목을 매는가?
―석경장은 남맹이 아니다. 남천 대협도 단지 맹주의 사위일 뿐, 남맹과 무관하다.
―남맹의 부흥은 남맹 무인의 손에 달려 있다.
―지금은 석경장도 외세일 뿐이다.
사실상 남맹의 신진 고수들에게 연적하는 계륵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들이 ‘남궁세가가 남맹의 주도권을 독식하기 위해 쓰지도 못할 패인 연적하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떠들어 댔다.
남맹의 주축인 무림 세가들은 남궁세가를 견제하기 위해 신진 고수들의 주장을 ‘개념 있는 소리’라며 여기저기 퍼 날랐다.
언제부터인가 남맹에서 남천 연적하의 이름은 금기가 되다시피했다.
가을이 되자 ‘연적하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주장은 개념이 없거나, 자존심이 없거나, 남궁세가에 굴종하는 행위로 인식됐다.
남맹에 대한 연적하의 냉정한 태도도 한몫했다.
연적하는 남맹과 관계된 곳은 아예 가지 않았다.
처가인 남궁세가에도 발길을 끊었다.
본래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도 있지만, 남궁벽에 대한 극도의 실망감 때문이다.
만약 그가 ‘어차피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더라’는 깨달음이 없었다면, 남맹에 도움은커녕 오히려 부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대신, 남궁세가를 멀리했다.
남맹 맹주인 검왕 남궁벽은 사위와의 관계가 묘하게 틀어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남맹과 호천맹은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부닥쳤다.
매일 저녁 늦게까지 총사부의 보고를 받았고, 대책을 지시했다.
안중에도 없던 심통에게 패한 뒤로 석경장을 방문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결과에 승복이야 하겠지만 석경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맹과 연적하는 공적, 사적으로 멀어져 갔다.
언제부터인가 석경장은 강호에서 외딴섬처럼 고립됐다.
***
세월은 물처럼 흘렀다.
남맹이 대륙 진출을 선언하고 호천맹과 싸운 지도 어언 오 년째.
남맹과 호천맹의 싸움은 격랑기를 거쳐 차츰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무림은 검왕 남궁벽의 바람대로 남맹과 호천맹이 양분했다.
아쉽게도 대략 남맹이 삼 할, 호천맹이 칠 할이다.
수천 년간 내려온 칠파이문의 전통으로 그 이상은 무리였다.
더 욕심낼 수도 있지만 남맹은 그쯤에서 세력 확장을 멈추었다.
검왕 남궁벽이 ―심통과의 설욕전을 위해― 무리하게 수련하다가 그만 주화입마에 빠지고 만 때문이다.
고희(古稀, 70세)를 앞둔 남궁벽에게 주화입마는 치명적이었다.
남맹에서 명의를 동원해 가까스로 치료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내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남궁벽은 급속도로 노화했다.
검왕 남궁벽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남궁벽의 뒤를 이어 장자인 남궁천이 남궁세가의 가주가 되었다.
청운검이던 별호는 ―와부호에서 입은 중상을 치료하는 와중에― 잊혀졌고, 가주가 되면서 남궁천에게는 창천검의 별호가 새로이 생겼다.
남궁천이 가주직을 승계받던 날 연적하 일가는 남궁세가를 방문했다.
남궁세가 안채.
“축하드립니다, 형님.”
“하아! 이게 축하받아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연적하의 인사에 남궁천이 쓰게 웃으며 화답했다.
검왕은 남맹의 중심뿐 아니라 남궁세가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런 검왕이 주화입마로 은퇴했으니 남궁세가는 내리막길을 갈 일만 남았다.
“형님도 벌써 마흔다섯이 아닙니까? 이젠 가주가 되실 때도 됐죠.”
그 말에는 남궁천도 별말 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마흔다섯이면 가주가 되고도 남을 나이였다.
가만히 듣던 남궁연이 물었다.
“아버지는요?”
“은월각에서 한 발도 밖으로 나오지 않으신다.”
은월각은 남궁벽의 처 장하은이 종종 사용하던 전각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남궁연이 조용히 일어섰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남자에게 말했다.
“지안이와 함께 아버지를 뵙고 올게요.”
“어, 그래라. 아버지가 좋아하실 게다.”
오라비의 말에 남궁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부친이 좋아할지 아닐지 그녀의 머리로도 감히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가족이니 이럴 때는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녀는 어린 딸을 앞세우고 안채를 나섰다.
여동생과 조카가 밖으로 나가자 남궁천이 슬쩍 물었다.
“아우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놀고먹습니다.”
“쯧! 천하의 남천 대협이 놀고먹는다니……. 이제 그만 세상일에 관심도 좀 가지고 그래야지.”
“남맹에 오라는 겁니까?”
“뭐,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고. 아우의 재주가 너무 아까워서 그래.”
새로이 가주가 된 남궁천은 남맹에서 든든한 뒷배가 필요했다.
“안 갑니다. 제가 남맹에 가면 또 피바람이 불 겁니다.”
연적하의 단호한 거절에 남궁천은 입맛만 다셨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그런데 아우가 다른 세상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말이야. 그때는 남맹의 행사에도 참석하고 그러지 않았어? 아버지를 도울 것이라는 말도 돌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발길을 끊은 거야?”
“형님.”
“응?”
“청명절의 무림대회 때 황룡방이 실종됐잖습니까. 그 일로 남맹이 복수를 하겠다고 절강성에 쳐들어가기도 했고요.”
“그랬지. 그것과 관계가 있어? 설마 아우가 황룡방을…….”
남궁천이 놀란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부친의 강요로 그가 황룡방을 없앴고, 그에 대한 후회로 남맹과 거리를 두었다 생각한 것이다.
“아뇨. 장인어른과 대총사가 한 짓입니다. 저는 우연히 그걸 알게 되었고요. 그 뒤로 남맹과 거리를 두었던 겁니다. 남맹의 행동이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뭐, 녹림 출신인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아버지와 모용 대협이?”
남궁천은 흠칫했지만 이내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무림인들의 이권다툼에 절대 낄 마음이 없습니다. 상대가 장인어른만 아니었으면 다 때려 엎었을 겁니다. 모르는 척하고 거리를 둔 것만도 많이 참은 거예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과하마. 그때 아버지는 남맹을 확장시키려고 물불 안 가리던 때였다. 황룡방주가 연이에게 한 짓이 있어서 더 그랬을 거다.”
“그랬다면 다행이게요. 장인어른과 대총사 사이에 누님 얘기는 일절 없었습니다. 그냥 앞길에 방해가 될 것 같으니 죽이자는 분위기였어요.”
“공적인 자리라 사적인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신 걸 테지. 내 아버지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분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형님이 이유를 궁금해해서 대답한 것뿐입니다.”
“잘 알겠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남궁천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부친과 모용문의 비밀을 파고들어 봐야 좋을 게 없어서다.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아야죠. 가족도 돌보고, 심 노인과 낚시도 다니고.”
“남맹에서 더 이상 너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게다. 호천맹과의 싸움도 이전 같지 않거든.”
“소문은 들었어요. 남맹이 세력을 더 확장하지 않기로 했다면서요?”
“일단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그래도 방파 간의 분쟁은 끝나지 않을 게다. 네 말대로 이권을 두고 계속 싸울 테지.”
“참, 그런데 요즘 명왕교는 좀 어때요?”
명왕교는 유명교에서 떨어져 나간 세력들이 세운 교단이다.
“몰라. 있는지 없는지 쥐 죽은 듯 조용해.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겠지.”
“그렇군요.”
연적하는 더 묻지 않았다.
‘네 번째 하늘’에서 남궁연이 강호 이야기를 전해 줄 때도 별말이 없었다.
그런 걸 보면 명왕교는 이대로 흐지부지 사라지려는 모양이다.
둘 사이에 대화가 끝날 즈음 남궁연이 딸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연적하는 남궁천에게 작별을 고하고 가족과 함께 남궁세가를 떠났다.
석경장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연적하가 딸에게 물었다.
“지안아, 할아버지 만났어?”
“네, 할머니 닮았다고 안아 주셨어요.”
“그래?”
연적하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동안 한 번도 손녀를 안아 준 적이 없는데 장인도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아빠는 왜 안 왔냐고 하셨어요.”
“나는 큰외삼촌과 이야기를 하느라 못 갔잖아. 아빠는 다음에 만나뵈면 돼. 누님은 괜찮았어요?”
의미심장한 연적하의 물음에 남궁연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부녀 간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야.”
“아, 그런가요?”
연적하가 흐뭇한 눈으로 딸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처는 미우니 고우니 해도 장인의 딸이었다.
자신도 딸과 다투고 화해하며 늙어 가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 지을 때 남궁연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장인과 사위는 그렇지 않으니 더 늙으시기 전에 찾아봬.”
“저는 장인어른하고 안 싸웠어요.”
“네가 싫어한다는 걸 아버지도 아셔.”
연적하는 부정하지 않고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버지도 장인도, 참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