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04
1404회. 눈이 반짝반짝합니다
호천맹으로 돌아간 공손방 총사는 남천 연적하와의 대화를 가감 없이 대총사에게 전달했다.
대총사 공손일랑 공손기는 과거 신기수사 제갈승운만큼이나 지략에 밝은 사람.
그는 대번에 남맹이 연적하를 끌어들이지 못할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남궁연의 예측대로 남맹과의 전쟁에서 천하십대고수들과 전대 고수들을 제외하는 것이었다.
공손기는 총사부에서 만든 세부 지침을 들고 맹주인 무극상인을 찾아갔다.
“맹주님. 남천 대협이 비록 제멋대로이기는 하나 명리를 초탈한 사람입니다. 아니 어쩌면 명리를 초탈해서 제멋대로인지도 모르지요.”
이 말을 할 때 공손기의 표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과거 그에게 무참히 얻어맞은 기억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공사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호천맹과 남맹의 분쟁에 끼어들 마음이 없겠지만, 남맹에서는 어떻게든 그를 끌어들이려 할 겁니다. 남맹의 그런 시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면, 호천맹의 고육지책(苦肉之策) 이 필요합니다.”
“고육지책?”
무극상인이 눈을 찌푸렸다.
고육지책이란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꾸며낸 계책이다.
대체 어느 정도나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남맹과의 전쟁에서 호천맹은 천하십대고수와 전대 고수들을 제외해야 합니다.”
“남맹에는 검왕이 있지 않소?”
검왕 남궁벽은 천하십대고수의 수위에 드는 절대고수다.
그런 검왕을 막으려면 호천맹에도 그에 상응하는 고수가 나서야 했다.
“물론 검왕을 상대로 할 때만큼은 예외입니다. 검왕의 참전이 확실한 전투에는 우리도 천하십대고수를 보내 대응을 하면 됩니다.”
“검왕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겠소?”
“완벽하게 파악하지는 못합니다. 고육지책이라고 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검왕을 놓칠 경우, 호천맹이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마저도 간자를 대거 기용하면, 반걸음 정도 늦어지겠지만,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습니다.”
“흐음.”
무극상인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간자를 이용해 검왕의 동선을 살피고, 호천맹의 천하십대고수로 대응하자는 소리다.
대응이 늦으면 피해를 입을 테니 과연 고육지책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남맹의 맹주가 움직일 만한 상황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 건곤일척의 승부처가 될 만한 곳을 예의 주시한다면……. 반걸음 뒤처지는 일도 줄일 수 있습니다.”
“줄일 수 있다라……. 아예 막을 수는 없겠소?”
무극상인은 미련이 남는 눈치였다.
검왕의 손에 속절없이 쓰러질 호천맹 무인들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아무리 간자를 많이 기용한다 해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습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검왕도 행선지를 꼭꼭 감출 테니까요.”
공손기의 얼굴에 자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고육지책에는 희생이 따른다.
하지만 남천 연적하만 묶어 둘 수 있다면 최후 승자는 호천맹이 될 터였다.
“알겠소. 그런데 전대 고수들은 왜 제외하자는 것이오?”
무극상인은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천하십대고수들이야 전적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전대 고수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전대 고수들 중에는 천하십대고수에 근접한 고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남맹을 항거 불능의 상태로 만들면 그들은 남천 대협에게 읍소를 할 겁니다. 남천 대협 외에 대적할 사람이 없다면…… 남천 대협도 거절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초정절 고수가 아니라, 신진 고수들로 남맹을 몰아붙여야 합니다. 남천 대협 같은 천외천의 고수가 그런 싸움에 낀다면 천하가 남천 대협과 남맹을 비웃지 않겠습니까?”
“아하! 과연.”
무극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왕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그런 싸움에 연적하를 부르지 못할 게 틀림없다.
“알겠소. 총사부가 세운 계획대로 진행하시오. 천하십대고수들과 전대의 기인들께는 따로 협조를 요청하는 게 좋을 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손기는 맹주에게 예를 올리고 집무실을 떠났다.
무극상인은 공손기가 남기고 간 세부 지침서를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 문득 ‘무림 역사상 단 한 사람을 전쟁에서 제외시키기 위해 이렇게까지 애쓴 적이 있었나?’ 곰곰 돌이켜 보았다.
없었다.
똑같은 사람인데 그는 어떻게 그런 경지에 오른 것인지 모르겠다.
“고육지책이라…….”
보면 볼수록 쓴웃음만 난다.
‘한 손이 열 손을 당해 내지 못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혼자서 열 손이 아니라 그 이상도 가능한 고수를 만났다.
그의 인생이 부러우면서 궁금했다.
무슨 생각으로 살며, 모든 걸 다 이룬 삶이 재미가 있는지 말이다.
***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됐다.
무림대회로 부글부글 끓던 강호가 호천맹과 남맹의 전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발단은 절강성이었다.
남맹이 절강성에 지부를 설치했지만, 칠파이문 속가제자들이 세운 절강성 방파 대부분은 호천맹에 가입했다.
남맹이 의지할 곳은 정사지간의 방파들 뿐인데, 그들은 관망세를 보였다.
수뇌부가 실종된 황룡방의 일도 있고 해서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그러던 중 북두검문을 필두로 갑자기 정사지간의 방파들이 남맹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원인은 돈이다.
호천맹 소속 방파들의 힘이 커지자 이권을 두고 그들과 경쟁하던 정사지간 방파들은 자연히 남맹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절강성에 대표적인 칠파이문의 고수가 없던 것도 한몫했다.
정사지간의 방파에 고작해야 고만고만한 칠파이문의 속가제자 출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절강성에서 호천맹과 남맹의 대리전이 벌어졌다.
그것을 대리전이라 한 것은 호천맹과 남맹에서 고수를 파견하지 않아서다.
남맹 지부의 무인이라고 해 봐야 몇 되지도 않았고, 고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도 호천맹과 남맹의 이름으로 벌인 제대로 된 싸움이라 강호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 틈에 남맹은 산동성, 호광성, 하남성의 옛 남맹 방파를 차례로 되찾았다.
본래 절강성, 산동성, 호광성, 하남성에는 남맹에 가입한 백다섯 개 방파들이 있었다.
과거 연적하에 의해 마지못해 포기했던 방파들을 모두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하남성은 대륙의 중심이자 칠파이문의 앞마당과도 같은 곳.
곧바로 칠파이문 본진과 남맹이 격돌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칠파이문은 필승의 패인 천하십대고수나 전대 고수들을 동원하지 않았고, 신진 고수들과 후기지수들로만 싸움을 이끌었다.
그 바람에 어찌 보면 지지부진한 싸움이 계속됐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남성에서 싸우는데 천하십대고수들이 관여하지 않는다?
호천맹의 그런 기이한 행보는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조금씩 세상에 알려졌다.
***
남직례성.
합비.
여강현 석경장.
새해 첫날 폭설이 내렸다.
연적하는 대청 마루에서 심통, 당운망과 차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마당에서는 연지안과 월아, 금아가 깔깔거리며 눈놀이를 했다.
아침에 시작된 눈놀이는 정오가 되도록 멈출 줄을 몰랐다.
차를 마신 당운망은 약제당으로 돌아가고, 연적하와 심통만 대청 마루에 남았다.
연적하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지치나? 어떻게 아직까지 눈놀이를 할 수 있지?”
“그러게 말입니다. 저러다 아기씨가 몸살이 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심 노인이 월아와 금아에게 말해 봐. 방으로 데리고 가서 놀으라고. 보기만 해도 지친다.”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월아와 금아가 걱정되던 심통은 즉시 월아에게 전음을 보냈다.
잠시 후 월아와 금아가 연지안을 꼬드겨 안채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들이 사라지자 마당은 금방 무덤처럼 고요해졌다.
연적하가 차갑게 식은 찻주전자를 손바닥으로 감싸 안았다.
즉시 찻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흘러나왔다.
그가 빈 잔에 찻물을 붓자, 심통이 슬며시 자신의 찻잔을 내밀었다.
연적하가 심통의 잔에 찻물을 따르며 말했다.
“심 노인, 식탐 좀 버려. 조금 전에 오줌이 마렵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차 한잔 더 마시는 게 식탐입니까? 그렇게 말하면 장주님도 식탐입니다.”
“오줌보가 감당 못 하게 마시면 식탐이야. 나는 아직 괜찮아.”
“늙으면 자주 오줌 마렵고 그런 겁니다.”
“식탐이야.”
“그런 거 아니래도요!”
다 늙어 식탐 소리가 귀에 거슬린 심통이 소리를 빽 내질렀다.
“소리 지르는 걸 보니 정곡을 찌른 모양이네.”
“예, 예. 식탐 맞습니다. 오늘 그 주전자 찻물 제가 다 마실 겁니다.”
“쯧쯧! 월아와 금아의 입에 들어갈 것도 뺏어 먹는 건 아니겠지?”
“제가 못 먹을지언정 애들은 챙겨 줍니다.”
“이젠 치매까지 와? 심 노인이 석경장에서 못 먹긴 뭘 못 먹는다고 그래? 설마 어디 돌아다니면서 남들에게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지?”
“예를 들어 그렇다는 거지요. 그나저나 남맹은 요즘 뜸하네요?”
심통은 연적하가 또 치매 운운할까 봐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남맹은 지난해 여름에는 뻔질나게 드나들더니 가을부터 발길이 뚝 끊겼다.
그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크게 밀리지도 않고, 크게 이기지도 않잖아.”
“그런 거 보면 호천맹 총사들도 아주 맹탕은 아닌 모양입니다?”
“누님이 그럴 거라고 말했었거든. 머리 쓰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게 비슷비슷한 것 같아.”
“십전무후 님의 예측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지요. 그런데 눈이 참 지랄맞게 오네요?”
심통의 말에 연적하는 고개를 돌렸다.
쏟아져 내리는 하얀 눈송이들에 마당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그러게.”
연적하는 문득 로디나 대륙 북부 히르헤라를 떠올렸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그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던 거대한 빙벽.
그리고 광포화되어 펄펄 날뛰던 마수와 마물 들.
‘펑! 펑!’ 하는 마력포 소리에 놀란 연적하가 눈을 크게 치떴다.
“뭐야? 이 소리는?”
“뭐긴요. 폭죽 터뜨리는 소리지요.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 난 또. 네 번째 하늘에서 마력포 쏘는 소리가 딱 저랬거든.”
“그렇다고 놀라십니까? 반신이나 되시는 분이.”
“몰라서 그러는데 거기서는 육화(肉化)한 신조차도 마력총에 맞아 죽을 수 있어.”
“굉장하네요? 그런 거 하나 가져오시지 뭐하셨습니까?”
“가져와서 뭐 하게?”
“가지고 있으면 다 쓸모가 있습니다. 개똥도 약에 쓸데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쯧쯧! 그 나이에 욕심은.”
“그게 제 물건도 아닌데 왜 욕심이라고 하십니까?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뭘?”
“장주님 말입니다. 네 번째 하늘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이 반짝반짝합니다.”
“내가?”
“예, 장주님이 지금 자기 얼굴을 못 봐서 그러지 생기가 돈다니까요.”
“나 원래 생기발랄한 사람이야.”
“에이, 그런 말씀 마십쇼. 요즘 계속 축 늘어져 계셨습니다.”
“그건 남맹이…….”
“남맹은 발 끊은 지 몇 달이나 됐습니다. 지난 가을에 오고 아직 안 왔습니다.”
“그래?”
“그렇다니까요. 제가 언제 없는 소리 한 적이 있습니까?”
“흠.”
연적하는 심통의 집요한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요즘 좀 무료했던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 할 일이 없었다.
석경장은 남궁연이 관리하고 있고, 연지안은 무럭무럭 잘 자랐다.
인맥이 짧은 탓에 석경장을 찾아오는 손님도 따로 없다.
외부인은 어쩌다 방문하는 남궁천이 전부였다.
그나마 딸과 월아, 금아가 웃고 떠들지 않았다면 사람 사는 집 같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 심통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곳에서 참한 여자라도 사귀셨습니까?”
“헉! 심 노인 미쳤어? 누굴 잡으려고 그런 헛소리를 해?”
연적하가 펄쩍 뛰었지만 심통은 좀처럼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다 이해합니다.”
“이해하긴 뭘 이해한다고 그래? 괜히 생사람 잡지 마. 진짜 그런 거 아니니까.”
연적하는 가슴을 열어 보여 주고 싶었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대로 생각한다더니 지금 심통이 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