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54
1454회. 너도 기사라면
골란 부관과 1소대 기수 듀크도 전시에 하극상이 즉결 처분 대상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란 듯 애슐리 넬슨 중대장을 농락한 것은 코튼 베르나르도 자작이라는 든든한 배후를 믿어서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대가 애슐리 넬슨 남작에 한해서다.
넬슨 남작의 뒤에 엘리오 라고아 사령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아 백작과 넬슨 남작의 친밀한 대화를 듣고 있던 두 사람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그때 라고아 사령관이 그들을 보며 끔찍한 소리를 했다.
“어이, 기사님들. 전시의 하극상은 즉결 처분이야. 그 정도는 알고 까분 거지?”
순간 두 기사는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개처럼 엎드린 그들은 설원에 머리를 처박으며 소리쳤다.
“사령관님! 용서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라고아 백작은 왕국 백작은 물론 제국 후작에게까지도 가차 없이 손을 쓰기로 유명하다.
하물며 하극상을 범한 기사 따위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리라.
엘리오가 두 기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잘못한 건 알고?”
“예! 용서해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넬슨 남작은 머쓱한 얼굴로 외면했지만 엘리오는 집요했다.
“뭘 잘못했는데?”
순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중대장님의 지시를…….”
“블라비코 남작이…….”
진전 없는 대화에 슬슬 지겨워진 엘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중대장님이 잘못했다는 거야? 블라비코 남작이 잘못했다는 거야?”
이건 순전히 말장난에 불과한 소리였다.
그런데 듣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혼자만 살겠다고 1소대 기수 듀크가 먼저 운을 뗐다.
“블라비코 남작이 중대장님의 지시를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뜨악한 얼굴로 듀크를 보던 골란 부관이 서둘러 소리쳤다.
“저, 저도 블라비코 남작에게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귀관에게도 블라비코가 넬슨 남작의 지시에 따르지 말라고 했나?”
“그, 그렇습니다. 기사의 자존심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하극상으로 기사의 자존심을 지키라고? 정말 그런 미친 소리를 했단 말인가?”
“예…….”
“귀관은 그 미친 명령에 생각 없이 따랐고?”
“그게…… 넬슨 남작이 후작 각하의 잠자리 파트너라서 중대장에 임명된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 중대장 밑에 있으면 다 죽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미친놈들이 생각보다 많군.”
중얼거리던 엘리오가 가까운 곳에 있는 기사를 불렀다.
“너, 이름이 뭔가?”
“예! 사령관님! 바실리입니다!”
“바실리, 기사인가?”
“예! 3소대 기수입니다!”
“그렇군. 바실리! 가서 블라비코 남작이라는 놈을 불러와라. 당장 튀어 오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 죄로 참수한다고 전해.”
“명을 받들겠습니다!”
군례를 올린 바실리는 바람처럼 안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바실리는 사십 대 기사와 함께 돌아왔다.
군수과장 자밀 블라비코 남작이 바짝 언 얼굴로 외쳤다.
“자밀 블라비코 남작, 사령관님 부르심 받고 왔습니다!”
“블라비코.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실망이야. 기사들에게 벨라토스 중대장에 대한 험담을 하고, 심지어 하극상까지 부추겼다지? 왜 그랬나? 넬슨 남작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나?”
“헉! 오해가 있나 봅니다.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블라비코 남작은 완강히 부인했다.
죄도 죄지만 사령관이 나열한 죄목을 듣고 있으려니 수치스러워서 차마 시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관과 기수는 분명히 귀관의 지시라고 했다. 그렇지?”
라고아 사령관이 골란 부관과 기수 듀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마력총에라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큰 소리로 답했다.
“맞습니다! 블라비코 남작이 그러라고 했습니다!”
“블라비코 남작님! 뭐라고 말씀 좀 해 주십쇼! 남작님이 중대장님 지시에 따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중대장님 같은 사람은 제 발로 나가게 만들어야 한다면서요!”
그러자 블라비코 남작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느냐! 생사람 잡지 마라! 내가 너희 고충을 들어 준 적은 있지만, 지시를 내린 적은 없다! 너희가 내 부대원들도 아닌데 왜 내가 너희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단 말이냐! 사령관님! 이건 모함입니다! 군수품 배급에 앙심을 품은 자가 저들을 사주해 저를 모함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엘리오가 귀찮은 표정으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경우 조사로 시간을 질질 끌곤 하지. 그러다 당사자들이 전사하면 흐지부지 넘어가기도 하고 말이야.”
부관과 기수, 블라비코 남작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라고아 백작의 입에 주목했다.
엘리오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가자 블라비코 남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데 말야. 내가 마검사거든. 제국에서도 여러 번 정신 마법을 사용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어. 정신 마법을 쓰면 후유증으로 백치가 될 수도 있다지만 어쩌겠어. 어차피 죽어 마땅한 놈 찾는 일인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안 그래?”
사실 엘리오의 언법(言法)은 정신 마법과 달리 후유증이 없다.
하지만 고약하게도 그는 그런 것까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순간 화들짝 놀란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가장 먼저 폭발한 것은 골란 부관이다.
“남작님! 뭐 합니까!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고요!”
1소대 기수 듀크도 이에 질세라 한마디 보탰다.
“우리를 죽일 작정입니까! 남작님이 모두 시켰잖습니까!”
“…….”
정신 마법 얘기가 나오자 블라비코 남작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라고아 사령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곧 자신의 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까닭이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정신 마법의 후유증에 대한 공포였다.
사람들은 마법사를 두려워했다.
그들이 각종 정신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해서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미친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정신 마법의 부작용이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들의 정신 마법을 법으로 강하게 규제하고 있다.
하지만 전시에, 그것도 사령관이 하겠다는데 누가 말릴까.
엘리오는 블라비코 남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세 사람의 분위기만 봐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그였다.
극심한 갈등에 빠진 블라비코 남작에게 엘리오가 한마디 덧붙였다.
“정신 마법은 남작에게 쓸 거야. 왜냐면 남작은 혼자고, 저쪽은 둘이잖아. 한 번만 쓰면 진실을 알 수 있는데 굳이 여러 번 쓸 필요는 없겠지. 어떻게 생각하나? 남작?”
버티던 블라비코 남작은 부관과 기수 옆에 철퍼덕 무릎을 꿇었다.
“사령관님! 용서해 주십쇼!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그러나 넬슨 남작에 대한 악감정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저 두 기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거지?”
“……예.”
“지어낸 말로 넬슨 남작의 험담을 퍼트리고, 부관과 기수에게 항명하라고 했다? 그런데 악감정은 없다? 미친 건가?”
“…….”
“이건 상대를 칼로 푹 찔러 죽이고서, 악감정은 없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남작? 나도 남작에게 악감정은 없다. 그러니 설혹 내 손에 죽게 되더라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저를 죽이실 겁니까?”
궁지에 몰린 블라비코 남작이 독한 눈으로 라고아 사령관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오가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
“못 죽일 것도 없지. 내 손에 죽은 귀족이 한둘인 줄 아나?”
“아니요. 사령관님은 저를 죽이지 못합니다. 죽이면 안 됩니다.”
“왜지?”
블라비코 남작이 당차게 나오자 엘리오는 조금 관심을 보였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왜 저렇게 자신만만한지 알고 싶었다.
“저는 골란이나 듀크처럼 말단에 불과합니다. 제 의지로 한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귀관에게 그런 일을 시킨 사람이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나?”
“맞습니다.”
“하수인은 악독한 일을 해도 죽이면 안 된다는 법이 있던가?”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당황한 블라비코 남작이 말을 더듬었다.
그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군지 알면 죽이지 못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라고아 사령관은 행위 그 자체를 문제 삼을 뿐, 윗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건 설마…… 내 선에서 정리하겠다는 건가?’
라고아 사령관이 그 정도로 정치적일 줄은 몰랐다.
만약 정말 라고아 사령관이 꼬리를 잘라 내는 선에서 끝내려 한다면, 자신은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게 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황급히 소리쳤다.
“나에게 그 일을 시킨 사람은 유니콘 부대의 참모장인 코튼 베르나르도 자작입니다! 코튼 베르나르도 자작은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님을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겁니다!”
블라비코 남작의 입에서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기사들은 급히 병사들을 해산시켰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엘리오는 기사들까지도 물러나게 했다.
설원 위에 엘리오와 넬슨 남작, 그리고 세 명의 죄인만 남았다.
기사들은 멀찍이서 병사들이 사령관 일행의 근처로 가지 못하게 통제했다.
엘리오가 곤혹스러운 눈으로 블라비코 남작을 내려다보았다.
서부군의 90퍼센트는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의 군대였다.
한마디로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은 서부군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무력으로 자신이 서부군 사령관이 됐지만, 작위로는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이 위에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 추악한 음모의 배후라니 기가 막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엘리오가 물었다.
“후작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블라비코 남작이 넬슨 남작의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후작님은 넬슨 남작이 유니콘 부대의 참모로 옮기기를 바라십니다. 후작님이 직접 제안을 했는데 넬슨 남작이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자작님은 넬슨 남작이 벨라토스 중대를 스스로 사임하게 만들라고……. 그래서 부관과 기수에게 하극상을 종용했던 겁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넬슨 남작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벨라토스 중대장보다 유니콘 부대의 참모가 백배 나으니까요.”
엘리오가 애슐리 넬슨 남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자 말이 사실입니까?”
“네, 후작님의 참모가 되라는 제안을 거절했어요. 지금 생각하니 거절하기를 잘한 것 같네요.”
순간 블라비코 남작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넬슨 남작, 객관적으로 봐도 일선 중대장보다는 후작님의 참모가 훨씬 나은데 왜 그런 소리를 하나. 사령관님 앞에서 거짓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객관적요? 블라비코 남작, 당신도 양심이 있으면 똑바로 얘기해요. 후작님이 나를 여자로 생각해서 곁에 두려는 겁니까? 참모로 생각해서 옆에 두려는 겁니까?”
“그걸 그렇게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나? 아름다운 참모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대귀족들의 로망이네. 그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 않나?”
화를 내는 넬슨 남작 앞에서도 블라비코 남작은 자기주장을 꺾지 않았다.
“가증스러운 말장난은 하지 말아요. 나는 군인이지 후작님의 여자가 아니에요. 당신 같은 귀족이 군대를 병들게 하는 거예요!”
“이보게.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왜 그렇게 사방에 이빨을 드러내고 공격적으로 살아가려 하나.”
뻔뻔한 블라비코 남작의 말에 넬슨 남작이 파르르 떨자 엘리오가 나섰다.
“어이, 블라비코 남작. 당신이 한 추잡스러운 짓을 생각해 봐. 당신 같으면 그런 일을 지시한 사람의 참모가 되고 싶겠어? 어? 하아! 나쁜 새끼들은 좋은 말로 하면 꼭 얼굴에 철판을 깔고 상대를 가르치려 한다니까.”
라고아 백작의 눈에 살기가 감돌자 블라비코 남작은 급히 빳빳이 치켜세웠던 고개를 숙였다.
“사령관님! 아시다시피 이 모든 일을 계획한 분은 후작님이십니다! 저는 그저 상관의 지시에 따른 것뿐입니다!”
“너도 기사라면 상관이 기사도에 어긋난 명령을 내리면 불복종도 좀 하고 그래, 이 새끼야! 양심적인 중대장에게 하극상하라는 못된 짓이나 가르치지 말고!”
말과 함께 엘리오가 블라비코 남작을 힘껏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