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58
1458회. 그걸 하지 말라고
‘위대한 마족 군주가 왜 벌레 같은 인간족의 대전사가 되었나?’는 질문에 엘리오가 눈을 찌푸렸다.
자신을 이세계 인간과 동일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을 벌레 취급하니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자연히 엘리오의 대답도 퉁명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문제 있나?”
상상을 초월한 광오 한 말에 아사트라의 군주 파이몬 그라우스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과연! 모쿠바스의 군주다운 소리로군.’
모쿠바스의 군주 손에 죽은 마족 군주가 몰록을 제외하고도 둘이나 된다.
최근 베리스를 죽였으니 셋이지만 그건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에 파이몬 그라우스는 둘로 알고 있었다.
사실 도합 세 명의 군주를 죽인 것도 마족 역사에서 드문 경우였다.
파이몬 그라우스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내가 괜한 질문을 했군.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도록 하지. 마족들은 인간족의 땅을 점령하려 할 것이다. 그대는 모든 마족들과 싸울 생각인가?”
“그야 당연한 소리. 나는 인간족의 대전사로 마족과 싸울 거다.”
“그대는 마족인데 왜 그렇게까지 인간족의 편을 드는가?”
조금 전과는 결이 조금 다른 질문이다.
파이몬 그라우스의 정중한 태도에 엘리오도 더는 막 나가지 않았다.
“나는 인간족을 먹잇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는 마족에 버금간다. 이는 마력총과 마력포만 봐도 알 수 있지. 내 말이 틀렸나?”
“끙!”
파이몬 그라우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지혜가 마족에 버금간다는 말은 딱히 틀린 게 아니었다.
빙벽이 사라지고 다시 찾은 북부의 인간족 군대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그러니 벌레도 아니고, 음식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족은 그에 걸맞은 지위를 누릴 자격이 있다.”
“지혜와 무력만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마나 프트라스의 개다. 마족이 왜 마나 프트라스의 개를 위해 싸운단 말인가?”
“왜냐고? 나는 악신 샤이틴한테 쌀 한 톨도 받은 게 없거든. 내가 어느 쪽을 택하든 내 자유란 말이지.”
그제야 파이몬 그라우스는 모쿠바스의 군주를 찬찬히 살폈다.
“허! 그대는 정말 마력이 없군! 마나프트라스의 힘도 아니고……. 그것은 영기인가?”
영기는 생명체의 근원에 깃든 기운으로 마족은 물론 마물도 가지고 있었다. 그 하찮은 힘으로 저런 경지에 올랐다니 놀라울 뿐이다.
“나는 샤이틴도, 마나 프트라스의 편도 아니야.”
그것은 엘리오의 진심이었다.
이세계의 숨겨진 과거(태고의 역사)를 알고 난 뒤로 그는 중도에 서기로 했다.
그건 인간족의 대전사를 자처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대전사로 싸우는 것이지, 마족을 멸하기 위해 대전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엘리오와 파이몬 그라우스의 대화가 길어지자 전투는 소강상태에 빠졌다.
문득 파이몬 그라우스가 하나 남은 챔피언 아발림에게 손짓을 보냈다.
곧이어 마족 군단이 썰물처럼 뒤로 빠졌다.
전투를 끝냈다기보다는 대화가 길어지자 전력의 손실을 막기 위해 그런 것이다.
에스카토스 왕국군과 라미노프 왕국군도 그에 대응해 뒤로 물러났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던 파이몬 그라우스가 물었다.
“그래서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타메이온을 여행한 적이 있다. 인간족의 영토만큼이나 넓더군. 나는 마족들이 빙벽 너머로 돌아가 살기를 바란다.”
“마족들이 타메이온을 나선 것은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은 마나 프트라스의 개들을 심판하기 위함이다.”
“그걸 하지 말라고.”
“…….”
단도직입적인 엘리오의 말에 파이몬 그라우스는 잠시 눈만 끔뻑거렸다.
“아무리 그대가 군주라 해도 샤이틴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
“아니, 있어.”
“있다니, 그게 무슨…….”
엘리오가 파이몬 그라우스의 말을 막았다.
“너도 태고의 전쟁을 알고 있지? 그러니 심판 운운하는 걸 테고.”
“그렇다.”
대화가 버거웠던 걸까? 파이몬 그라우스가 조금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샤이틴이든 마나 프트라스든 네가 생각하는 절대신은 아니야. 그들은 그저 상대적으로 강할 뿐이야. 예컨대 샤이틴보다 티탄족이 더 강하지. 티탄족은 우주의 있을지 모를 절대신을 찾아다니는 중이고.”
“그것과 그대가 샤이틴님의 뜻을 거스르는 게…….”
“나는 마족 군주들보다 강해. 내가 만난 마족 군주들은 전부 내 손에 죽었거나, 나에게 복종했거나 했지.”
“그대가 몰록과 마몬과 랍바를 죽였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 봐야 셋뿐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샤모스는 오래전에 나에게 굴복했고, 얼마 전에는 베리스를 죽였어. 이 정도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대는 샤이틴님에 대적하려 하는가?”
“샤이틴이 내가 하는 일에 걸리적거리면 싸울 수도 있겠지.”
파이몬 그라우스는 기막힌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족 군주 다섯을 이겼다고 감히 샤이틴님과 싸울 생각까지 하다니!
모쿠바스의 군주는 미친 것일까?
“하아! 그대가 마족 군주 다섯을 격파할 정도로 강한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샤이틴님은 마족 군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신이시다.”
마족 군주들은 수십만 년 이상을 살면서도 신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신은 오직 샤이틴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족의 생각일 뿐, 엘리오에게 신은 상대적으로 뛰어난 존재에 불과했다.
“이봐, 내가 못한다고 남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한테 많은 별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신살자야. 이곳에서도 자칭 신이라는 존재를 여럿 죽였다고.”
파이몬 그라우스가 복잡한 눈으로 모쿠바스의 군주를 보았다.
몰록, 마몬, 랍바, 샤모스, 베리스.
하나같이 쟁쟁한 능력의 마족 군주들이었다.
아니, 애초에 종족을 초월할 능력이 없으면 군주가 되지도 못한다.
물론 군주들 간에도 드러나지 않은 서열이라는 게 있다.
저들 다섯보다는 자신의 서열이 높지만, 문제는 1:1로 싸운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쿠바스의 군주는 마몬, 랍바, 샤모스를 상대로 싸워 이겼다.
아무리 자신의 서열이 높다 해도 그 셋을 상대로 이길 자신은 없었다.
모쿠바스의 군주는 자신보다 강했다.
그렇다고 아사트라의 군주씩이나 돼서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
고심 끝에 파이몬 그라우스가 입을 열었다.
“모쿠바스의 군주여! 그대가 나를 제압한다면, 나는 그대의 뜻에 따르겠다.”
‘너와 싸우겠지만 죽이지 말아 달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잔머리에 능한 엘리오는 바로 알아들었다.
“좋다. 대신에 패한다면 북부의 마족들에게 내 뜻을 전해라. 모쿠바스의 군주가 인간족의 대전사로 나섰으니, 살고 싶다면 타메이온으로 돌아가라고.”
“그들이 그 소리를 듣고 돌아갈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전하기는 하겠다.”
“그 정도면 충분해. 자아, 이제 우리 중에 누가 강한지 겨뤄 보자고.”
엘리오는 파이몬 그라우스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파이몬 그라우스를 이용한다면 북부의 수복이 더 빠르게 될 것 같아서다.
모쿠바스의 군주 말이 끝나자 파이몬 그라우스는 천천히 두 개의 단검을 뽑았다.
데몬족 출신의 파이몬 그라우스는 키가 3미터를 넘겼다.
그러다 보니 단검이라 해도 그 크기가 사람만 했다.
파이몬 그라우스에 비교하면 엘리오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다.
신체적인 우월함 때문일까?
파이몬 그라우스는 망설이지 않고 단검을 휘둘렀다.
쾅! 쾅! 쾅! 쾅! 콰앙―!
귀를 찢을 듯한 폭발음과 함께 두 군주 사이에서 불꽃이 작열했다.
힘으로 몰아붙이던 파이몬 그라우스는 모쿠바스의 군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내자 방법을 바꾸었다.
돌연 그의 단검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화염검들이 다시 한번 엘리오를 향해 몰아쳐 갔다.
엘리오는 파이몬 그라우스의 얼굴 높이로 도약하며 오라 블레이드를 방출했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지직―!
화염에 폭발음이 묘하게 뭉그러지며 사방으로 불덩이가 튀었다.
그중 몇 개는 엘리오의 몸으로도 날아갔지만, 호신강기에 막혀 튕겨 났다.
설원에 떨어진 불덩어리들은 눈에 파묻힌 뒤에도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타올랐다.
시간이 지나자 설원에 떨어진 불덩어리들로 인해 주위가 불바다로 변해 갔다.
마족 군단과 에스카토스 왕국군은 서둘러 군주들의 전장에서 멀어졌다.
급기야 두 군주를 중심으로 사방 오백여 미터가 불바다로 변했다.
곧이어 불바다에서 불의 회오리들이 일어나 엘리오를 향해 몰려갔다.
그것은 파이몬 그라우스의 궁극기, 플레임 토네이도였다.
엘리오는 불의 회오리를 파이몬 그라우스가 만들었음을 알지 못했다.
파이몬 그라우스는 자신과의 격검(擊劍)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의 회오리가 자연스럽게 발생한 탓도 있다.
그러다 불의 회오리들이 일제히 자신에게 몰려들자 ‘아차!’ 싶었다.
하지만 상대를 잘 모른 것은 파이몬 그라우스도 마찬가지다.
엘리오는 불의 회오리에 갇힌 순간,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탈출했다.
단숨에 파이몬 그라우스의 머리 위로 이동한 그는 공허의 검을 사납게 휘둘렀다.
자신과의 격검 도중 함정을 팔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니!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엘리오는 힘을 아끼지 않았다.
휘우우웅―!
채찍처럼 길게 늘어난 오라 블레이드가 파이몬 그라우스의 머리를 휘감았다.
깜짝 놀란 파이몬 그라우스는 쌍단검을 교차해 머리를 보호했다.
쩌엉―!
묵직한 울림과 함께 단검 하나가 뚝 부러졌다.
그럼에도 오라 블레이드의 기세는 조금도 죽지 않았다.
위기를 느낀 파이몬 그라우스는 재빨리 몸을 굽혔지만, 한쪽 뿔이 오라 블레이드에 걸리고 말았다.
콰직―!
데몬족의 경우 뿔이야말로 마력의 원천이다.
순식간에 마력을 반이나 잃은 파이몬 그라우스의 손에서 단검이 툭 떨어졌다.
싸움을 포기한 것이다.
대검을 거둔 엘리오가 파이몬 그라우스 앞에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마지막 한 수 괜찮았어. 나도 감쪽같이 속았다니까.”
엘리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과 치열한 격검 중에 그런 대규모 마법을 쓰다니 솔직히 놀라웠다.
인간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경지였다.
마족 군주가 가진 능력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상대가 이형환위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싸움은 조금 더 치열했을 터였다.
파이몬 그라우스는 땅에 떨어진 제 뿔을 집어 들고 쓰게 웃었다.
플레임 토네이도는 9서클마저 초월한 등급 외의 마법이다.
데몬족도 아닌데 그런 불바다 속에서 멀쩡하다니, 이해 불가다.
‘샤이틴님과 싸울 수도 있다는 소리를 허세라 생각했는데…….’
막상 싸워 보니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파이몬 그라우스가 엘리오 라고아 대전사를 향해 말했다.
“내가 졌다. 약속대로 나는 북부의 마족들에게 그대의 말을 전하겠다. 모쿠바스의 군주가 인간족의 대전사로 나섰으니 마족들은 타메이온으로 돌아가라고.”
“그런데 북부에 진출한 마족 군주는 몇이나 돼?”
“일 차로 인간족 땅과 맞닿은 지역에서 다섯 군주가 넘어왔으니…… 셋이 남았다.”
“일 차라고? 앞으로 더 넘어올 수 있다는 소리네?”
“타메이온에 그대의 뜻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다. 그중 대다수는 그대의 뜻에 따를 테지만, 일부는 그대를 시험하고자 북부로 나올 수도 있다.”
“누가?”
“나보다 강한 군주들은 자기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안 받아들일 것이다.”
“아하! 그들에게는 따로 나를 찾아오라고 해. 만약 인간족에게 횡포를 부리면…… 내가 그들의 영지에 똑같이 되돌려준다고 전해.”
“알겠다. 북부와 타메이온의 군주들에게 그대의 뜻을 전하겠다.”
곧이어 파이몬 그라우스 군주의 마족 군단이 설원을 떠났다.
라미노프 왕국군은 피해 복구를 위해 2선으로 내려가고, 에스카토스 왕국군이 다시 선봉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