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69
1469회. 여선은 뭐 여자 아닙니까?
스테마 그리프 자작의 손이 자연스럽게 에리카 노블의 목을 휘감았다.
언제 뽑았는지 자작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가 에리카의 여리고 하얀 목에 단검을 댄 채로 말했다.
“백작 각하, 저는 마족들에게서 북부를 되찾기 위해 목숨 바쳐 마물과 싸웠습니다. 이런 저를 왜 궁지로 몰아넣으십니까?”
순간 엘리오의 눈에 경멸의 빛이 어렸다.
“내가 당신을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무슨 개소리야? 내가 당신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시켰어?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다닌 건 당신이야.”
“예, 각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각하는 지금까지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까?”
“나? 많이 죽였지. 천 명? 아니 만 명? 그 이상일지도 몰라. 숫자를 세면서 죽인 적이 없어서.”
엘리오는 구주(九州)에서 종문을 상대로 싸울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정말 개미 떼처럼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업보라면 자신은 죽어서 지독한 벌을 받게 되리라.
물론 자신을 벌할 존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상상을 초월한 숫자에 그리프 자작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런 각하께서 저를 도살자라고 비난하십니까?”
“나는 당신처럼 아무나 죽이지 않았어. 내 손에 죽은 이들 모두 극악한 악인이거나, 전쟁터의 적군이었다고. 심지어 그들 모두가 나를 죽이려고 덤벼들었지. 살아남으려면 상대를 죽일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 나도 궁금하다. 왜 사람들을 죽였나?”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인 것은 같습니다. 각하에게 저를 비난하거나, 죄를 물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알았으니까 왜 죽였는지나 대답해 봐.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욕은 안 할게.”
그 무덤덤한 음성에서 그리프 자작은 묘하게도 살의를 느꼈다.
욕은 안 할게.
욕 말고 다른 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 다른 게 무엇인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 그랜드 마스터에게 자작 하나쯤 죽이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그리프 자작의 얼굴이 수차례 변했다.
한참 만에 그의 입술이 열렸다.
“트레이시 골드를 죽이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그녀는 왜?”
“제 아들 하비가 백작 각하께 무례하게 군 것은 트레이시의 농간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비는 클라우드 남작의 종자로 십 년이나 지내게 됐지요.”
“다른 사람들은 왜 죽였는데?”
“트레이시만 죽으면 그리프 자작가가 의심을 받게 될 테니까요.”
“미쳤군.”
엘리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트레이시에 대한 그리프 자작의 복수심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 죄 없는 다른 사람들까지 죽이다니.
이세계 귀족들의 인간성은 녹림 못지않았다.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엘리오에게 그리프 자작이 말했다.
“저는 프리치아 왕국 법정에서 재판받기를 원합니다.”
순간 엘리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살육을 저지르더니, 막상 죄가 들통나니 재판을 받게 해 달란다.
왕국이든 제국이든 재판은 공정하지 못하다.
권력자와 가깝거나, 돈을 쓰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감형된다.
그리프 자작처럼 공을 세운 귀족들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살해당한 사람들이 죄다 평민이니 벌금이나 조금 내고 말리라.
구경하던 귀족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이런 경우 그리프 자작과 원한이 없다면 프리치아 왕국법에 맡기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상대가 라고아 백작이다 보니 그걸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리프 자작이 바르도스를 인질로 잡은 것도 그래서일 게다.
과연 라고아 백작은 뭐라고 말할까?
마침내 엘리오의 입이 열렸다.
“당신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 그게 뭔지 아나?”
“뭡니까?”
“내 앞에서 인질을 잡았다는 거다. 도살자의 행각은 과거의 일이지. 그 문제로 재판을 받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그런데 내 앞에서 인질을 잡았다는 건, 나를 협박하겠다는 뜻이지. 지금 당신은 도살자 주제에, 감히 나, 엘리오 라고아를 협박하고 있는 거다. 나는 그 죄를 프리치아 법정에서 다룰 마음이 없다.”
그리프 자작은 크게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땅에 쏟은 물, 주워 담을 수 없다면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그러시다면 저는 에리카 양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 예술의 애호가라는 자가, 그것도 자기가 후원하던 바르도스를 죽이겠다는 건가?”
“내가 살아야 문화든 예술이든 즐길 수 있으니까요.”
“위선자로군.”
“위선자라도 문화와 예술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만, 너는 더 이상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지 못할 거다. 내 손에 죽을 테니까.”
“그러시다면 에리카 양과 함께 죽겠습니다. 에리카 양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백작 각하께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훗! 그것도 협박이라고 하나? 수준 낮아서 못 듣고 있겠군. 그만 죽어라.”
협박이 통하지 않자 그리프 자작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응?’
에리카의 목을 파고들어 가야 할 단검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엘리오가 영기를 방사해 움직임을 막은 것이다.
“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처음으로 그리프 자작의 음성이 흔들렸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몸은 정상인데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홀드에 당했나?’
그는 재빨리 캔슬레이션(Cancellation)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힘에― 결박된 몸은 풀리지 않았다.
굳어 있는 그리프 자작에게 다가간 엘리오가 자작의 손을 밖으로 꺾었다.
그리프 자작의 손에서 풀려난 에리카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제야 엘리오는 그리프 자작을 옥죄던 영기를 풀었다.
자유를 얻게 된 그리프 자작은 다짜고짜 라고아 백작에게 단검을 휘둘렀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그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엘리오는 상체를 비틀어 피하며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한 가닥 잠력이 자작의 단검 든 팔뚝을 때렸다.
허공을 가른 단검이 자연스럽게 그리프 자작의 목에 박혔다.
“큭!”
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제 손으로 목을 찌른 형국에 그리프 자작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너무 긴장해서 힘 조절에 실패한 탓이라 생각했다.
사제가 신성력을 잃어 치료할 곳도 없으니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
공을 세웠으니 부귀영화를 누릴 일만 남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제 목에 단검을 박아 넣고 부들부들 떨던 그리프 자작이 풀썩 쓰러졌다.
그제야 경비들이 달려와 그리프 자작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지켜보던 귀족들은 그리프 자작이 죽자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목격자들은 전부 그리프 자작이 실수로 제 목을 찔러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던 에리카가 라고아 백작에게 다가갔다.
어색한 것과 별개로, 지금은 감사의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백작님……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엘리오는 고개를 까딱여 보인 후 파티장을 떠났다.
비록 악인을 죽인 것이라고는 해도 마음이 착잡한 때문이다.
***
다음 날.
히르헤라는 지난밤 그리프 자작이 벌인 일로 한차례 들썩거렸다.
도살자가 문화 예술 애호가로 소문난 스테마 그리프 자작이었다는 것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프 자작이 정체가 들통나자 자살했다고 떠들어 댔다.
그게 아니라면 마법사가 단검으로 제 목을 찌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살자와 그리프 자작의 일은 금방 잊혀졌다.
경계비 제막식 이후 뭉그적거리던 북부 왕국의 왕들은 하나 둘 히르헤라를 떠났다.
물론 그냥 간 것은 아니다.
북부 왕국들은 마물의 출몰에 대비해 히르헤라에 일부 병력을 남겨 놓았다.
그렇게 북부는 빠르게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비록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지만 말이다.
엘리오가 지휘하던 서부군도 해체되어 자기 영지로 돌아갔다.
슬래시 랜드 영지군 숙영지.
영주 막사에 네 사람이 마주 앉았다.
엘리오와 파비안 영주, 하워드 남작, 크레아다.
파비안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백작님, 국왕 전하가 승작과 봉토에 대해 뭐라고 하셨습니까?”
“상황이 안정되면 공작의 작위를 내려 주시겠다고 하더라.”
“오오! 역시!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파비안, 하워드, 크레아가 한목소리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정작 축하를 받는 엘리오의 표정은 담담했다.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라 작위에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천현녀가 한 일을 몰랐다면, 이세계에 자리를 잡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구천현녀를 만나 ‘왜 도력(道力)을 모두 잃으면서까지 나를 위해 힘썼느냐?’고 물어야 한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중요하다.
어리석은 미련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때 문득 파비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백작님?”
“왜?”
“언제 제도로 가실 거냐고요? 아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아, 제도에? 가야지. 마족 군주들 중에 허튼 짓거리 하는 놈이 있나 보려고 남아 있었는데……. 없는 것 같으니 오늘이라도 가려고.”
“무슨 걱정 있습니까?”
“걱정은 무슨.”
“검은 태양을 없애면……. 북부에 정착하실 거죠?”
“그건 모르겠다.”
“예에? 모른다고요? 설마 고향으로 다시 가실 겁니까?”
파비안이 놀란 눈으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부인도 죽었고, 가족도 없다면서 왜 고향에 가려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알아볼 게 있어서.”
“그냥 북부에 정붙이고 살면 안 되겠습니까? 대륙의 미녀들이 죄다 백작님만 바라보고 있는데.”
“너는 어째 입만 열면 여자냐.”
“에이, 이거 왜 이러십니까? 백작님이 고향에 돌아가려는 이유도 여자 때문인 거 같은데.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씀해 보십쇼.”
“아니야. 나는 여자가 아니라 여선(女仙)에게 볼일이 있어”
“여선은 뭐 여자 아닙니까?”
파비안이 입술을 삐죽이자 엘리오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나는 오늘 제도로 갈 거니까, 너도 그만 영지로 돌아가.”
“예.”
파비안은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암흑의 시대에 누군가는 남아 영지민들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건 하워드와 크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라고아 백작의 짐이 되느니 차라리 영지를 지킬 생각이었다.
이야기를 끝낸 엘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가 막 떠나기 직전, 파비안이 소리쳤다.
“백작님! 고향으로 가시기 전에 들러 주셔야 합니다! 아셨죠!”
“그래.”
엘리오는 손을 흔들어 보인 후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윽고 구룡번신을 펼치자, 그의 몸이 허공에서 퍽 하고 사라졌다.
***
론디니움 제국.
페트로폴리스 북구.
하늘에 마력장이 생겨나더니, 이내 한 사람이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히르헤라를 떠난 엘리오다.
제국의 수도 역시 히르헤라처럼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가로등 숫자가 많아 히르헤라보다는 전체적으로 밝았다.
마족 군단에 점령당했던 북부와 달리 제도는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직 낮 시간인 듯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조금 보였다.
엘리오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마나 프트라스교의 대신전을 찾아갔다.
놀랍게도 대신전 앞은 버려진 쓰레기로 가득했다.
쓰레기만 보면 여기가 대신전이 아니라 빈민촌 일부로 착각할 정도다.
오 년 만에 가장 신성한 곳이 가장 추레한 곳으로 변한 것이다!
“쯧쯧!”
혀를 차던 엘리오는 대신전 정문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잠시 기다리던 엘리오가 손으로 문을 밀자, 육중한 신전 문이 삐그덕 소리와 함께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엘리오는 악취에 코를 막았다.
대신전 내부는 밖보다 더 엉망이었다.
의자는 다 부서졌고, 심지어 의자 일부는 제단에 던져져 있기까지 했다.
사제와 성기사가 멀쩡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인심이 이렇게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