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70
1470회. 뭐가 기대된다는 건지 알겠습니까?
엘리오는 대신전의 흉흉한 모습에 새삼 인생무상을 느꼈다.
이세계 인간들의 정신적 지주인 마나 프트라스 교단이 이렇게 됐을 줄은 몰랐다.
수석 사제라는 노사제가 직접 북부까지 왔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가뜩이나 예리한 오감에 악취를 맡고 있으려니 속이 울렁거렸다.
제도 외곽의 빈민촌도 이곳처럼 더럽지는 않았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엘리오는 목을 가다듬은 뒤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계십니까!”
그 소리가 안쪽까지 전해진 모양이다.
웬 중년 남자가 문을 조금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십니까?”
“엘리오 라고아 백작입니다.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순간 중년 남자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라고아 백작님이십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중년 남자는 문을 열어 둔 채 안쪽으로 우당탕 뛰어 들어갔다.
곧이어 무덤처럼 고요하던 대신전 내부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어 있는 줄 알았는데 깊숙한 곳에서 숨죽이고 지냈던가 보다.
잠시 후 일단의 사람들이 대신전으로 쏟아져 나왔다.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와 대신관, 신관을 비롯한 고위 사제들이었다.
사제들 속에서 팔라딘 메타트론을 발견한 엘리오가 눈인사를 건넸다.
메타트론이 계면쩍은 얼굴로 고개 숙여 화답했다.
그런데 메타트론의 얼굴은 신성력을 잃기 전보다 더 좋아 보였다.
이전에 음울했다면 지금은 어딘가 초탈한 느낌이다.
고위 사제들 속에서 데프테로 수석 사제가 튀어나와 알은체를 했다.
“라고아 백작님, 정말 와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다시 뵙네요.”
엘리오는 늙은 사제와 인사를 나눈 후,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언제고 다시 말난 줄은 알았어요. 이런 식은 아니었지만.”
“대신전이 왜 이렇게 됐습니까? 북부 사람들이 보면 마물의 습격이라도 받은 줄 알겠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 거죠.”
“무슨 뜻이죠?”
엘리오의 물음에 안나 라마크리슈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아! 전에 사제들이 신성력으로 치료를 할 때 돈을 받았어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요. 돈이 없는 사람들은 치료를 해 주지도 않았죠.”
그러자 뒤에 서 있던 할 에리언 대신관이 변명처럼 말했다.
“그보다는 사제들도 사람인지라……. 신성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어차피 모든 병자를 다 치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가 자조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들으신 대로 모든 병자를 치료할 수 없어서…… 돈을 낸 사람들부터 치료를 해 주었답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계속 뒷전으로 밀려났지요. 그랬는데 오 년 전에 갑자기 신성력이 사라진 거예요. 사제와 성기사 들이 힘을 잃자…… 빈민가 사람들이 몰려와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대신전을 뒤집어 놨어요.”
“쯧! 인심을 잃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셨군요.”
“어쩌겠어요. 준 대로 받아야지요.”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오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뭡니까?”
“신탁을 받았어요. 검은 태양을 지탱하는 마력석의 위치에 대한.”
“역시 그랬군요. 어디에 있나요?”
“어비스요.”
“…….”
엘리오는 잘못 들은 줄 알고 고개를 갸웃하다 되물었다.
“어디라고요?”
“어비스에 있어요.”
말과 함께 안나 라마크리슈는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그제야 엘리오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님을 알았다.
“어비스라면……. 검은 태양 아닙니까?”
“맞아요.”
“거기에 마력석이 있다고요?”
“네. 마나 프트라스님께서는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타메이온이나 대수림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군요.”
엘리오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를 보았다.
검은 태양까지 가기도 어렵지만, 어비스는 로디나 대륙 만큼이나 광활한 곳이다.
그곳에서 마력석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도 같았다.
“마력석의 위치는 제가 알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비스에 직접 들어가시려고요?”
“네. 제국에서 어비스 정벌을 계획하고 있어요. 저는 라고아 백작님께서 어비스 정벌군에 합류해 주시기를 바라요.”
“어비스로 가려면 검은 태양을 통과해야 할 텐데……. 제국군이 무슨 수로…….”
“비공정을 징집하고 있어요.”
“아!”
“조만간 북부 왕국들에도 협조를 요청할 거예요. 북부 왕국에 있는 비공정 숫자는 많지 않지만……. 지금은 하나라도 아쉬우니까요.”
“비공정만으로는 힘들 텐데요.”
어비스는 악신 샤이틴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마족 군주들은 물론, 안타르 신처럼 악신 샤이틴을 따르는 신들도 있었다.
제국군의 엑시티움이 안타르와 같은 신들에게 통할지 의문이다.
“그래서 백작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우리는 악신 샤이틴과 싸울 생각이 없어요. 마력석만 파괴하고 재빨리 빠져나갈 거예요.”
“흐음. 알겠습니다.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엘리오는 어비스 정벌군의 합류 요청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정벌군과 자신의 목적이 같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마력석 파괴에 라고아 백작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벌군 합류에 앞서 라고아 백작이 들어주기 어려운 조건을 걸면 어쩌나 염려했는데, 너무 쉬워서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다.
“감사해요. 백작님은 마나 프트라스 교단의 은인이세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제국 황제가 사도님의 말을 믿던가요?”
“마나 프트라스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에게 사도는 아주 특별한 위치거든요.”
“신성력이 사라졌어도 인정해 준다는 겁니까?”
“신성력과 별개로 사도가 파문을 선언하면……. 그들이 받은 마나의 축복도 사라지거든요. 그러니 사도의 권위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어요.”
“아하.”
엘리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를 보았다.
마나 프트라스 교단이 완전히 망한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런 엘리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가 말을 덧붙였다.
“사도인 저에 한해서만 그래요. 신성력을 잃은 사제와 성기사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에요. 빈민들이 대신전을 습격할 때 치안대가 뒷짐만 지고 구경할 정도로요.”
“저런.”
“대신전이 이 모양이라 모시겠다는 말씀도 못 드리겠네요. 북구의 관청을 찾아가서 숙소를 요청하면 안내해 드릴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벌군은 언제쯤 출발할 것 같습니까?”
“한 달은 넘기지 않을 거예요. 북부 왕국에서 출발한 비공정이 도착하면 바로 출발할 테니까.”
“한 달이라……. 숙소를 제공받아야겠군요.”
한 달간의 장기 체류면 돈이 적잖게 들어갈 터였다.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가 제국 관청을 찾아가라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와 작별한 엘리오는 곧바로 북구의 관청을 찾아갔다.
제국의 수도답게 이런 암흑 세상에도 북구의 관청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엘리오가 신분을 밝히자 발터 베크 남작이 달려왔다.
“라고아 백작 각하. 오랜만에 봽습니다. 행정국장 발터 베크 남작입니다.”
“아, 오랜만입니다. 이번에도 신세를 좀 지려고 왔습니다.”
“신세라니요, 별말씀을요. 전에는 더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저도 관청에 매인 몸이라…… 제국법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육 년쯤 전 엘리오는 마젠타를 찾던 중 제국 정보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엘리오가 마젠타를 죽이지 않고 놔주자, 제국은 바로 지원을 끊었던 것이다.
그때의 실무자가 발터 베크 남작이었다.
“이해합니다. 윗분들이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시 대신전에 들렀다가 오시는 길이십니까?”
“네,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가 관청에 숙소를 문의하라고 하더군요.”
“혹시 정벌군에 합류하시기로 하신 겁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국민들을 대신해 백작 각하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남작의 과장된 인사에 엘리오는 피식 웃었다.
이러다가도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게 제국임을 알기 때문이다.
베크 남작은 엘리오를 관청에서 멀지 않은 여관으로 안내했다.
그날부터 엘리오는 여관에 머물렀다.
보름이 지나도록 대신전은 물론, 관청에서도 찾는 사람이 없었다.
진행 상황이 궁금해진 엘리오는 대신전을 찾아갔다.
마나 프트라스 대신전.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의 얼굴은 보름 전보다 초췌해 보였다.
“일이 잘 안 되나 봅니다?”
“얼굴이 그렇게 안 좋은가요?”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의 반문에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아! 북부 왕국의 반응이 기대에 못 미쳐서 그래요. 백작님이 정벌군에 합류했다는 것까지 알려 줬는데, 어비스 정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질 않아요.”
“제국의 정벌군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건가요?”
“강철 골렘에 목적이 있다고 믿는 것 같아요.”
“허…….”
엘리오는 기가 막혔지만 한편으로 북부 왕국의 의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왕국의 가장 큰 적이 제국인 까닭이다.
마나 프트라스 교단은 세상을 암흑 이전의 상태로 돌리고 싶어 하지만, 밝은 세상에서 왕국의 주적은 제국이 아니었던가!
왕국들이 제국군의 어비스 정벌을 순수하게 바라보지 않는 건 당연했다.
“두 개 왕국에서만 비공정을 보내 주기로 했어요.”
“어딘가요?”
“에스카토스 왕국과 베일럼 왕국요.”
엘리오의 입가에 씁쓰름한 미소가 걸렸다.
에스카토스 왕국은 자신의 체면을 봐서 보낸 것일 테고, 베일럼 왕국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힘을 쓴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안나 사도님.”
“예?”
“제국군 정벌군이 어비스에서 강철 골렘을 발굴하지 않는 건 확실합니까?”
“그러지 않겠어요? 마력석을 파괴하기도 빠듯한데…….”
“안나 사도님도 확신은 못 하시네요?”
“제가 황제는 아니니까요.”
“지금 황제가 루이스 프레이저 3세죠?”
“네, 3년 전에 선황께서 황위를 이양하셨어요.”
“지금의 황제가 루이스 프레이저 3세라면 다른 의도를 가질 만도 하다고 보는데……. 안나 사도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루이스 프레이저 3세는 황태자이던 5년 전에 남부 왕국과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시발점이 바로 어비스에서 출토된 강철 골렘이다.
루이스 프레이저 3세가 강철 골렘에 욕심이 없을 리가 있나.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는 즉답을 피했다.
그녀 역시 황제를 믿지 않았지만, 차마 그런 속내를 밝힐 수는 없었다.
“그건……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어비스 정벌군의 목적이 마력석의 파괴에 있다는 건 분명해요. 마력석을 부수지 않는 한 세상은 회복되지 않아요. 그건 지금의 황제도 알고 있고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두 개의 비공정은 언제쯤 도착한답니까?”
“열흘 후라고 들었어요.”
“그럼 열흘 후에 어비스 정벌군이 날아오르는 겁니까?”
엘리오의 손이 마치 비공정처럼 사선으로 떠올랐다.
“아마도요.”
“기대되는군요.”
엘리오는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에게 묵례를 하고 돌아서 나갔다.
할 에리언 대신관이 물었다.
“안나 사도, 뭐가 기대된다는 건지 알겠습니까?”
“전혀 모르겠어요. 그의 생각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네요.”
“새 황제가 그를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비스 정벌군이 제대로 굴러갈지 걱정입니다.”
“내가 바라는 건 마력석의 파괴뿐이에요. 그 외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새 황제는…….”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가 할 에리언 대신관의 말을 끊었다.
“그만하세요. 우리는 마나 프트라스의 종이에요. 대신관님은 마나 프트라스님의 권능을 되살리는 일에만 집중하세요.”
“알겠습니다.”
할 에리언 대신관은 단호한 안나 사도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