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81
1481회. 아브라나트의 저주
계속해서 피가 줄줄 새어 나오자 엘리오는 어쩔 수 없이 점혈을 했다.
영기지체가 된 이후 처음 겪는 현상이다.
“이건 무슨 저주도 아니고…….”
혼잣말을 하던 엘리오는 흠칫했다.
어쩌면 정말 아브라나트의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된다.
호신강기는 물론, 심지어 티탄족 전사의 가호까지 받는 몸에서 계속된 출혈이라니.
베리스 군주는 ‘에테르눔은 파괴되지 않고 빠르게 재생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몸을 보면 그런 소리를 못 할 게다.
평범한 인간의 신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피를 흘리고 있었으니까.
점혈은 출혈을 막아 주지만 전투에는 좋지 않다.
혈도를 막으면 내기의 흐름까지도 덩달아 차단되기 때문이다.
다른 군주나 신적 존재, 악신 샤이틴과 싸우려면 내기의 흐름이 원활해야 한다.
혈도를 풀어야 한다는 소리다.
‘설마 그때 또 피가 나지는 않겠지?’
엘리오는 갑자기 밀려드는 막막함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윽고 구름 아래로 내려가려던 그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자신이 벌거벗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부라퀴족에게 받은 트레듀서뿐이었다.
그는 마하담에서 새 옷을 꺼내 대충 몸에 걸쳤다.
여벌의 갑옷이 없어 조금 아쉬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옷까지 갈아입은 엘리오는 천천히 구름 아래로 내려갔다.
엘리오가 무사히 내려오자 비공정과 마족의 반응이 엇갈렸다.
비공정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지만 마족 진영은 침묵에 휩싸였다.
엘리오는 아스타로이드족 대족장 이스칸다르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브라나트는 죽었다. 돌아가라.”
그러나 이스칸다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날개를 펄럭이던 이스칸다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명을 내리신 분은 아브라나트님이 아니라 샤이틴님이오.”
이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소리다.
엘리오가 차갑게 말했다.
“거역하면 죽는다.”
“샤이틴님의 명령을 거역해도 죽소.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족답게 죽어야 하지 않겠소?”
화염검을 쥔 이스칸다르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고요하던 마족 진영이 투기로 달아올랐다.
저 화염검이 비공정을 가리키면 이전처럼 죽자 사자 달려들 게 뻔하다.
엘리오의 입안이 말랐다.
지금 또다시 싸움이 벌어지면 비공정은 모두 파괴될 게 분명했다.
싱크레어와 마나 프트라스의 사제들이 죽는 건 막고 싶었다.
“샤이틴은 너희에게 책임을 묻지 못할 것이다.”
화염검을 쥔 이스칸다르의 손이 머리 위에서 우뚝 멈춰 섰다.
“무슨 소리요?”
“샤이틴은 검은 산에 있겠지?”
“그렇소.”
“나는 아브라나트를 죽였다. 그리고 곧 샤이틴과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샤이틴을 이긴다면, 누가 너희에게 책임을 묻겠나?”
“…….”
뜻밖의 말에 이스칸다르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머뭇거리는 그의 귓가에 마족 군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셈인가? 대족장이라면 부족원들에게 살 기회를 줘야지. 안 그래?”
그 말에 이스칸다르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이야 죽어도 그만이지만 젊은 부족원들을 생각하면 기회를 주는 게 맞았다.
이스칸다르는 화염검을 천천히 내렸다.
그와 함께 마족 진영의 투기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곧이어 이스칸다르가 말했다.
“그대의 말이 맞지만 물러갈 수는 없소. 비공정과 함께 먼저 가시오. 우리는 비공정의 뒤를 따르겠소.”
애매한 태도에 엘리오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지켜보다가 싸울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속셈이다.
뒤에 마족들을 달고 가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시든지.”
엘리오는 이스칸다르와 마족 진영을 훑어본 뒤 비공정으로 돌아갔다.
비공정 갑판에 내려선 엘리오는 선수(船首)로 걸음을 옮겼다.
스승을 지켜보던 싱크레어가 달려와 엘리오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어.”
엘리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지만, 싱크레어의 눈은 심각했다.
“옷은 어디서 났어요? 아까는 다 타 버린 것 같던데.”
“아공간 창고에 여벌로 가지고 다니던 옷이다.”
“아…… 몸은요? 스승님에게서 피 냄새가 나요.”
엘리오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소드 비기너의 오감에도 걸려들 만큼 아브라나트가 남긴 상처는 깊었다.
“태고신과 싸웠는데 멀쩡할 리가 없잖느냐.”
“심하게 다치셨어요?”
“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선수에 도착한 엘리오는 대충 걸터앉았다.
그제야 긴장이 풀려서인지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싸움이 끝난 뒤에도 팔다리가 묵직하기는 처음이다.
아니 지금 보니 팔다리뿐 아니라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외상뿐 아니라 내상까지 입은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운기요상을 하고 싶었지만 피가 터질까 봐 신경이 쓰였다.
‘전사의 가호가 재생을 해 준다고 하니 지금쯤이면 괜찮겠지?’
엘리오는 몸의 긴장을 풀고 천천히 구천기를 돌렸다.
막아 두었던 혈도가 시원하게 열리더니 이내 옷이 젖어드는 느낌이다?
혹시나 하고 눈을 번쩍 뜨고 봤더니 역시나 옷 위로 피가 내비쳤다.
엘리오는 쓰게 웃으며 다시 혈도를 찍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된통 걸렸군.’
스승의 옷이 피로 물들자 싱크레어가 얼른 그를 선실로 이끌었다.
“스승님, 치료사에게 치료부터 받으세요.”
잠시 후 싱크레어는 제국군 소속 여자 치료사 하나를 데려왔다.
치료사 앞에서 엘리오는 다시 상의를 벗어야 했다.
라고아 백작의 벌거벗은 상체를 본 치료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삼십여 군데에 동전 크기의 상흔이 있는데, 그 주변이 보랏빛으로 침식당한 상태였다.
중독이나 감염이 극에 달하면 피부는 보랏빛으로 변한다.
저 정도로 감염이 진행되려면 수일은 걸렸으리라.
라고아 백작은 저런 상처를 왜 치료하지 않고 방치했을까?
“각하, 부상을 입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십 분쯤 전?”
“십 분이라고 하셨습니까? 십 일이 아니라요?”
“십 일이라니? 농담하지 마라. 조금 전 마족의 신과 싸울 때 입은 상처다.”
치료사가 반사적으로 싱크레어를 쳐다보았다.
싱크레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십 분쯤 전에 입으신 부상이 맞을 거예요. 그전에는 이 정도로 다친 적이 없으니까.”
고개를 갸웃하던 치료사가 상처에 은으로 된 바늘을 가져다 댔다.
바늘은 변색되지 않았다.
중독으로 인한 현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상처의 감염이 심합니다. 마치 십수 일 동안 방치한 것처럼요. 일단 소독을 하고, 창상에 좋은 약을 발라 드리겠습니다.”
치료사가 삼십여 군데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꼼꼼히 발랐다.
묵묵히 지켜보던 엘리오가 문득 싱크레어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래로도 비슷한 상처가 있으니 먼저 나가 있거라.”
“치료사님이 여잔데, 제가 남아 있어야 안심하지 않을까요?”
“쓰읍!”
엘리오가 인상을 쓰자 싱크레어는 마지못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아래쪽도 봐 주게.”
싱크레어가 나가자 엘리오는 치료사 앞에서 바지를 훌렁 벗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뻔뻔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뻔뻔하던 엘리오는 백 살이 넘어가면서 남녀 간의 감정에 무디어졌다.
삼십 대의 여자 치료사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치료를 이어 갔다.
상처는 아랫배와 허벅지까지 빠짐없이 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약을 바르던 치료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나?”
“발등과 정강이 쪽 상처는 꽤 깊은데……. 걷는 데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저 정도 깊이면 그게 뭔지 몰라도 뼈에 닿았을 터였다.
피부의 감염 정도를 보면 뼈의 상태도 정상이 아닐 게 분명했다.
자신이 볼 때 백작은 걸어다닐 수 없는 몸이었다.
“조금 욱신거리지만 괜찮다.”
실제로 엘리오는 정강이에서 타박상 정도의 통증만 느끼고 있었다.
“발등과 정강이 쪽 상태는 주의 깊게 살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통증이 심해야 정상인데…….”
치료사는 말끝을 흐렸다.
피부처럼 뼈도 감염됐다면 다리를 잘라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엘리오가 지나가듯 말했다.
“이번 창상약은 따갑지 않아서 좋군.”
“예?”
“아니다. 다 끝났나?”
“예.”
치료가 끝났다고 하자 엘리오는 다시 바지를 입었다.
그를 지켜보던 치료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처의 감염 상태로 보아 약을 좀 복용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다. 내 상처는 약으로 나을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수고했다.”
말을 마친 엘리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선수로 걸어가는 엘리오의 표정은 착잡했다.
고작 십여 분 전의 상처가 십수 일 동안 방치한 것처럼 감염되었다니.
‘역시나 저주인가.’
저주에는 백약이 무효다.
하물며 그것이 태고신의 저주라면 오죽하랴.
선수로 돌아가니 싱크레어와 안나 사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검은 산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때문이다.
엘리오가 안나 사도에게 물었다.
“사도님, 계시에서 본 그 검은 산입니까?”
“생김새가 맞는 것 같아요.”
“다행이군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법사가 뒤로 물러나 수정구에 뭐라 뭐라 떠들어 댔다.
말투와 표정이 총사령관인 크나우프 대공에게 직접 보고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비공정과 검은 산이 점점 가까워졌다.
비공정이 조금씩 고도를 낮췄다.
아래로 내려가니 산꼭대기에 조금 못 미쳐 거대한 건축물이 보였다.
먹물처럼 시커먼 건축물에서 진한 어둠의 에테르가 느껴졌다.
엘리오는 저곳에 마력석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안나 사도와 싱크레어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건축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건 제국군도 마찬가지인 듯, 말하지 않았음에도 비공정은 건축물을 향해 내려갔다.
“으음!”
“크으음!”
갑판에 나와 있던 제국군과 사제들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둠의 에테르에 노출되니 고통스러운 것이다.
검은 산으로 내려갈수록 신음 소리는 커져만 갔다.
기사와 총사 들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었고, 사제들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싱크레어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지만, 시간이 지나자 본래의 혈색으로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던 싱크레어가 기막힌 얼굴로 말했다.
“어둠의 에테르에 모두 힘들어 하는 것 같아요. 스승님과 함께 오지 않았다면 실패했을 거예요.”
“아직 악신 샤이틴이 남아 있으니 성공을 장담하지 마라.”
“스승님은 이기실 수 있죠?”
“글쎄다.”
엘리오는 자신하지 않았다.
태고신 아브라나트와의 싸움 이후 그는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아브라나트의 마지막 공격에서 입은 상처가 집요하게 그를 괴롭힌 때문이다.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운기조차 할 수 없었다.
내외상을 입었음에도 운기를 못 하니 정신적 육체적 피로는 극에 달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지금의 엘리오는 아브라나트의 저주로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위태위태하지만 비공정은 건축물 앞에 착륙했다.
비공정 뒤로 마족과 마물 들이 소리 없이 내려와 대오를 갖추고 섰다.
얼마나 조심하는지 그 많은 마족과 마물이 움직이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덜커덩.
마침내 비공정의 문이 열렸다.
두 척의 비공정에서 백여 명의 중무장한 제국군이 밖으로 나왔다.
천이백 명 중에서 살아남은 정예 중의 정예들이다.
마지막으로 열 기의 4세대 골리앗이 거체를 이끌고 계단을 내려왔다.
두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 개의 검은 총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엘리오와 크나우프 대공이 어둠의 에테르가 휘감고 있는 건축물 앞에서 재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