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89
1489회. 백작님과는 어떤 관계고……?
엘리오는 토르누비스(운종술)를 이용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에스카토스 왕국을 벗어난 뒤에는 다시 역마차를 이용했다.
그렇지 않아도 방향 감각이 없는 데다가 베일럼 왕국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북부라고 해도 남쪽으로 갈수록 통행로는 안전했다.
몇 달 전에 북부 왕국 연합군이 대대적인 토벌을 한 덕분이다.
먼 산에서 마수의 울음소리는 들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엘리오는 마차 안에서 마수를 잡고 올까 고민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마수를 잡고 마차로 돌아오는 과정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싶지 않아서다……라는 건 핑계고, 지금의 그는 지쳐 있었다.
파비안 등에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어비스 정벌은 그의 심신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아브라나트의 저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크나우프 대공과 싱크레어에게 배신을 당한 때문이다.
끝내 마력석을 파괴하고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그 뒤로도 바쁘게 움직였다.
대수림의 괴물을 무찌르고, 황제를 치죄하고, 다시 슬래시 랜드의 마수를 정리했다.
어비스에서 나온 뒤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심력의 소모는 어쩔 수 없었다.
아브라나트의 저주에서 벗어난 뒤 육체는 치료됐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덜커덩.
바퀴가 박혀 있던 돌을 타 넘으면서 마차가 한차례 요동쳤다.
마차의 흔들림에 따라 승객들의 상체가 출렁거렸다.
그 충격에 꾸벅꾸벅 졸던 승객들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잠에서 깬 중년 남자가 무료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엘리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쪽은 어디까지 가시오?”
“베일럼 왕국요.”
“오! 베일럼 왕국. 나도 그리로 가는 중인데…… 베일럼 왕국이 요즘 핫하긴 하지.”
중년 남자가 은근슬쩍 말을 내렸다.
“핫이요?”
“핫하다는 말 모르나? 요즘 젊은이들이 잘 쓰던데. 뜨겁게 달아올랐다는 말이네.”
“무슨 일 있습니까?”
중년 사내는 대답에 앞서 되물었다.
“그 전에 자네는 어디 출신인가?”
“에스카토스 왕국요.”
“그렇다면 전혀 모르겠군. 베일럼 왕국은 십 년 전부터 시끌시끌했었네. 1왕자와 2왕자가 왕위를 두고 싸우다가 결국 2왕자가 왕이 됐거든.”
“그랬는데요?”
엘리오는 웃음이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1왕자 측의 칼 노릇을 했지만, 2왕자가 왕위에 오르자 2왕자 측근인 제럴드 로건 백작에게 투항했다.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2왕자 측의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이 그에게 암살자를 보냈다.
죽기 직전의 오마르 백작을 구해 준 뒤 그와 함께 다녔는데, ‘전혀 모르겠군’이라니.
“5년 전부터 폴 허먼 백작과 제럴드 로건 백작 간에 주도권 싸움이 벌어졌네. 쥐 죽은 듯 지내던 제럴드 로건 백작이 폴 허먼 백작 측을 들이받았거든.”
“아…….”
엘리오는 대번에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오마르 백작이 소드마스터가 되어 돌아왔으니 잠잠하던 제럴드 로건 백작 쪽에서 슬슬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리라.
역시나 중년 남자의 설명이 계속됐다.
“로건 백작 측에 소드마스터인 오마르 백작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허먼 백작 측도 이에 질세라 소드마스터를 끌어들여서…… 큰 싸움을 앞두고 있지.”
“허먼 백작 측이 데려온 소드마스터는 누군데요?”
“위르겐 라데 백작이라고, 용병 출신으로 대귀족까지 오른 대단한 기사라네.”
“오, 대단한 소드마스터인가 봅니다?”
“실전적인 검술로 대륙 제일이라네. 용병 생활을 하다가 터득한 검술이라니 오죽할까. 소드마스터가 된 것도 십여 년 전이고. 오마르 백작이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하더군.”
“그 정도예요?”
“순수하게 검술만으로 겨루면 라고아 백작도 그의 상대가 안 될걸?”
“정말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요.”
“그래서 다들 폴 허먼 백작 측의 승리를 예측하고 있지. 모여드는 귀족의 숫자만 봐도 알 수 있다네. 5년 전에는 비등비등했는데, 지금은 폴 허먼 백작 측이 압도적으로 많아.”
“세상인심이 원래 그렇죠.”
“자네도 뭘 좀 아는군. 우리 라쿤 상단에서도 이번에……. 아이쿠, 내가 너무 혼자서만 떠들었군. 자네는 무슨 일로 베일럼 왕국에 가는가?”
“오마르 백작님을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응? 누구?”
“라르바 오마르 백작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요.”
“아, 하하, 오마르 백작님. 그래, 백작님과는 어떤 관계고……?”
사내가 청년의 안색을 슬쩍 살폈다.
지금까지 허먼 백작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떠들었는데 그 반대파의 선봉인 오마르 백작을 만나러 간다니 긴장한 것이다.
“친구요.”
“하하, 젊은 사람이 농담은. 오마르 백작님의 나이가 육십이 넘었는데…….”
“사람을 사귀는 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죠. 오마르 백작님과 저는 꽤 친한 편입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먼 친척이라도 되나? 아니면 오마르 백작님의 후원을 받았나? 나도 사실 마음으로는 오마르 백작님을 응원하고 있다네.”
중년 남자는 찔리는지 슬쩍 말을 바꿨다.
엘리오가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왜요?”
“응? 뭐가 말인가?”
“말과 달리 마음으로는 오마르 백작님을 응원하신다면서요? 왜 응원하시냐고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야 오마르 백작님이 남자 중에 남자라 그러지.”
“뭘 보고요?”
“그, 소드마스터시잖나.”
“라데 백작도 소드마스터잖아요.”
“험, 아무튼, 나도 오마르 백작님을 응원한다는 걸 알아 두게.”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나? 그런 건 왜 묻나?”
중년 사내가 찔끔 놀라 되물었다.
엘리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누가 응원하는지 정도는 알아야죠. 라쿤 상단이라고 하셨죠? 이름이?”
엘리오가 집요하게 캐묻자 중년 사내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마, 마이클이네.”
“라쿤 상단의 마이클 씨, 맞죠?”
“한 번 말하면 알아듣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나? 그러는 자네는 누군가? 누구기에 오마르 백작님의 친구라고 하느냐 말일세.”
“저요? 엘리오요.”
“성이 없는 걸 보면 평민인가 본데…… 응? 방금 누구라고 했나?”
“한 번 말하면 알아듣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요?”
엘리오가 그대로 되돌려주었지만 마이클은 발작하지 못했다.
엘리오라는 말에 왠지 가슴이 철렁한 때문이다.
“설마, 엘리오…… 라고아 백작님은 아니겠지……요?”
마이클이 조심스럽게 말끝을 올렸다.
오마르 백작의 친구라고 할 만한 엘리오는 엘리오 라고아 백작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엘리오가 맞습니다.”
순간 마이클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무릎과 무릎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좁은 마차에서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몇 차례 무릎을 구부리려 시도하던 그가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백작님을 몰라뵙고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죄는 무슨, 모르면 그럴 수 있지. 앉아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머리를 굽신거리던 마이클이 다소곳한 자세로 앉았다.
한순간 마차 내부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바퀴 구르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드드드드―.
무심한 얼굴로 마이클을 보던 엘리오가 문득 물었다.
“마이클 씨, 순수하게 검술로 싸우면 나도 라데 백작의 상대가 못 될 거라고 했죠?”
“그, 그건, 그냥 떠도는 말을…….”
“아, 마이클 씨 생각이 아니라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건가요?”
“그, 그렇습니다. 제 주제에 어떻게 그랜드 마스터와 소드마스터의 검술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상단에서 주워들은 말에 불과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쿤 상단은 허먼 백작 쪽에 줄을 섰죠?”
엘리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마이클을 보았다.
조금 전 그가 라쿤 상단이 어쩌고 한 말을 떠올려 찔러 본 것이다.
“그, 그게…… 그렇습니다.”
마이클은 결국 인정했다.
어차피 라고아 백작이 조사하면 드러날 일이기에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허먼 백작 쪽에서 그런 말들이 나돌고 있는 모양이네요? 괘씸하게도.”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이클은 눈을 내리깔았다.
상단 관리자가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가를 드나들면서 상단에도 그런 소문이 퍼졌다.
상단 관리자가 검술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했겠나.
그도 자신처럼 악시무스 백작가에서 들은 이야기일 게 뻔했다.
“마이클 씨.”
“예?”
“가서 전해요. 허튼소리 하면 내가 이빨을 다 뽑아 버린다고.”
“누구에게 전하라는 말씀이신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
“아, 예…….”
마이클은 그게 누군지 몰랐지만 일단은 ‘예’라고 답했다.
그랜드 마스터의 지시에 ‘싫다’고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베일럼 왕국까지 간다’고 했던 말 때문에 다른 마차로 갈아타지 못했다.
그를 제외한 승객들은 전부 다음 역마차 사무소에서 내렸다.
그곳이 본래 목적지인지, 역마차를 갈아타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베일럼 왕국.
아티오니아스.
정오 즈음.
역마차 한 대가 아티오니아스 역마차 사무소 앞에서 멈춰 섰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자 승객들이 하나둘씩 내렸다.
마지막으로 내린 사람은 이십 대로 보이는 청년과 중년 남자였다.
엘리오와 마이클이다.
마이클은 먼저 움직이지 못하고 라고아 백작의 눈치만 살폈다.
“왜 그러고 있어요? 가 봐요.”
라고아 백작의 말이 떨어지자, 비로소 마이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예, 예.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이클은 허리가 부러져라 접어 보인 후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떴다.
엘리오는 느긋하게 멀리 보이는 영주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티오니아스 영주성.
오마르 백작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라고아 백작을 맞이했다.
“라고아 경,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슬래시 랜드에 계셨다지요?”
“파비안이 척박한 땅이라고 하도 우는소리를 해서, 좀 살아 봤습니다.”
“허허. 그러셨군요. 슬래시 랜드가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치안이 그렇게 좋다면서요?”
“사고 치는 놈들을 전부 광산에 잡아 처넣었거든요.”
“역시 라고아 경답습니다. 분탕질 치는 자들만 손보면 세상이 훨씬 살 만해 질 텐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오마르 백작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엘리오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오마르 백작도 능력 있고 책임감 강한 영주지만 뜻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쓰게 웃던 오마르 백작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크나우프 대공과 싱크레어의 일은 들었습니다. 황제의 사주로 그렇게 되었다지요? 황제와는 이야기를 잘 끝내셨습니까?”
엘리오는 황제를 찾아갔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사과를 받는 선에서 정리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오마르 경은 또 정쟁에 휘말리셨다면서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세상이 오마르 경을 가만히 놔두질 않는군요.”
“허허! 제 이야기가 벌써 라고아 경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까?”
“역마차를 타고 오다가 동승한 승객에게 들었습니다. 베일럼에서는 유명한가 보던데요?”
“사실은 아무 일도 없는데, 허먼 백작 측에서 자꾸 일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오마르 경과 라데 백작의 결투겠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동승한 사람은 라데 백작이 우세하다고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골적인 엘리오의 질문에 오마르 백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도 실전을 많이 치른 편인데…… 라데 백작은 아예 전쟁광이라서요. 실전 경험은 그쪽이 훨씬 많을 겁니다. 소드마스터에 오른 것도 저보다 십 년은 빠르고.”
승리를 자신할 수 없다는 소리다.
베일럼의 호랑이라 불리는 오마르 백작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엘리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오마르 백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 5년간 무슨 일을 겪었는지 폭삭 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