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6
16회. 원망하지 말자고
황요명이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제가 채주님께 가서 말씀 올려 볼까요?”
그러자 구밀복검 심양각은 뜻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예상외의 냉랭한 반응에 황요명은 잠시 망설였다.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다.
‘능구렁이들 같으니. 관심 없는 척 하겠다 이거지? 그래, 내가 판 깔아 줄게.’
황요명은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발로 툭툭 건드려 일으켰다.
웅크리고 있던 사내 셋이 마지못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 내려선 황요명이 큰 소리로 말했다.
“어으! 춥다! 이런 날은 몸을 좀 써 줘야 한다니까! 뭣들 해? 가서 사람들 좀 불러내! 비무든 뭐든 빨리 해야지. 이러다가 해 떨어지겠어.”
황요명의 채근에 사내들이 어기적거리며 흩어졌다.
잠시 후 다섯 채의 모옥에서 도적들이 하나둘씩 걸어 나왔다.
우연히 장소봉과 눈이 마주친 황요명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지요? 본래 그런 건 빨리빨리 처리해야 말이 없는 법입니다. 시간 끌수록 추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
장소봉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풍 채주님께서 안 보이시네요?”
“지금 연 일곱째와 대화 중이시다. 금방 나오실 테니 신경 쓰지 마라.”
“하하! 설마 칼을 맞대 보기도 전에 포기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때마침 연적하와 풍연초가 모습을 드러냈다.
큰소리치던 황요명은 막상 연적하를 보자 부담스러운지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연적하는 쥐새끼처럼 숨는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관심을 끊었다. 어차피 오늘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죄다 손볼 작정이었으니까.
무덤덤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풍연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오늘 왜 모였는지 알지? 간단히 말하겠다. 자신의 서열에 만족하는 사람은 내 왼쪽, 도전하고 싶은 사람은 오른쪽으로 서라.”
머뭇거리던 도적들이 좌우로 갈라섰다.
거의 대부분의 도적들은 풍연초의 좌측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간의 산행으로 연적하의 무위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심양각을 포함한 다섯 명의 도적들은 풍연초의 오른쪽으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굼뜬 그들의 행동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던 풍연초가 계속해서 말했다.
“나와 탁고명, 마형도, 허임달, 곡산청, 장소봉은 일곱째인 연적하와 의로 맺은 형제다.”
풍연초의 말에 한채연이 입술을 삐죽였다.
저건 단지 채주부터 서열 육 위까지 연적하를 이용해 먹기 위해 하는 말에 불과하다.
곁눈질로 연적하 쪽을 슬쩍 보니 속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 이해는 한다. 병들어 죽어 가는 그를 구해 준 게 채주와 부채주라니까. 생명의 은인이니 평생 모신다고 해도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 의형제고, 누군 식구라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하아! 몇 달만 빨리 입산했으면 내 이름도 저중에 있었을 텐데…….’
한채연의 입에서 미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봉산채가 계속되는 한, 저 일곱 명은 한 몸처럼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단지 몇 달 차이로 연적하의 옆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짜증 난다.
그러는 동안에도 풍연초의 말은 계속됐다.
“……그래서 우리는 일곱째인 연적하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 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를 꺾는 자가 오봉산채의 주인이 된다는 소리다.”
풍연초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좌측의 사람들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우측에 있는 다섯 명도 마찬가지였다.
이견이 없자 풍연초가 연적하에게 말했다.
“연 아우, 시작해라.”
“예.”
연적하는 짧게 답한 뒤에 마당 한복판으로 걸어 나갔다.
순간 심양각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한겨울임에도 연적하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건 본래 열이 많은 체질이거나 한서불침의 경지에 올랐다는 걸 의미한다.
‘저놈은 어느 쪽일까?’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나이를 생각하면 한서불침의 경지는 터무니없다.
슬쩍 무영신투 백교를 보니 그도 심란한 얼굴이다.
한순간 심양각과 백교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서로의 두툼한 털옷을 확인한 두 사람의 입술이 가볍게 뒤틀렸다.
한 갑자(60년)를 수련했어도 겨울에는 털옷이 정상이다.
역시 한서불침은 천외천이라는 칠파이문(소림사, 무당파, 화산파, 청성파, 전진파, 공동파, 점창파, 무극문, 의천문)의 문주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소리다.
잠시 후 연적하가 다섯이 모여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 신참들. 뭐해. 빨리 시작하지? 이러다가 해 지겠어.”
황요명의 눈썹이 실룩거렸다.
아까 자신이 한 말을 들은 게 틀림없다.
어린놈이 너무 당차게 나오니 은근히 마음이 쫄린다. 강호에는 어린아이와 노인과 여자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저도 모르게 고개가 백교와 심양각을 향해 돌아갔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이 순간에도 두 늙은이들은 남의 일인 양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이건 아무나 먼저 간을 보라는 뜻이다.
하지만 황요명은 먼저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십 대 남자를 앞으로 떠밀었다.
얼떨결에 먼저 나서게 된 천일보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난 천일보요. 맨손으로 하겠소? 도검을 들겠소?”
“그쪽이 맨손이면 나도 맨손. 날붙이를 들면 나도 그렇게 하고.”
연적하의 말에 천일보는 선심 쓰는 얼굴로 말했다.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니고, 무공의 고하를 보자고 하는 일이니 맨손으로 합시다.”
“그러든지.”
“…….”
어린 녀석의 말투가 상당히 싸가지 없지만 천일보는 따지지 않았다. 그의 서열이 더 높으니 설사 욕을 한다 해도 기분 나쁠 일은 아니다.
‘칼 잘 쓰는 놈으로 소문났다니까 칼만 못 들게 해도 성공한 거겠지?’
물론 자신도 주먹보다는 박도를 더 잘 쓴다.
그래도 상대의 소문이 신경 쓰여 웬만하면 칼싸움은 피하고 싶었다.
천일보는 삼재심법으로 십 년 정도 고련한 내력을 전신에 일 주천시켰다.
굳어 있던 근육이 조금 풀어지고, 사기는 더 고양됐다.
십 년 수련의 효과다.
천일보는 즉시 지면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뻑!
뼈와 뼈가 맞닿는 소리와 함께 천일보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털썩.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천일보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지켜보던 황요명은 한순간 숨조차 내뱉지 못했다.
하필 천일보의 상체에 가려 연적하의 움직임을 놓쳤다.
그렇다고 해도 단 한 방에 천일보가 나가떨어지다니?
천일보가 자신보다 하수인 건 분명하지만, 솔직히 자신도 단 일격에 그를 때려눕힐 자신은 없다.
‘이거 일이 꼬이는 거 아냐?’
황요명은 저도 모르게 심양각과 백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그러는 동안 좌측에 있던 산적들 중에 둘이 나와서 천일보를 질질 끌고 나갔다.
미친 듯 머리를 굴리던 황요명은 쭈뼛거리고 있는 염사웅을 발로 툭 찼다.
두 번째로 나가라는 뜻이다.
염사웅은 불만 가득한 눈으로 황요명을 힐끔거렸지만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아직 그와 싸워 본 적은 없지만 기세에서 눌린 탓이다.
오연하게 서 있던 연적하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주먹으로 할까? 연장으로 할까?”
대다수의 도적처럼 염사웅의 장기는 박도를 다루는 것이었다. 칼을 손에 쥔 이후로 맨손으로 싸운 적이 거의 없어서다.
그러나 염사웅은 차마 칼로 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맨손도 저렇게 무지막지한데 칼로 하자고?
염사웅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오. 맨손으로 합시다.”
“들어와.”
그러나 염사웅은 천일보처럼 마구잡이로 덤비지 않았다.
내력을 끌어 올린 뒤 연적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그와 반대로 연적하는 두 팔을 길게 늘어트리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연적하가 고개도 돌리지 않자 염사웅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다.
움직이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을 따라 머리 정도는 돌려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어린놈의 새끼가!’
연적하의 자그마한 뒤통수를 노려보던 염사웅은 숨을 멈추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빠각!
염사웅의 건장한 신체가 허공에 떴다가 철푸덕 하고 떨어져 내렸다.
황요명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염사웅이 뒤로 돌아간 덕분에 이번에는 연적하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연적하의 움직임에 특별한 수법은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돌아서면서 주먹을 내뻗었는데 그 끝에 염사웅의 턱이 걸린 것뿐이다.
‘멍청한 새끼.’
아무리 주먹질에 서툴다 해도 그렇지. 제 턱주가리를 왜 상대의 주먹에 갖다 바친단 말인가?
연적하가 이긴 것은 염사웅보다 조금 더 빨랐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놈의 주먹질 한 방에 염사웅이 뻗은 건 조금 의외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내력이 깊은 모양이군.’
황요명은 나름 연적하를 상대할 방법을 찾았다.
왼편에 있던 도적들이 염사웅을 끌어내자 황요명은 망설임 없이 뚜벅뚜벅 나갔다. 어차피 자신의 차례인데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호기롭게 말했다.
“연장으로 합시다.”
연적하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순간 황요명은 ‘아차’ 싶었다.
맨손보다는 칼이 더 빠르기 때문에 그걸 선택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말을 바꾸기도 전에 도적들 중 하나가 연적하에게 박도를 건넸다.
‘괜찮아, 괜찮아. 칼 밥은 내가 더 먹었다고.’
자신은 인근 다섯 개 현(縣)에서 독심낭인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다. 그에 비하자면 상대는 변변한 별호조차 없는 강호초출.
황요명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박도를 뽑았다.
“칼에는 눈이 없으니 상한다 해도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원래는 ‘마라’라고 단호하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너무도 담담한 연적하의 태도에 주눅이 들어 조금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지. 내가 아직 서툴러서 어디 한 군데 잘릴 수도 있어. 서로 원망하지 말자고.”
그 말에 황요명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고수와 싸울 때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부상의 정도다.
그런 이유로 싸우기 전에 상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부끄럽지만 하오체로 급히 말을 바꾼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서툴러서 잘릴 수가 있다고?
소문에 의하면 고수가 분명한데,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멍하니 서 있던 황요명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온갖 잡념을 떨쳐 냈다.
‘헐! 어린놈의 잔꾀에 속아 마음이 흐트러질 뻔했군. 죽여 버리겠다.’
마음을 다잡은 황요명의 눈에서 살기가 번득였다.
독심낭인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낭인으로 떠돌던 시절에 살인을 밥 먹듯 했다. 그중에는 연적하 또래의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황요명은 처음부터 살수를 쓰기로 했다.
상대가 비무라고 착각해서 느슨해진 틈을 노릴 생각이다.
‘처음부터 심사도법으로 간다.’
위에서 내리찍고, 수평으로 베고, 대각으로 가르는 심사도법은 천하 모든 도법의 정수를 한데 모은 것이다.
황요명은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도를 벼락처럼 들어 올렸다. 남들이 보면 태산압정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심사도법의 내려찍기는 그보다 훨씬 오묘하다.
쉬이익.
날 선 박도가 예고도 없이 번개처럼 연적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너무도 위험해 보이는 수법에 몇몇 마음 약한 도적들의 입에서 ‘헉!’ 하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연적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한채연의 경우 ‘악!’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