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72
172회. 산채에서 떠나 주면 돼. 어때 쉽지?
식사를 마친 연적하는 객잔 주인을 불러 ‘황산까지 길 안내해 줄 사람을 구해 달라’ 부탁했다.
연적하가 마을 주민 하나를 앞세우고 무하객잔을 나선 건 신시(오후 3시-오후 5시) 무렵이었다.
길 안내를 하는 덕진의 입에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고작 반 시진(1시간) 거리의 황산까지 안내하는 데 은자 한 냥이라니! 그것도 황산이 보이는 지점까지만 함께 가 주면 된단다.
모처럼의 횡재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연적하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소협, 그런데 황산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손봐 줄 사람이 있어서요.”
“…….”
뜻밖의 대답에 덕진은 잠시 침묵했다.
황산은 대별산채라는 무시무시한 녹림이 장악한 곳이다.
‘설마 녹림과 싸우러 가는 건 아니겠지?’
대별산채는 나라에서도 토벌을 포기한 곳으로 유명하다.
자신도 ‘황산이 보이는 곳까지만 가면 된다’고 해서 자원했다.
신현에서 대별산채라는 이름은 공포 그 자체였으니까.
서하촌이 그나마 발전한 것은 옆 마을에 백호소(百戶所, 백 명 단위의 지방군 주둔지)가 있어서다. 그게 아니었다면 서하촌도 대별산채의 손에 약탈당했을 것이다.
한동안 묵묵히 걷던 덕진이 말했다.
“혹시 대별산채로 가시는 거라면 안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요?”
순간 덕진은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왜요라니?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이름만 들어도 천하의 도적들이 벌벌 떤다는 낭병들도 포기한 대별산채다.
“나랏님도 토벌을 포기한 곳이 대별산채 아닙니까? 웬일인지 요즘은 더 사나워져서 황산 인근에는 가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그 사나워지게 만든 원흉을 내쫓으러 가는 겁니다.”
“아, 예…….”
덕진은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생긴 건 멀쩡한데 허풍이 심한 사람이로군.’
무슨 일로 황산을 찾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돈만 받으면 된다. 설사 그가 황산에서 칼에 맞아 죽더라도 자신이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그때부터 덕진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갔다.
한 식경(약 30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저 멀리 황산이 나타났다.
덕진은 황산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멈춰 섰다.
이 정도 거리라면 소경이 아닌 다음에야 찾아가지 못할 리가 없다.
“소협, 요 앞에 보이는 산이 황산입니다. 저는 심장이 떨려서 더는 못 가겠습니다.”
사내의 말에 연적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습니다.”
“예, 예. 조심하시고요.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황산은 돌아가는 게 좋을 겁니다.”
“황산에 볼일이 있다니까요.”
“아, 예, 그럼 저는 이만.”
덕진은 행여나 그가 다른 소리를 할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다.
홀로 남은 연적하는 감개무량한 눈으로 황산을 바라보았다.
“반갑다, 황산아. 네가 여기에 있었구나.”
이렇게 가깝고 쉬운 길을 왜 며칠이나 헤매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일단 그는 돌아갈 때를 대비해 열심히 주변 지형을 기억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이 붙자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구천노도 심통은 한걱정했지만, 기이하게도 십두마병은 두렵지 않았다.
파천마군이나 의천검존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 무섭다.
하지만 십두마병과 괴물들은 처리 과정이 번거로울 뿐, 딱히 위험한 느낌은 없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괴물들의 능력은 거의 십대고수에 가까운데 왜 긴장이 되지 않는지.
어쩌면 구천구검이라는 확실한 대처법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산중이다.
‘흠! 이 정도 들어오면 산적들이 나타나서 주절주절 떠들어야 하는데?’
산적들의 안내를 받아 산채로 들어가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결국 연적하는 산채가 나올 때까지 천천히 올라가 보기로 했다.
***
황산.
대별산채.
추혼혈도 이무진의 측근이자 부채주인 귀영살도 연파강이 허겁지겁 마당을 가로질렀다.
병든 닭처럼 전각 앞에서 졸고 있던 이무진이 흠칫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채주님! 놈이! 놈이 산채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연적하가 오고 있다고?”
이무진의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쏟아져 나왔다.
자그마치 사흘 밤낮을 기다리게 한 놈이니 그럴 법도 하다.
흩어져 있던 십두마병들이 이무진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도 연파강이 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수적 우위에 있건만 십두마병들의 낯빛은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그건 단지 지난 사흘간의 피로 때문만은 아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연적하인데 막상 그가 왔다고 하니 다들 불안한 얼굴들이다.
독심귀랑 양소란과 혈검, 옥불이 특히나 심했다.
연적하의 무위를 직접 경험한 셋은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공포는 전염된다.
양소란과 혈검, 옥불이 내뿜는 불길한 기운은 이무진과 삼대신장들도 물들였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낀 사람은 이무진이다.
“귀랑, 우리가 너무 긴장하고 있는 거 아니오? 그래 봐야 놈은 혼자인데.”
양소란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뭔가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할 순간인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연적하와 곧 마주친다고 생각하자 피가 다리로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실제로 그녀의 얼굴은 눈에 띄게 핼쑥했다.
그녀의 모습에 이무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기를 진작시켜 보려고 말을 걸었는데 오히려 더 기괴해져 버렸다.
‘쯧! 양소란은 머리가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군.’
결국 이무진은 어깨에 힘을 주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겁먹은 개처럼 꼬리를 말고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는 무언의 시위다.
이무진이 막 마당 중앙에 도착했을 때다.
마치 제집에 오듯 산채 정문으로 한 청년이 휘적휘적 걸어들어왔다.
이무진은 처음에 망을 보던 수하인 줄 알았다.
큰 싸움을 앞둔 사람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청년의 얼굴이 태연자약해서다.
반신반의하던 이무진이 무심코 물었다.
“누구냐?”
“나? 연적하. 그러는 당신은 누구?”
“…….”
순간 이무진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네가 바로 연적하라는 개후레자식이로구나! 나는 대별산채의 주인 이무진이다. 지난 사흘 동안 무엇을 했기에 이제야 나타난 것이냐!”
“이봐. 반겨 줘서 기쁘기는 한데, 우리가 언제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했어? 왜 난리야?”
두 사람이 말싸움을 하는 동안 다른 십두마병들은 연적하를 포위했다.
연적하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야! 무슨 구더기처럼 소리 없이 꾸물꾸물 움직여? 오늘 내 손에 죽고 싶다 이거지?”
그러자 이무진이 냉소를 쳤다.
“흥! 어린놈이 담력 하나만큼은 뛰어나구나. 그 점만은 높이 칭찬해 주마. 허나 십두마병들이 나섰으니 오늘 이곳에 뼈를 묻게 될 것이다.”
“이봐 이봐. 누구 뼈가 묻히게 될지는 좀 두고 보자고. 그런데 이 채주, 내가 대별산채에 찾아온 이유는 알고 있어?”
“네놈이 파천마군의 명으로 유명교에 귀의한 채주들을 핍박하고 있다는 것이라면,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었네. 살길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이 채주가 산채에서 떠나 주면 돼. 어때 쉽지?”
“그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들어 볼 테냐?”
“뭔데?”
“네놈이 이 자리에서 죽으면 된다.”
말과 함께 이무진이 장도를 뽑아 들었다.
잔뜩 독이 올라 있던 여섯 명의 십두마병들도 각자의 병장기를 꺼냈다.
연적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랜만에 좋게 말로 풀어 보려 했더니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이윽고 일곱의 십두마병과 연적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십두마병들은 칠파이문의 장로나 장문인 정도의 무위를 지녔다.
그런 일곱 고수의 공격이 한 사람에게 쏟아지니 그 위력은 경천동지라 할 만했다.
채채채챙. 꽈광.
귀가 따가울 정도로 날카로운 쇳소리 속에 어쩌다 한두 번씩 폭발음이 울렸다.
검기와 장풍이 만나서 나는 소리였다.
이무진의 도가 떨어져 나가면 바로 양소란과 혈검의 검이 뒤를 이었다.
무쌍귀와 무영귀도 한 몸처럼 도검을 썼다.
권장의 고수인 옥불과 음산귀는 그 림자처럼 연적하 주위를 빙빙 돌다가 장풍을 날렸다.
십두마병들은 합공을 수련한 듯 손발이 잘 맞았다.
그들은 마치 한 가족처럼 서로를 도우며 싸웠다.
죽으면 괴물이 된다는 공포심에 어떻게든 서로를 지켜 주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씩 연적하는 수세에 몰렸다.
파팟.
한순간 양소란과 혈검의 검이 연적하의 양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헉!’
연적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양쪽 어깨가 화끈거리는 걸 보니 가볍게 베인 모양이다.
십두마병 개개인의 무위는 특별하지 않았지만 한곳에 모이니 꽤나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여전히 두렵지 않았다.
그것 또한 기이한 일이다.
양소란과 혈검이 물러나자마자, 옥불과 음산귀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벌써 두 번째 반복되는 공격 형태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 연적하가 좌우로 한 차례씩 검을 휘둘렀다.
치릿. 치릿.
시퍼런 검기가 채찍처럼 옥불과 음산귀의 몸을 감았다.
대경실색한 옥불은 두 손바닥을 밖으로 뒤집었다.
그러자 강맹한 장풍이 검기를 때렸다.
퍼엉.
장풍과 검기가 흩어지는 틈에 옥불은 뒤로 몸을 빼냈다.
그러나 음산귀의 경우 대처가 미흡했다.
그 역시 본능적으로 손에 내력을 담아 검기를 후려쳤지만, 검기는 흩어지지 않았다.
서걱.
검기는 음산귀의 손목을 자르고 연이어 가슴까지 관통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누가 돕고 말고 할 틈도 없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크윽!”
음산귀가 가슴을 움켜잡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여섯 명의 십두마병이 흠칫 놀란 순간, 이번에는 연적하가 옥불을 덮쳤다.
하늘로 치켜든 검이 벼락처럼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구천세법 이 식 용무천상이 시전되자 검기의 소용돌이가 옥불에게 몰아쳐 갔다.
쉬이이익-.
사실 음산귀가 치명상을 입는 순간 옥불은 조금 방심했다.
그간 연적하가 십두마병들을 한 사람씩 처리하는 걸 본 까닭이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놈은 죽어 가는 음산귀가 아닌 자신을 노렸다.
‘이런 미친!’
옥불은 미친 듯 쌍장을 휘둘러 검기를 막았다.
꽈르르릉.
검기와 장풍이 마주치자 우렛소리가 났다.
겨우 검기를 해소한 옥불의 눈이 커졌다.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쇄도해 오던 연적하가 보이지 않아서다.
옥불은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막 뒷걸음질 치려고 할 때다.
“안 돼!”
양소란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왜?’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옥불의 머리 위로 검이 떨어져 내렸다.
옥불의 머리가 잘 익은 수박처럼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연적하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가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며 옥불의 머리를 가르는 순간, 유령처럼 접근한 무영귀의 검이 연적하의 허리를 베고 지나간 것이다.
말 그대로 피가 튀는 참혹한 혈전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연적하의 표정은 담담해 보였다.
양쪽 어깨와 허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위기에 몰린 얼굴이 아니다.
심지어 곧 괴물들이 튀어나올 상황임에도 그의 눈은 다른 십두마병들을 좇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