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74
174회. 벽사검이 필요한 시대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한 시진(2시간)을 넘겼음에도 싸움은 이제 막 시작한 것처럼 격렬했다.
어찌나 빠른지 연적하와 마물들 사이의 공방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것은 연적하였다.
지능을 가진 마물들의 연환 공격이 점점 정교해져 갔기 때문이다.
연적하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아직은 몸이 알아서 반응하고 있지만 피로가 누적되면 그것도 장담하기 어렵다.
‘제길! 너무 많이 풀어놨다.’
연적하는 자신의 안일함을 원망했다.
마물들의 습성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을 크게 벌였다.
원수를 향한 마물의 ‘집착’과 ‘지능’이 만들어 낸 최악의 결과였다.
솔직히 마물 하나를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마물들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내야 한다.
그건 그의 입장에서는 동귀어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우웅.
화염마인의 손바닥이 지면을 쓸며 다가왔다.
이제 막 일각마인들의 손톱을 걷어 낸 연적하는 급히 옆으로 피했다.
주먹질이 빗나가자 화염마인의 입이 벌어졌다.
화르르륵!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연적하는 급히 허공으로 치솟아 화염을 피했다.
기다렸다는 듯 좌우측에서 일각마인들의 손톱이 날아들었다.
채챙.
두 개를 쳐 내자 이번에는 화염마인의 손이 발을 노리고 올라왔다.
연적하는 구룡번신의 수법으로 공중에서 자리를 바꾸었다.
콰득.
화염마인의 주먹이 허공을 움켜잡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연적하의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귓불을 타고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헉! 헉!”
마침내 연적하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기랄!”
그의 입에서 저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 잠깐 마물들의 시선을 잡아 둔다면 시원하게 싸워 볼 텐데!
이럴 때는 구천노도 심통의 부재가 아쉽다.
물론 그가 있었다면 무쌍귀처럼 마물 손에 바로 작살이 났겠지만.
***
세 명의 노도사가 바람처럼 숲을 가르며 달려갔다.
추마팔괘판의 바늘이 가리키는 대로 대륙을 떠돌아다니던 곤륜삼선들이다.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달리던 첫째 태을 선인이 물었다.
“사제, 아직도 바늘이 진동하고 있느냐?”
추마팔괘판을 들고 있던 셋째 태령 선인이 흥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주 펄떡거립니다. 사람들이 말하던 그 마물이 나타난 걸까요?”
“가 보면 알겠지. 누가 곤륜의 법보를 움직이게 만들었는지 봤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바늘이 떨린 적은 없습니다. 제 느낌에 오늘은 태무 사형의 벽사검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태령 선인의 말에 둘째 태무 선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천하를 위해서라면 벽사검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게 좋다. 벽사검이 필요한 시대라니 실로 끔찍하지 않으냐.”
태을 선인과 태령 선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소리다.
벽사검은 마귀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니 쓸 일이 없는 게 축복이다.
그때였다.
태령 선인의 손에 들려 있던 추마팔괘판이 진동했다.
드드드드-.
“사형! 추마팔괘판이…….”
태을 선인과 태무 선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추마팔괘판이 떨고 있다니?
단지 바늘만 움직이는 게 아니었나?
지금까지 그런 적도 없지만, 그런 현상에 대한 말도 들은 바가 없다.
태을 선인이 공력을 끌어 올렸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에서 사달이 난 것 같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두르자!”
곧이어 세 선인은 빛살처럼 석양에 불타는 산으로 날아갔다.
***
휘이잉- 휘잉-.
반월형 강기가 쌍으로 날아왔다.
연적하가 검을 휘둘러 강기를 부수자, 머리 위로 거대한 두 개의 주먹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바윗덩어리 같은 주먹을 피했다.
쿠웅.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들썩거렸다.
순간 독이 오른 연적하가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오냐! 나도 더는 못 참겠다!”
연적하는 일단 한 놈이라도 처리할 생각이었다.
다소간의 피해를 입더라도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잔뜩 화가 나서 그런지 ‘달아난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없었다.
연적하는 검에 구천기를 담아 화염마인의 팔뚝을 힘껏 내리쳤다.
카앙.
정으로 바위를 찍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크아아!”
고통스러운 괴성과 함께 화염마인이 미친 듯 불을 뿜어 댔다.
화르륵. 화륵.
“이크!”
필살의 각오와 달리 연적하는 불길을 피해 이리저리 달아났다.
그런 그의 몸으로 일각마인들의 손톱이 날아들었다.
쏟아지는 화염을 정신없이 피하다 보니 어느덧 안마당의 중앙이다.
마물들이 품(品)자 형태로 연적하를 에워쌌다.
연적하가 비장한 눈으로 정면에 석탑처럼 버티고 선 화염마인을 노려보았다.
“너부터 죽여 주마! 차핫!”
힘찬 기합과 함께 연적하의 몸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화염마인의 입에서 불이 쏟아져 나왔다.
화르르륵!
이전 같았으면 피했을 일이지만 연적하는 그냥 정면 승부를 선택했다.
검 끝을 앞세우고 돌진한 것이다.
구천구검 삼 식 풍천소축(風天小畜)이 펼쳐졌다.
검 끝에 쌓인 바람이 태풍처럼 앞으로 날아가 화염을 밀어냈다.
쿠쿠쿠쿠-.
그러나 그걸 보고만 있을 일각마인들이 아니다.
일각마인들은 바람처럼 달려와 연적하의 등과 옆구리로 날선 손톱을 휘둘렀다.
쉬익. 쉭.
순간 연적하는 이형환위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빠르게 뒤로 이동했다.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무쌍귀에게 사용한 수법을 다시 써먹은 것이다.
그러나 일각마인들의 신법은 무쌍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각마인들은 자리에서 벗어났다.
퍼엉!
방금까지 연적하가 서 있던 지면은 이내 불바다가 되었다.
싸움은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사형, 저게 뭡니까?”
태령 선인이 추마팔괘판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키가 일 장(약 3미터)이 넘는 괴물과 손에 낫이 달린 생물이라니?
태을 선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허어! 현세에 마물이 나타나다니. 정녕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말인가!”
장내를 살펴보던 태무 선인은 묵묵히 등에 매고 다니던 커다란 목갑을 풀었다.
곧이어 삼 척 길이의 고풍스러운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곤륜파의 보물이자 법보인 벽사검이다.
벽사검을 쥔 태무 선인이 앞장서자 태을 선인과 태령 선인이 그 뒤를 따랐다.
“소형제! 우리가 돕겠네.”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연적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누군가 싶어 급히 돌아보니 신선 같은 풍모의 세 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손이 부족했는데 반가움을 넘어서 감동이 밀려왔다.
“저 화염마인의 입에서 나오는 불을 조심하세요! 닿은 것을 다 태워야 사라지는 마염(魔炎)입니다! 그리고 일각마인들의 손톱은 강철보다 단단합니다!”
“알겠네!”
대답과 함께 태무 선인은 눈앞에 보이는 뿔이 난 마물을 향해 달려갔다.
일각마인은 뒤쪽에서 섬뜩한 뭔가가 다가오자 급히 돌아보았다.
‘악의(惡意)로 가득한 검’을 앞세우고 인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원수’와 ‘악의로 가득한 검’ 사이에서 갈등하던 일각마인은 결국 가까운 ‘악의’를 선택했다.
일각마인 하나가 떨어져 나가자 연적하는 정면의 화염마인을 노려보았다.
“너 이제 죽었어.”
말과 함께 연적하가 정면으로 돌진했다.
“캬아아아!”
괴성과 함께 화염마인의 입에서 불이 쏟아져 나왔다.
연적하는 이번에도 풍천소축의 수법으로 화염을 밀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남아 있던 일각마인이 연적하에게 달라붙었다.
손톱이 허리로 날아오자 연적하는 검끝을 돌렸다.
가각.
손톱은 막았지만, 대신에 화염 쏟아져 내렸다.
화르륵-.
순간 일각마인이 바람처럼 뒤로 몸을 뺐다.
그 뒤를 그림자처럼 연적하가 따라붙었다.
이전 같았으면 다른 일각마인이 연적하의 뒤를 노렸을 것이다.
몸에 익은 합공이 일각마인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일각마인은 자유로워진 연적하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마침내 연적하가 그토록 바라던 일대일의 상황이 된 것이다.
연적하를 발견한 일각마인이 손톱을 휘둘렀다.
채챙.
단숨에 손톱을 쳐 낸 연적하의 검 끝이 나비처럼 부드럽게 전진했다.
구천구검 이 식 행지무강이었다.
당황한 일각마인이 번개처럼 손을 휘저었지만 행지무강에 닿지 않았다.
푸욱.
검 끝이 일각마인의 심장에 박혔다.
곧이어 ‘퍼억’ 소리와 함께 검기가 가슴을 관통해 등 뒤로 뻗어 나갔다.
부르르 떨던 일각마인은 한순간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연적하의 입에서 환희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싸!”
무려 한 시진 만의 쾌거인지라 어린아이처럼 좋아한 것이다.
한편 태무 선인과 일각마인의 싸움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태무 선인의 경우 곤륜파의 전대 고수로 검술이 이미 화경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런 그의 손에 벽사검이라는 희대의 법보가 들려 있으니 일각마인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벽사검이 목을 자르자 일각마인은 푸스스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일각마인을 처리하고 막 돌아선 태무 선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앳된 얼굴의 청년이 거대한 마물의 정수리에 검을 박아 넣고 있었다.
곤륜삼선이 마물 하나를 처리하는 동안 청년은 둘이나 없앤 것이다.
‘저 검도 법보인가?’
설사 그의 검이 벽사검과 같은 법보라 해도 그 속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태무 선인을 돕던 태을 선인과 태령 선인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들이다.
자신의 병기를 수습한 곤륜삼선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청년에게 다가갔다.
태을 선인이 먼저 소개를 했다.
“허허. 반갑소. 나는 곤륜파의 태을 선인이라 하오. 이쪽은 내 사제들인 태무 선인, 태령 선인이고.”
“아! 그러시군요. 저는 연적하라고 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세 분이 아니었다면 저 마물들과 밤을 새울 뻔했습니다.”
“혹시 소협이 녹림의 총순찰이라는 그 연적하시오?”
“예.”
연적하의 대답에 곤륜삼선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태령 선인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저 마물들은 무엇이오? 우리는 곤륜산에서부터 마기를 쫓아온 사람들이라오.”
“와아! 그 먼 곳에서도 마기가 느껴지던가요?”
연적하가 놀라자 태령 선인이 웃으며 추마팔괘판을 꺼내 보였다.
“우리가 직접 마기를 느낀 건 아니오. 이 법보의 이름은 추마팔괘판인데, 이 팔괘판의 바늘이 마귀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준다오.”
“헛! 정말 신기한 물건이네요?”
연적하의 눈은 추마팔괘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그를 위해 태령 선인은 곤륜산에서 이곳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간단히 설명했다.
“……이 산 아래에서 갑자기 추마팔괘판이 진동하기 시작했소. 그걸 보고 놀란 우리 세 사형제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렸지 뭐요.”
“아! 그러셨군요.”
연적하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생각해 보니 자신이 길을 잃고 사흘간 헤매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싶다.
아까부터 연적하를 가만히 지켜보던 태무 선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물들은 어떻게 된 거요? 여기는 산채 같은데, 왜 이런 곳에 나타났는지, 혹 알고 있는 게 있소?”
“아, 그 마물들은 본래 유명교의 십두마병들이에요.”
“허! 정말 그게 유명교도들이란 말이오?”
연적하는 놀란 태무 선인에게 유명교와 정의맹과 녹림이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게 무림사의 커다란 비밀이라는 건 몰랐다. 물론 알았어도 입이 간지러워 술술 털어놓았을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