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03
203회. 누굴 죽이면 되나요?
도지휘사 여무양은 버럭 화를 냈지만 이미 속으로는 작전을 철회할 생각이었다.
금의위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강행할 정도로 원한이 없으니 당연하다.
“알았으니 그만 가 보게.”
“감사합니다. 도사 대인.”
금의위 남진무사 동유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고는 물러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참모가 들어와여 무양의 눈치를 살폈다.
“작전은 취소됐다. 원 정천호(원상초)에게 복귀하라 전하거라.”
“예.”
문밖에서 본의 아니게 엿들은 참모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
개봉 외곽에 모여 있던 천호소 병력은 정오가 되자 본래의 주둔지로 돌아갔다.
출병할 것처럼 요란을 떨다가 흐지부지 사라진 천호소 병력을 두고 여러 소문이 떠돌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다.
무림인들을 향한 군문의 경고와 도지휘사가 군문의 기강을 점검한 것이 그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천호소 병력이 사라짐으로 개봉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랬다.
정오 무렵.
안찰사 집무실.
갑작스러운 변고에 사연휘는 좌불안석했다.
연적하를 잡으러 가기로 되어 있던 천호소 병력이 작전을 취소하고 흩어진 까닭이다.
오늘이 바로 연적하가 예고한 사흘째 되는 날인지라 대책을 세울 시간도 없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던 천량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인, 금의위가 출병을 막았다니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한낱 녹림의 도적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말인가?”
“이미 금의위의 귀에까지 영식께서 한 일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금의위가 연 공자를 암중에 후원하는 것 같으니 서두르십시오. 대인에게 ‘사적인 일로 군문을 움직이려 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울 수도 있습니다.”
“자네는 정말 금의위와 연 공자 사이에 밀약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금의위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정사지간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녹림 총순찰을 멀리할 이유가 없지요.”
“유명교와 정의맹이 싸우는 와중에 녹림을 움직여 어부지리를 취하려 한다?”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금의위가 무엇을 얻겠다고 그 개싸움에 끼어든다는 말인가?”
“지휘사 모양의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하아! 갑자기 금의위가 끼어들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믿을 수가 없군.”
“지금은 대인과 연 공자의 관계가 좋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할 때입니다. 만약 금의위에서 대인이 계속 연 공자를 노릴 거라고 생각하면…….”
천량지는 말끝을 흐렸다.
그럼 금의위는 사연휘를 끌어내리려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사람들이 아니니까.
마침 사연휘에게는 사적으로 군문을 움직이려 했다는 이력이 있다.
언제라도 사연휘를 쳐 낼 수 있게 된 셈이다.
사연휘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 역시 천량지가 염려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연적하를 잡으면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다.
그런데 반나절 만에 이 모양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허! 나라 꼴이 말이 아니군. 안찰사가 도적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니.”
사연휘의 탄식에 천량지는 급히 문을 열고 나가 집무실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근처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온 천량지가 나직이 말했다.
“대인, 금의위에서 대인을 주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언행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천량지는 사연휘의 최측근인지라 그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가 잡혀가면 자신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끼기 때문이다.
“후후. 나를 걱정해 주는 건 자네밖에 없군.”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때가 때이니 여 대인도 돕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무림인들의 쟁투가 끝나면 금의위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무조건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송구합니다.”
“하아! 아들을 반병신으로 만든 도적에게 사죄하라니. 대들보에 목이라도 매달고 싶군.”
사연휘가 암울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안찰사 체면에 못 할 짓이었다.
사연휘는 점심도 거르고 집무실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러다 신시(오후 3시-오후 5시)가 되자 천량지를 불러들였다.
“호위를 최소한으로 해서 인원을 꾸려 보게.”
“예.”
천량지는 어디로 가시려느냐 묻지 않았다.
허허로운 사연휘의 얼굴만 봐도 목적지가 어디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천량지는 임사성을 비롯한 다섯 명의 무관들만 모아 호위를 구성했다.
그들 모두 무공이 뛰어남은 물론 천량지가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
연 공자에게 사과를 하러 가는 길이라 모두 자기 사람들로 채운 것이다.
그들이 화상촌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한산한 마을을 가로지르던 사연휘가 쓸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일찍 떨어지는구먼.”
“우리에게는 오히려 더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춥고 어두워서 오가는 사람이 적을수록 목격자도 적어질 터였다.
천량지의 말을 알아들은 사연휘가 피식 웃었다.
“자네는 참 긍정적인 사람이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두 사람이 동시에 멈칫했다.
저 멀리 객점이 보였던 것이다.
사연휘가 뒤따르던 임사성에게 눈짓을 보냈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간 임사성이 객점에 먼저 들어갔다.
임사성은 금방 다시 나왔다.
“효자암에서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량지가 재빨리 나섰다.
“대인, 차라리 효자암에서 그를 만나는 것이 낫습니다. 이 시간이면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세.”
길을 아는 임사성이 앞장섰다.
숲길을 지나 초막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천량지가 무관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희는 이곳을 지키되 아무도 효자암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해라.”
“예.”
다섯 명의 무관이 나직이 답했다.
이윽고 사연휘와 천량지가 효자암을 향해 걸어갔다.
연적하는 여전히 바위 끝에 걸터앉아 황하만 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천량지는 잠시 머뭇거렸다.
안찰사의 앞에서 그에게 존대를 하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던 것이다.
“연 공자님, 안찰사 사 대인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제야 연적하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천지와 사연휘 앞으로 다가갔다.
천량지가 존대하자 사연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먼저 읍을 해 보였다.
“개봉부 안찰사 사연휘요.”
연적하는 그런 사연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밍숭맹숭한 표정이 마치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는 사람 같았다.
천량지는 사연휘의 체면을 위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뒤로 빠진 천량지가 멀뚱거리고 있는 녹담평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제야 녹담평은 찔끔 놀라 얼른 초막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와 풀때기로 엮은 초막인지라 숨소리를 죽이니 바깥의 동정이 눈에 보이듯 느껴진다.
‘하여간 관원들이란!’
뭐든지 눈 가리고 아웅이다.
그들은 꿩처럼 눈만 가리면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투덜거리면서도 녹담평은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사연휘가 연적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뭐라 말하려는 순간이다.
“안찰사 나리는 어떤 아버지인가요?”
예상 밖의 질문에 당황한 사연휘는 상대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들이 한 짓을 질책할 줄 알았는데 어떤 아버지냐니?
이건 혹시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미끼일까?
“그건 왜 묻는 거요?”
“그냥 궁금해서요. 어떤 아버지이기에 그런 이상한 놈이 나왔나 싶어서.”
“내 아들이 한 짓은 들었소. 그 녀석을 데리고 오려 했으나, 부상이 심해 집에 남겨 두었소. 못난 자식을 대신해 사과하리다.”
작정하고 온 사연휘는 확실하게 자세를 낮췄다.
한 번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을 두 번 세 번 하기 싫어서다.
“안찰사님에게 딱히 유감은 없어요. 천량지가 함부로 입을 놀리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니까. 물론 안찰사님이 오지 않으면 찾아가기는 했을 거예요. 난 내가 한 말은 잘 지키는 사람이라서.”
“나도 들었소. 나를 위하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그렇게 말했을 것이오.”
“예,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소리로 알아들을게요. 그건 그렇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안찰사님은 어떤 아버지인가요?”
“나는 다른 아버지들과 같소.”
사연휘로서는 딱히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상대방이 던진 질문의 의도를 모르는 터라 최대한 애매하게 나갔다.
“다시 물을게요. 안찰사님은 그 못난 아들을 위해 대신 죽어 줄 수 있나요?”
연적하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사연휘는 금방이라도 온몸이 난자 당할 것 같은 느낌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녹림은 상대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죽여요. 그런데 나리의 아들은 내 친구의 몸에 손을 댔더라고요. 그건 나를 개무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죠.”
“용서해 주시오.”
연적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심 노인은 뼈를 부러뜨린 것으로 만족한 모양인데 나는 달라요. 누군가 죽여야 속이 풀릴 것 같아요. 그래서 묻는 거예요. 말해 봐요. 아들을 대신해 죽어 줄 수 있어요?”
말과 함께 연적하가 검결지를 까딱거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한 자루 검이 둥둥 날아와 사연휘의 목에 닿았다.
곧이어 끔찍한 살기가 사연휘의 몸을 휘감았다.
그건 일개 문관(文官)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순간 공포에 잠식당한 사연휘는 이상을 잃고 횡설수설했다.
“제, 제발 살려 주시오. 천 부사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소. 그가 자꾸 송구하다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이렇게 될 줄 몰랐소. 정말이오.”
이건 아니다 싶었던지 연적하가 검을 살짝 뒤로 빼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과 나리 중에 누굴 죽이면 되나요?”
불현듯 정신을 차린 사연휘는 그제야 질문의 요지를 알아차렸다.
그는 정말로 한 사람의 목숨을 원하고 있었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뒤죽박죽 엉클어진 감정은 그의 내부를 휘젓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영원 같은 찰나의 순간이 지나갔다.
멍하니 서 있던 사연휘가 푸석푸석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렇다면 나를 죽이시오.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순간 연적하가 검결지를 움직였다.
뒤로 물러난 검이 빛살처럼 날아가 가까운 암벽에 깊게 박혔다.
살 떨리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넋을 잃고 눈만 끔뻑이는 사연휘에게 연적하가 말했다.
“좋은 아버지네요.”
“……아니오. 나는 그저 그런 아버지에 불과하오.”
“내 말 믿어요. 오래전에 그저 그런 사람을 잠깐 본 적이 있는데, 안찰사님과는 달랐어요.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밖에 몰랐거든요.”
“아들을 용서해 주는 것이오?”
“용서는 사람이 아니라 저 하늘에 속한 거예요. 사람이 용서한다고 해서 죄업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은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에요. 힘이 있으면 복수하고, 없으면 스스로를 위해 용서한다고 하죠. 나는 안찰사님이 먼저 인사할 때 다 풀렸어요.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유감이 없다고.”
말을 마친 연적하는 휘적휘적 걸어가 어둠이 내려앉은 숲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