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02
202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개봉.
안찰사 부사 천량지는 개봉부로 돌아갔지만 바로 안찰사 사연휘를 찾아가지 않았다.
자신의 오지랖으로 일이 더 꼬여 버린 터라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창밖이 어둑어둑해지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찰사가 퇴청하기 전에 그를 찾아가서 오늘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다.
무거운 마음은 축 늘어진 그의 발걸음에서도 나타났다.
퇴청을 앞두고 활기찬 관원들 사이에서 오직 그의 얼굴만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그래, 화상촌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사연휘가 천량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침과 달리 어두운 그의 표정을 보니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다.
잠시 뜸을 들이던 천량지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객점 사람들을 만나 어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했습니다.”
“…….”
사연휘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강도가 누군지 알아 오라고 보냈는데 어째 주제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다.
천량지는 상관이 못마땅해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공법으로 나갔다.
솔직히 잔꾀를 써서 모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영식께서 객점 주인의 손녀를 희롱하다가, 급기야는 어탕에 머리카락을 넣은 뒤 음식이 더럽다고 시비를 걸었다고 합니다. 때마침 연 공자 일행이 들어오다가 그걸 보았고, 구천노도 심통이 영식에게 손을 쓴 것입니다.”
“내 아들이 강도를 당했는데 자네는 그걸 내 아들의 잘못인 것처럼 말하는구먼?”
“송구합니다. 심통이 과하게 손을 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사를 해 보니 먼저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영식이었습니다.”
“자네, 연 공자가 객점을 공동소유하는 걸 도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허면 목격자들은 모두 연 공자가 부리는 사람들이겠구먼. 내 말이 맞나?”
“……그렇습니다.”
천량지는 속이 쓰렸다.
사연휘가 왜 저렇게 말하는지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피해자인 내 아들의 증언은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들이 객점의 공동 주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리가 없다는 건 자네도 알 텐데.”
천량지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런 식으로 떼를 써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도 된다.
하지만 상대가 연적하라면 다르다.
그는 세속의 권력을 안중에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찾아와 사과하지 않으면 안찰사의 귓방망이를 날리겠다고 할 정도로.
“대인, 보통 때라면 영식의 증언만으로 사건을 종결시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 공자는 녹림의 이인자입니다. 그가 문제 삼는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말 겁니다.”
천량지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한꺼번에 모든 걸 밝혔다가는 안찰사가 반발할 것 같아서다.
뜻밖에도 천량지가 강하게 나오자 사연휘는 주춤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사연휘였다.
“백번 양보해서 녹림도의 말을 수용한다 해도 정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 여자 하나를 희롱했다고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다니? 대체 어떻게 희롱했기에? 말이나 들어 봄세.”
“오랜 시간 추근거리다가 종내는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고 합니다.”
“그래, 객점에서 일하는 여자 엉덩이를 건드린 게, 안찰사 아들의 양 팔과 이빨과 코를 부러뜨릴 정도로 중한 죄인가? 돈은 왜 빼앗아 가고?”
“…….”
그 점에 있어서는 천량지도 할 말이 없었다.
손속이 심한 거야 녹림 출신이니 그렇다 쳐도, 돈까지 빼앗은 건 그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 아들에게도 잘못이 있으니 더 들추지 말고 이대로 덮었으면 좋겠는가? 하기야 녹림도를 만나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
천량지가 슬쩍 사연휘의 안색을 살폈다.
정말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를 알고 싶어서다.
하지만 무덤덤한 표정만 봐서는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안찰사쯤 되는 위치면 뱃속에 구렁이가 백 마리는 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송구합니다.”
천량지는 조금 더 뜸을 들이기로 했다.
아직은 연적하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 줄 자신이 없었다.
그때 문득 남수경이 연적하의 친구라는 게 떠올랐다.
그 사실을 안찰사가 알면 분위기를 끌어 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대인, 영식께서 손을 댄 여자는 연 공자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심통이 과하게 행동한 것도 분명 그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그 여자에 대해 아는 바를 더 말해 보게.”
“객점 공동 주인인 남초결의 손녀로, 미색이 뛰어나 최근까지 삼보방의 소방주에게 괴롭힘당하기도 했다 합니다.”
“삼보방의 소방주가 그 대단한 인사를 괴롭혔다고?”
사연휘는 자신의 불편한 심사를 슬쩍 드러냈다.
자신이 이대로 끝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천량지도 알아야 했다.
“그때는 아직 연 공자와 교분을 맺기 전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괴롭힘이 계속되자 연 공자가 그를 잡아 곁에 두고 있는 중입니다.”
“잡아서 곁에 두다니 그건 무슨 소리인가?”
“객점 옆에서 연 공자를 대신해 삼년상을 치르는 중이라 합니다.”
“점입가경이로군.”
“연 공자와 심통은 일반인의 상식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히나 연 공자는…….”
천량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괜찮다 싶다가도 별일 아닌 것에서 마두로 돌변하니 그 본성을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모두가 내 아들이 연 공자의 친구에게 손을 대서 생긴 일이다?”
“송구합니다.”
“두 번이나 송구하다고 하는군.”
“…….”
사연휘의 음성에서 노기를 느낀 천량지는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천량지를 무섭게 노려보던 사연휘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억울해도 내가 참아야겠지? 어차피 개봉에 있는 관병을 끌고 가 봐야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 그렇지 않은가?”
다시 ‘송구합니다’라고 말하려던 천량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한고비를 넘긴 느낌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았다.
연 공자는 안찰사가 찾아와 사과하라고 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그의 귓가로 사연휘의 음성이 들려왔다.
“혼자 있고 싶으니 그만 나가 보게.”
“대인, 실은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뭔가? 머리가 다 아프군. 이번에는 좋은 이야기이기를 바라네.”
천량지는 자신이 연적하와 사연휘 사이를 중재하려다가 벌어진 일을 털어놓았다.
“……대인께서 사흘 안에 사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로 광오한 자로군. 마치 자신이 황제라도 되는 양 행동하다니.”
의외로 사연휘는 차분했다.
마치 고민하고 있던 뭔가를 홀가분하게 털어 버린 그런 얼굴이었다.
“자네가 그에게 사과를 권유한 것은 잘한 일이었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마땅하지.”
“…….”
천량지는 사연휘의 반응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충격적인 소리를 듣고도 오히려 자신을 칭찬하다니?
“중재를 하려다가 일을 망쳐 놓아 송구…….”
“허어! 송구하다는 말 좀 그만하게. 그거야말로 유일하게 자네가 잘한 일이니까.”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네. 관부를 너무 무르게 봤어.”
“설마…….”
천량지가 놀란 눈으로 사연휘를 보았다.
“내일 도지휘사를 만날 생각이네.”
“영식의 명예가 달린 일인데 괜찮겠습니까?”
사연휘가 피식 웃었다.
자고로 가재는 게 편이라고 했다.
도지휘사 여무양은 설사 사문정이 그 여자를 강간했다 해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그에게 빚을 지기는 할 테지만 말이다.
“고작 객점에서 일하는 여자 엉덩이를 만진 게 무슨 큰일이라고.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키운 건 연 공자야. 그는 자네 말대로 나를 찾아와 사과했어야 해.”
“…….”
도지휘사가 거론되자 천량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이 일은 자신의 손에서 떠났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그런 처지가 된 것이다.
“여 대인은 체면을 중시하는 분이라 들었네. 안찰사가 녹림도에게 망신당하는 걸 그냥 보고 있을 분이 아니야. 물론 언젠가 그분도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겠지.”
“여 대인께서 도와주신다면 연 공자와 심통도 별수 없을 것입니다.”
도지휘사가 움직일 수 있는 관군은 수천에 달한다.
녹림도를 토벌하겠다는 명분이면 황실에서도 반대하지 않을 테니 안찰사 뜻대로 마무리되리라.
***
이틀 후.
아침부터 정천호(정오품으로 천호소의 지휘관) 원상초가 바쁘게 뛰어 다녔다.
곧이어 개봉 외곽에 한 개 천호소 병력이 집결했다.
그 숫자만도 무려 천백여 명.
원상초는 들판 중앙에 설치한 임시 천막에서 도지휘사의 연락을 기다렸다.
갑작스러운 지시에 일단 군사들을 모았지만 출정하려면 정식 명령서가 있어야 했다.
갑작스러운 천호소의 움직임에 개봉이 한바탕 들썩거렸다.
무림인들 때문이라느니, 녹림을 토벌한다느니, 말들이 많았으나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거병 이유가 궁금해진 관리들은 도지휘사 여무양의 집무실로 몰려갔다.
그 정도로 초겨울에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병부의 각사외랑(각사난중을 보좌하는 정오품 관리)이 물러가자 참모 하나가 다시 들어왔다.
“도사(都司) 대인, 금의위의 남진 무사가 뵙기를 청합니다.”
“금의위까지? 천호소 하나를 빼서 녹림을 토벌한다는데 금의위가 왜? 이미 병부와 이야기도 끝냈는데.”
“그것까지는 소관도 모르겠습니다.”
“안으로 모시거라.”
비록 품계는 자신이 한참 높았지만 여무양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금의위는 고관들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금의위로 끌려간 고관의 십중팔구는 시체가 되어 나오곤 했으니까.
잠시 후 사십 대로 보이는 무관 하나가 들어왔다.
가슴에 붉은 용 한 마리가 수놓아진 누런색 철릭(저고리와 치마가 합쳐진 옷으로 치마에 주름이 있다)을 보니 금의위였다.
“금의위 개봉 지부의 남진무사 동유수라 합니다.”
“그래, 금의위에서 어쩐 일인가? 혹시 그대도 천호소의 소집 문제로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여무양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금의위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
아니, 속여서도 안 된다.
만에 하나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으니까.
삭탈관직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금의위에게 찍히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참수를 당할 수 있었다.
여무양은 병부에 했던 말과 달리 속내를 털어놓았다.
“……해서 녹림도들을 추포하려는 것일세. 녹림도들이 개봉 외곽에서 강도 짓을 일삼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안찰사의 장자까지 당했다고 하는데.”
“도사께서도 당금 무림의 상황을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하네만, 그것과 상관이 있는가? 아! 연적하라는 도적이 녹림의 총순찰이라지? 그래서? 녹림은 유명교나 정의맹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위에서는 정사파의 분쟁에 영향이 갈 만한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위에서’라는 말에 여무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황제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금의위 지휘사 모양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다.
“위라면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건가?”
“그건 소관도 말씀드리지 못함을 양해해 주십시오. 연적하의 추포는 훗날로 미루어 주셔야겠습니다.”
“아니, 개봉 인근에서 날뛰는 도적 하나가 천하대세에 무슨 영향을 미친다고? 그자가 안찰사의 장자를 반 병신으로 만들어 놓았다니까.”
“설사 안찰사의 아들을 죽였다 해도 지금은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제길!”
여무양이 답답한 마음에 탁자를 ‘쾅’ 하고 후려쳤다.
그러나 남진무사 동유수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지금 안찰사가 도적에게 머리를 숙이라고 하는 건가? 자기 아들을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도적에게?”
동유수가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