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28
228회.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시오
중년의 사내가 이우석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 처사, 정주부 안찰사 부사 호월비가 인사드리오. 영애의 계례라고 하기에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소. 혹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정성을 봐서 기쁘게 받아 주시구려.”
이윽고 호월비는 품 안에서 붉은 비취가 박힌 옥비녀를 꺼내 내밀었다.
얼떨결에 옥비녀를 받아 든 이우석이 황송한 얼굴로 답했다.
“어이쿠! 호 대인, 마음에 들지 않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옥비녀를 든 그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옥비녀에 조각된 봉황과 알알이 박힌 붉은 비취를 보니 보물이 따로 없다.
“영애께서 아주 고우십니다. 정해진 혼처가 없다면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는데…….”
호월비가 은근한 눈으로 이우석을 보았다.
그제야 이우석은 상대가 촌장이나 현령과는 완전히 무관한 사람임을 알았다.
만약 그쪽이었다면 ‘소개해 주고 싶다’는 말을 할 리가 없어서다.
“예, 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좋은 사람이 있다면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우석은 인사치레로 받아넘겼다.
자기 집안이 뭐라고 안찰사 부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중매를 선단 말인가.
호월비는 그 뒤로도 한참을 이우석에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당 한쪽에서 이우석과 호월비의 대화를 지켜보던 장소미가 이유화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가 아주 신이 났구나. 그런데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촌장님 얘기가 없는 걸 보면 그냥 우리집에 온 손님들 같은데.”
“그러게 말이에요. 혹시 연 오라버니의 지인들일까요?”
“연 조카?”
장소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그것대로 믿기 어려운 탓이다.
낭인으로 떠돌아다닌 청년에게 이런 인맥이 가능할까?
지금 좁은 방 안에는 안찰사, 현령은 물론, 도지휘사와 위지휘사라는 무장들까지 있다.
감히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 있는 관리들 숫자만 무려 삼십여 명.
그들은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덕분에 마당은 장터를 방불케 했다.
그때 현령이 데리고 온 찬모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마님. 음식 준비가 끝났으니 아무 때나 말씀해 주세요.”
“아, 네.”
장소미가 계면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며칠 전까지 남의 집 부엌 일을 거들었는데 마님 소리를 들으니 어색하기만 하다.
막 돌아서 가려는 찬모를 장소미가 급하게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네?”
“현령님과 함께 오셨잖아요?”
“네.”
“현령님이 여기를 어떻게 알고 오신 건지 혹시 아세요?”
“저는 부엌일만 해서 자세한 건 몰라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아, 그러시구나.”
“더 시키실 일이 없으면 저는 이만.”
여자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장소미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도깨비 장난도 아니고. 내용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 설마 꿈은 아니겠지?”
장소미가 두 딸을 유심히 살폈다.
어머니의 엉뚱한 행동에 이유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도 몇 번 꼬집어 봤는데 꿈이 아니더라고요. 지금까지 이런 꿈은 꾼 적도 없어요.”
“그건 그래. 이 비슷한 꿈도 꾼 적이 없으니까, 절대 꿈은 아닐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장소미는 슬쩍 자신의 얼굴을 꼬집었다.
장소미가 한창 딸들과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이우석이 다가왔다.
“옥비녀가 또 들어왔소. 뭘 사용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나같이 다 귀해 보여서.”
말과 함께 이우석이 처에게 방금 받은 옥비녀를 건넸다.
옥비녀를 받아 든 장소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머! 이 푸른 빛깔 좀 봐. 봉황은 또 어쩜 이렇게 섬세할까? 눈과 꼬리의 보석도 그렇고. 어휴! 이건 대체 누가 준 거예요?”
“조금 전에 안찰사 부사라는 사람에게 받았소.”
“좋기는 한데, 이런 거 막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혹시 당신 전에 누구 구해 준 적 있어요? 지나가다가 곤경에 처한 노인을 도와줬다거나.”
“전혀 없으니 기대하지 마시오.”
“그럼 정말 연 조카의 손님들인가?”
장소미가 굳게 닫혀 있는 방문을 힐끔 보았다.
조카라도 있으면 붙잡고 물어봤을 텐데 아직 그는 오지 않은 상태였다.
“연 공자가 계시냐는 소릴 하긴 하더라고.”
남편의 말에 장소미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누가요? 아니 당신은 그런 중요한 얘기를 왜 지금에야 하는 거예요?”
“방금 안찰사 부사라는 사람이 한 말이오. 나도 지금 들었으니 뭐라 하지 마시오.”
“그런데 공자라고 했어요? 요즘은 낭인을 공자라고 불러요?”
“그럴 리가. 낭인으로 떠도는 와중에도 따로 글공부를 했겠지.”
이우석이 은근 뿌듯한 얼굴로 어깨에 힘을 주었다.
어쩌면 학문이 뛰어나 고관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 걸 게다.
그가 한창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정사파 무림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좁던 마당은 사람들로 미어터질 지경이 됐다.
결국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놨던 좌우 측의 울타리가 밀려 넘어갔다.
길 쪽의 담장과 대문만 남기고 양 옆이 터진 모양새다.
좌측으로는 금검문과 창인문 사람들이, 우측으로는 사파인 삭풍회가 자리했다.
정주 지부의 모든 문파가 남경으로 갔던 건 아니다.
금검문의 경우 소문주인 유근식을 치료하느라 남경에 가지 않았다.
진설하의 창인문은 문주가 와병 중이라 자연스럽게 불참했다.
손님이 필요했던 연적하는 유근식과 진설하를 초대하고, 내친김에 삭풍회까지 방문했었다.
남궁세가도 부르고 싶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찾지 않았다.
그런 노력의 결과 예기치 않게 정사파가 한자리에 모이고 만 것이다.
숫자는 사파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칠리하촌에 집결한 정파와 달리 사파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삭풍회 회주 천수마검 한상이 불쾌한 눈으로 정파 쪽을 훑어보았다.
눈엣가시 같은 놈들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삭풍회 장로인 암영귀살 임태근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회주님. 놈들의 주력이 칠리하촌에 있을 때가 적기 아닙니까? 오늘 확 쓸어버릴까요?”
“아서라. 저들 중에 유근식과 진설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총순찰님께서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그분 성격이면 삭풍회는 사라지고도 남는다.”
“쩝, 그렇기는 합니다만 아쉬워서.”
“지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쓰러진 담이나 제대로 세워 놔라. 이참에 마당 좀 시원하게 넓혀 드리는 것도 좋겠지. 어차피 죄다 나랏님 땅일 테니까.”
“예.”
“그리고 형양현에 누가 있느냐?”
“작살방이 조금 규모가 됩니다.”
“쯧쯧! 이름하고는. 외숙님에게 필요한 건 없는지 자주 들여다보라고 해.”
한상은 마치 이우석이 자신의 외숙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방에 관병이 깔려 있었지만 삭풍회 고수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관병들이 쭈뼛쭈뼛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백호소(112명의 군사) 두세 개의 병력이라면 모를까?
현에서 나온 수십 명의 관병으로는 중과부적이니 당연하다.
이우석의 집으로 다가가던 석인중과 석양수는 기괴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작은 마당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기이하게도 조용했다.
사람들은 개미 떼처럼 분주하게 이리저리 오가는데 큰 소리 하나 없다.
있으나 마나 한 담장 너머로 기웃거리며 다가가던 그들 앞을 관병이 막아섰다.
“멈추시오. 당신들은 누구요?”
석인중이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저희는 석장촌의 주민입니다.”
석장촌의 주민이라는 말에 관병의 눈이 번득였다.
그러나 석씨 형제는 머리를 숙이느라 그걸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무슨 일로 왔느냐?”
관병의 말이 변했지만 석인중은 그러려니 하고 성실하게 답했다.
“촌장님께서 신부를 모셔 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오늘 이 댁의 장녀와 촌장님의 장남이 혼례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담장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던 관병들이 와락 달려들어 석씨 형제를 붙잡았다.
당황한 석인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현령께서 오늘 이 집에 찾아오는 석씨들을 모두 포박하라 하셨다. 백주에 여자를 납치해 강제로 혼인식을 치르려 한다지? 간덩이가 부은 놈들 같으니.”
“오, 오해십니다. 강제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관병들에게 팔이 잡힌 석씨 형제가 버둥거릴 때다.
이번에는 흑의에 수춘도를 찬 무인 다섯이 낭인 셋을 끌고 와 관병들 앞에 패대기쳤다.
“이놈들이 모두 자백했다. 신부를 잡아가기 위해 너희가 고용했다고. 미친놈들. 코딱지만 한 땅에서 왕 노릇 하는 촌장 놈이나, 그놈 명에 따라 불법 불의한 일을 뻔뻔하게 하는 놈들이나. 모두 끌고 가라.”
흑의의 사내가 명하자 관병들은 지체없이 낭인들과 석씨 형제를 포박했다.
뒤늦게 석씨 형제는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돌아온 건 사나운 몽둥이질뿐이었다.
***
형양현
양류객점.
연적하는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식사를 했다.
외숙집이 시장통처럼 변해 버린 줄도 모르고 여유 자적한 모습이다.
사실 경신술로 일각(15분)이면 가는 거리니 급할 것도 없었다.
그는 따뜻한 차로 입가심을 하고도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남진무사에게 따로 부탁하고, 얼굴 아는 사람들도 불렀으니 좀 와주겠지?’
연적하가 손님의 숫자를 대충 꼽아보고 있을 때다.
객점 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왔다.
실내를 가볍게 둘러보던 그는 이내 연적하의 자리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연적하가 고개를 슬쩍 틀어 불청객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오연한 얼굴로 서 있던 중년인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오. 그사이 안색이 훤한 걸 보니 경지가 더 깊어지신 모양이오?”
“음풍묘군?”
그는 십이마군 중 하나인 음풍묘군이었다.
“하하! 맞소. 오늘은 특별히 총채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소.”
“뭔데요?”
연적하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파천마군과는 거래가 다 끝났는데 왜 제자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모처럼 정주에 모였으니 정주제일루에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시오.”
“총채주님도 정주에 있어요?”
“그렇소.”
“당장은 힘들어요.”
“알고 있소. 외숙의 계례를 끝내고, 내일 저녁이면 시간이 되겠소?”
“와아! 아저씨, 내 뒷조사하고 다녀요?”
“그, 그럴 리가 있겠소. 삭풍회 회주에게 전해 들었을 뿐이오.”
“뭘 그렇게 놀라요? 그냥 해 본 말인데.”
“험, 험. 언제쯤이 좋으시오?”
“슬슬 개봉으로 돌아갈 때도 됐으니까 내일 저녁에 만나는 것으로 해요.”
“알겠소. 그렇게 전해 드리리다.”
용무를 마친 음풍묘군이 돌아서자 연적하가 불렀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시게?”
“일이 남았소?”
음풍묘군이 어정쩡한 자세로 연적하를 보았다.
연적하에게 손바닥이 뚫리고 난 이후로 그를 보면 괜히 불편했다.
“내 사촌 동생의 계례는 보고 가셔야지. 일생에 한 번 있는 일인데.”
“아! 이런 정신머리하고는. 두 분의 만남만 생각하다 깜빡했소. 그리고 이건 총채주님께서 주는 축하금이오.”
음풍묘군이 두 손으로 봉투를 내밀었다.
연적하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냉큼 받아 내용물을 확인했다.
무려 천 냥짜리 전표였다.
“고맙다고 전해 줘요. 그럼, 이제 가 보자고요.”
자리에서 일어난 연적하가 음풍묘군의 어깨를 툭 치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