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52
252회. 당신이 심양각인지 아닌지나 말해요.
흑수선 석려시.
이제 십팔 세인 그녀는 성숙한 몸매와 달리 앳된 얼굴의 소유자였다.
정사파의 고수들은 그녀를 ‘흑수선’이라 부른다.
그건 일 년 내내 흑의만 입고 다니는 그녀의 독특한 취향 탓이다.
사파의 생리상 아름다운 여자는 곤욕을 치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흑수선은 예외였다.
사파의 고수들은 그런 그녀를 ‘사파의 꽃’이라 부르며 추앙했다.
그녀가 녹림 총채주 파천마군 석무해의 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흑수선의 무위가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그렇다는 게 정설이다.
돌 되던 해에 석무해가 직접 벌모세수를 시켜 주었고, 다섯 살부터 암천수라진경을 익혀, 정사파를 불문하고 또래에 적수가 없었다.
그런 흑수선이다 보니 정사파 젊은이들에게는 ‘그림 속의 꽃’과도 같았다.
자연히 콧대도 높아 평소 그녀는 남자를 덜떨어진 생물쯤으로 여겼다.
그 ‘그림 속의 꽃’ 흑수선이 오늘은 달랐다.
연적하의 옆에 착 붙어 앉아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그뿐이 아니다.
자기 배도 잘 채우지 않는 입이 짧은 그녀가,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신 섬섬옥수로 반찬을 집어, 부지런히 연적하의 그릇에 담아 주기까지 했다.
막 생선 살을 발라서 연적하의 그릇에 올려 주던 흑수선이 고개를 홱 돌렸다.
절정에 이른 그녀의 귀에 청천도 팽각명의 말이 들린 것이다.
어쩌다가 저런 도적을 알게 됐냐느니 따위의 말은 연적하와 녹림에 대한 모욕이었다.
흑수선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하아! 구천노도. 저런 허튼소리를 우리 총순찰님께서 듣고 있어야 해요? 편안하게 식사해야 할 자리에서? 우리 총순찰님을 그렇게 모신 거예요?”
그녀의 타박에 구천노도 심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렸는데 억지로 참았다. 하지만 흑수선에게 저런 소리까지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움직이기 전에 슬쩍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연적하는 마치 남의 일인 양 음식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럴 경우 둘 중 하나다.
이 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귀찮으니 알아서 하라고 묵인하는 것이다.
연적하와 오래 생활한 심통은 직감적으로 후자임을 알았다.
순간 죽은 생선처럼 흐릿하던 심통의 눈에서 섬광이 번득였다.
그 눈빛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싸움을 부추긴 흑수선 마저도 흠칫했다.
“으흠, 그렇다고 죽이지는 마요.”
심통은 흑수선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팽각명 등이 있는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청천도 팽각명, 태을검 공산, 정명진검 운학, 천궁검 이우신, 팽천웅, 팽소미, 이우진, 이소민 등 후기지수 여덟이 나누던 이야기를 멈추고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천노도 심통이라 불리는 노인이 흉흉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소민은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다른 이들은 무덤덤했다.
강호인은 명성에 집착한다.
청년들이 목숨 걸고 천지맹에 가입한 것도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다.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유명교도를 죽이면 된다.
그게 어려울 때는?
이름난 고수를 박살 내면 그의 명성이 신진고수에게로 옮겨져 간다.
칠리하촌에서 정사파 간의 싸움이 빈번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팽각명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내가 제갈신지와 친한 것은 다들 아시지요?”
제갈신지는 천지맹 총사인 신기수사 제갈승운의 아들이다.
일곱 명의 후기지수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싶어 팽각명을 보았다.
“며칠 전에 제갈신지가 그러더군요. 하남성에 구밀복검 심양각이라고 말만 잘하는 도적이 있었는데, 최근에 그가 이름을 바꾸었다나.”
의천문주의 맏아들 천궁검 이우신은 내심 짚이는 게 있어 물었다.
“팽 소제, 구밀복검 심양각은 나도 들어 본 이름이네. 그런데 그가 무엇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건가?”
“심양각은 유엽도를 쓰는 자인데, 도갑이 특이하게 붉은 장미목이라 합니다. 저기 구천노도 심통이 가지고 다니는 것과 똑같이요. 심지어 얼굴도 같다고 하니 그가 심양각이 아니겠습니까?
“…….”
순간 일곱 명의 시선이 심통에게로 향했다.
후기지수들의 탁자 가까이에 온 심통은 계속해 보라는 듯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팽각명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 말만 번드르르한 심양각은 사실 현급 고수보다 조금 나은 정도랍니다. 그런 그가 십두마병을 죽였다니 이거 참 믿기도 그렇고, 안 믿기도 그렇고. 재밌지 않습니까?”
그러자 전진파 제자 공산이 화답하듯 말했다.
“나도 그가 십두마병을 죽였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긴 했습니다. 만약 그가 심양각이라면 다른 것들도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른 것?”
팽각명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는 공산이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십쇼. 이제 스물한 살인 연적하가 천하십대고수들도 힘겨워하는 십두마병을 척살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가만 보면 그 소문이 죄다 구천노도 심통과 관계되었으니…….”
“모두가 거짓이다?”
팽각명의 떠보기에 공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번 양보해 그들이 법보를 가지고 있다 해도, 소문은 꽤나 과장된 것 같습니다. 아닙니까?”
공산이 일곱 명의 후기지수들을 둘러보았다.
이소민과 그녀의 오라비들인 이우신, 이우진을 제외하고는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흐흐흐.”
심통의 입에서 음침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만약 연적하를 만나지 못했다면 저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저들을 어떻게 요리할까를 고민해야 할 입장.
문득 구천현녀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한편 심통과 눈이 마주친 이소민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 선배, 나는 아니에요. 아니, 오라버니들 뭐해요? 일어나지 않고.”
그녀의 채근에 둘째인 이우진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러나 장자인 천궁검 이우신은 무슨 생각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실 첫째인 이우신과 둘째인 이우진은 할아버지와 셋째 이소민을 통해 연적하의 무위에 대해 귀가 따갑게 들었다. 하지만 구천노도 심통은 예외다.
지금 첫째인 이우신은 구천노도 심통이 연적하에게 붙어 호가호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약 그가 팽각명의 말대로 구밀복검 심양각이라면, 그러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소민과 이우진은 달랐다.
그들은 심통의 뒤에 버티고 있는 연적하가 두려워서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오라버니?”
이소민이 이우신의 어깨를 잡았지만 이우신은 요지부동이었다.
심통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렇다는데? 이제 어쩔 테냐?”
심통이 실실 웃으며 이소민을 보았다.
한숨을 푹푹 쉬던 이소민은 둘째 오라비를 데리고 옆으로 빠졌다.
육 대 일의 형세가 굳어졌다.
팽각명이 거만하게 상체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구천노도 심통? 아니, 구밀복검 심양각. 이제 자신이 누군지 스스로 말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는 구천노도라는 이름이 통하지 않아. 같은 천지맹만 아니었으면 당신은 벌써…….”
팽각명이 말끝을 흐렸다.
대신에 손날로 자신의 목을 그어 보였다.
죽였을 거라는 뜻이다.
심통이 다섯 명의 남녀를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는 저 천둥벌거숭이와 같이 노부와 연 공자님을 욕보였다. 인정하느냐?”
연적하를 거론하자 이우신은 움찔했지만, 참았다.
교활한 심통이 연적하의 이름을 앞세워 빠져나가려 한다고 생각한 탓이다.
실제로 여섯 명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다.
공산이 못을 박듯 한마디 던졌다.
“심양각.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할수록 연 공자의 업적도 깎여 나간다는 걸 모르겠소?”
“으흐흐. 그러니까 나와 공자님이 사기꾼, 개 씨벌, 후레자식이란 말이렸다?”
녹림도 특유의 과장과 독설이 터져 나왔다.
심통은 마치 자학이라도 하듯 자신과 연적하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고아하게 자란 여섯 명의 후기지수들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부인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의 말을 부인하면 자신들이 겁쟁이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금 심한 욕이 가미되긴 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모두 맞는 말이었다.
순간 팽각명의 동생 팽소미가 입바른 소리를 했다.
“이봐요! 어디서 겁을 주려고 수작이에요? 당신이 심양각인지 아닌지나 말해요!”
하지만 이미 심통은 자신이 한 말로 인해 흥분한 상태인지라 쳐다보지도 않았다.
“쥐방울만 한 연놈들이 뒈지려고 작정들을 했나! 너희가 감히 우리 공자님을 욕보여? 맘 같아서는 쳐 죽이고 싶지만, 같은 천지맹이니 팔 하나를 잘라…….”
그때 흑수선 옆에서 열심히 생선을 먹고 있던 연적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자르지는 마.”
심통은 급히 말을 바꾸었다.
“……잘라야 마땅하지만,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말랐으니 부러뜨리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그러자 가소롭다는 듯 보고 있던 팽각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랄! 고작 구밀복검 따위가 어디서 흰소리를!”
이십 대 애송이에게 욕을 먹는 순간, 참고 있던 심통의 눈이 뒤집혔다.
“이런 니미 씨버럴 개호로새끼가!”
걸쭉한 욕과 함께 심통의 신형이 ‘퍽’ 하고 사라졌다.
그 괴랄한 신법에 놀란 팽각명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미처 주위를 살필 틈도 없었다.
팽각명의 턱에 벼락처럼 심통의 주먹이 꽂혔다.
퍽!
단 한 방에 팽각명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정신을 잃고 뒤로 나가떨어지려는 그의 팔을 심통이 붙잡았다.
곧이어 팽각명의 왼팔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콰직.
“악!”
짧은 비명과 함께 팽각명이 뒤로 물러났다.
“오라버니!”
비명과 함께 팽소미가 도를 뽑아 심통을 베어 갔다.
심통이 반 걸음 옆으로 비켜났다가 다시 앞으로 튕기듯 날아갔다.
심통과 팽소미의 신형이 한순간 엇갈렸다.
콰직.
“아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팽소미의 손에서 도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철그렁’ 하고 칼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심통은 벌써 공산에게 짓쳐 들어가고 있었다.
미처 검을 뽑지 못한 공산은 오음권으로 심통에 맞섰다.
공산의 주먹이 심통의 어깨를 때렸지만 심통은 끄떡도 하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철썩.
단번에 공산의 얼굴이 반대편으로 돌아가고, 그 뒤는 팽각명과 같았다.
“큭!”
공산이 부러진 팔을 움켜쥐고 뒷걸음질 쳤다.
심통은 연속해서 팽천웅의 팔까지 부러뜨린 뒤에야 광란의 질주를 멈췄다.
채챙-.
뒤늦게 운학과 이우신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때다.
콰당 소리와 함께 반점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그리고 천지맹 기찰대 다섯이 바람처럼 안으로 뛰어들었다.
“멈추시오!”
기찰대 조장인 전진파 장로 일월검 무무 진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반점의 절반이 싸움으로 난장판인데, 나머지 절반은 평화로웠다.
음식을 먹으며 싸움 구경이라도 한 것일까?
분위기를 보니 정파의 젊은이들과 사파 노고수 간에 시비가 벌어진 모양이다.
벽에 붙어 신음 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보던 무무 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진파의 희망이라 불리는 공산이 병든 강아지처럼 끙끙거리고 있었다.
황급히 다가가 살피니 왼팔이 부러진 듯 퉁퉁 부어 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머뭇거리던 공산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구천노도 심통과 시비가 있었습니다.”
“무슨 시비?”
“그게 그가 구밀복검 심양각이라는 말이 있어서……. 확인하던 중에…….”
“이 미련한 놈아. 구천노도가 심양각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서?”
“…….”
무무 진인의 말에 공산은 고개를 떨구었다.
맞는 말이다.
심양각이면 어떻고 심통이면 어떻단 말인가.
팔이 부러지고 나서야 의미 없는 일에 휘말렸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