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89
289회. 청운검의 격을 보여 주마
자리로 돌아온 귀영자군은 입을 꾹 다물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이 실감났다.
풍지산의 위험만 생각했지 가는 길에 이런 수모를 당할 줄은 몰랐다.
십이마군의 첫째인 자신이 상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니.
그것도 먹을 게 없어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행낭에 멀쩡한 건량을 두고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빠드득! 저놈과 사생결단을 낼까?’
이를 갈며 연적하가 있는 쪽을 노려보는 귀영자군에게 시산마도 혁무춘이 말했다.
“지금은 참으십시오. 함께 지내다 보면 좋은 기회가 올지도 모릅니다.”
“나더러 풍지산까지 쓰레기를 먹으며 가란 말이냐?”
혁무춘이 꾸러미를 풀며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건량이 아닙니다. 특식으로 준비를 해두었던 걸 겁니다. 건량을 기름종이에 담지는 않지 않습니까? 다음부터는 사정이 조금 나아질 겁니다.”
귀영자군은 슬쩍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혁무춘의 말대로 건량이라기보다는 훈제오리고기를 포장한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 연적하에게 덤빈다는 것은 자결이나 다름없었다.
귀영자군이 노기를 가라앉히자 혁무춘은 바쁘게 손을 놀렸다.
상한 부분을 뜯어내고 그나마 육안으로 보기에 멀쩡한 부분만 추려 냈다.
“드, 드시지요.”
말과 함께 혁무춘은 먼저 고기 한 점을 입에 집어넣었다.
알싸한 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독이라도 먹은 느낌이다.
혁무춘이 먹는 걸 지켜보던 귀영자군도 마지못해 한점 집어 들었다.
문득 빌어먹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 씨벌! 먹자. 그때도 먹고 살았는데 지금이라고 못 할까.’
억지로 입에 넣고 씹으니 눈물이 핑 돈다.
녹림에서 십이마군은-연적하가 등장하기 전까지-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였다.
총채주 파천마군에게 무공을 배울 때도 이 정도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언젠가 백 배 천 배로 돌려주마.’
귀영자군은 복수를 다짐하며 씹던 음식을 꿀꺽 삼켰다.
억지로 먹어서 그런지 목구멍에 엿처럼 들러붙은 느낌이다.
몇 번이나 침을 삼키자 겨우 내려갔지만 그것도 잠깐, 이내 속이 울렁거렸다.
결국 귀영자군은 먹는 시늉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바람에 혁무춘만 죽어났다.
귀영자군이 남긴 음식까지 먹어치워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어찌어찌 식사를 마치고 막 한숨 돌리려고 할 때 연적하가 소리쳤다.
“어이! 뭐해? 게으름 피우지 말고 가서 물 좀 떠 와. 그런 건 좀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가서 떠 오리?”
이건 완전히 잡부 취급이다.
울컥한 귀영자군이 목숨 걸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다.
그보다 한발 빠르게 혁무춘이, 마치 점소이처럼 답했다.
“예! 예! 곧 가져가겠습니다!”
귀영자군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혁무춘은 학산 산채의 채주로 시산마도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다.
‘시체로 산을 쌓았다’는 소리다.
그의 손에 죽은 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 그가 지금은 영락없는 점소이였다.
“귀영자군 님, 일어나시지요?”
귀영자군이 멍한 눈으로 혁무춘을 올려다보았다.
“너, 괜찮은 거냐?”
귀영자군은 혁무춘이 상한 음식을 처먹고 미친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행동할 리가 없어서다.
혁무춘이 한껏 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깨끗한 물이라도 마셔야지요.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 줄 알고요?”
“아!”
귀영자군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얼마나 강한 적응력이란 말인가!
머뭇거리던 귀영자군도 마지못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대로 맑고 깨끗한 물이라도 마셔야 할 듯싶어서다.
그렇게 귀영자군도 혁무춘처럼 극악한 환경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
정주.
칠리하촌.
점심 무렵.
향림반점은 천지맹 고수들로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손님들 중 대부분은 청룡대의 고수들이었다.
칠리하촌에 남아 있는 정파 삼 개 대 가운데 인원이 가장 많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은 많았지만 분위기는 대체로 차분했다.
현무대가 몰살당한 뒤 누구도 천지맹의 승세를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언제 시작될지 모를 유명교의 반격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
사람들로 가득 차도 조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다 보면 눈치가 없는 사람도 있는 법.
팽가의 제자들이 그랬다.
청천도 팽각명, 팽만도, 팽일진, 팽미려는 사촌지간으로 한창 혈기 왕성할 이십 대였다.
그들 중 홍일점인 팽미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풍지산에 간 사람들 말이에요. 주작대 사람들과 녹림이네요. 인물이 주작대에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된 거죠?”
그러자 팽각명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혀를 차며 답했다.
“쯧쯧! 처음 지명된 사람이 남궁연 아니냐? ‘십전무후’니 뭐니 하지만 못 미더운 거지. 너 같으면 남궁연을 믿고 지원하겠느냐?”
“그렇구나.”
팽미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곁에 있던 팽일진은 한술 더 떴다.
“솔직히 십전무후는 과했지. 검왕의 후광으로 얻은 이름이잖아. 고작 스물두 살에 ‘십전(十全, 완전무결)’이라니? ‘무후(武后)’는 또 어떻고? 제갈 총사도 ‘신기수사’라는 별호를 만년에 얻었는데.”
“일진 아우 말이 맞다. 만약 남궁연이 정말 그렇게 뛰어났다면 남궁세가가 몰살당했겠느냐? 최근 몇 번의 작은 성공을 침소봉대해서 ‘십전무후’가 된 게지. 그걸 알고 다른 고수들도 지원하지 않은 거고.”
팽미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녹림이야 어찌 돼도 별 관심 없지만, 곤륜삼선은 무공과 술법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애꿎게 그분들만 피해를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어쩌겠어. 그래도 검왕의 딸인데. 주작대에서라도 지켜 줘야지.”
“너무했다.”
젊은 팽씨들은 남궁연을 깎아내렸다.
비슷한 나이 또래가 ‘십전무후’로 떠받들어지는 게 눈에 거슬려서다.
때마침 옆자리에 있던 창인문의 제자 진설하가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듣자 하니 말씀이 심하시군요.”
순간 가뜩이나 조용하던 반점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상대를 확인한 팽각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진 소저. 감히 팽가의 대화 중에 끼어들다니? 아무리 난세로 상하의 구별이 무색해졌다 해도, 해서는 안 될 짓이 있음을 모르시오?”
칠파일문과 사대세가의 일에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서느냐는 나무람이다.
하지만 진설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도 어지간하면 팽가의 대화니까 못 들은 척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너무 유언비어를 남발해서 차마 그냥 있을 수가 없네요.”
“뭐가 유언비어라는 거요?”
“남궁 소저가 검왕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십전무후’라는 별호를 얻었다고요? 그녀를 믿지 못해서 다른 고수들이 염탐조에 자원하지 않은 거라고요? 그게 유언비어가 아니라면 대체 뭐가 유언비어인가요?”
“어허. 잘 모르면서 함부로 속단하지 마시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차원에서 한 말이었으니까.”
팽각명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슬쩍 말을 바꾸었다.
진설하가 기막힌 얼굴로 쏘아 붙였다.
“뭐라고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차원에서 한 말이라고요? 조금 전까지 남궁 소저에 대한 험담을 그렇게 늘어놓고서?”
“험담이라니? 그쪽이야말로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마시오. 창인문이 언제 사대세가의 위에 서게 되었지? 남궁세가와 가깝게 지내다 보니 우리 팽가가 안중에도 없는 건가? 팽가의 대화에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하다니.”
팽미려도 불쾌한 얼굴로 냉소를 쳤다.
“흥! 분수를 모르는 여자 같으니. 청운검(남궁천)에게 꼬리 쳐서 환심을 사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유명교가 세상을 뒤집어 놓으니 좋지? 이전 같으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주제에.”
“뭐, 뭐라고요? 팽 소저!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내 말이 틀렸느냐? 어디 창인문 제자가 팽가의 대화에 끼어들어?”
대화가 가열되자 진설하의 일행인 설차수와 유근식이 진설하를 달랬다.
“진 사매, 참아.”
“그래, 그만 앉아. 상대는 팽가라고.”
정주 지부 지부장인 승운검객 마천덕도 앉으라고 연신 손짓을 보냈다.
팽가 사람들은 성격이 불같아서 칼질부터 해 대는 것으로 유명한 까닭이다.
진설하는 파르르 떨며 팽각명과 팽미려를 쏘아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과 똑같이 욕을 퍼부어 주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창인문은 물론 정주 지부 사람들까지도 피해를 입게 될 터.
억지로 화를 다스리기 위해 입술을 악문 진설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때 반점 문을 열고 누군가 쭈뼛쭈뼛 들어왔다.
오늘도 우연을 가장해 진설하를 찾아온 청운검 남궁천이었다.
“아니? 마 대협! 설 소협, 유 소협, 또 만났네요? 그런데 진 소저는 왜 그러고 있어요?”
남궁천은 의도적으로 마천덕과 설차수, 유근식에게 먼저 알은체를 했다.
물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진설하를 따라다니는 걸 감추기 위해서다.
남궁천의 듬직한 얼굴을 본 진설하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억울하던 차에 그를 보자 그냥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순간 남궁천의 얼굴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는 성큼성큼 진설하의 곁으로 다가간 뒤에 주변을 쓰윽 둘러보았다.
“진 소저를 핍박한 사람이 누굽니까?”
남궁천은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의 무조건적인 지지에 진설하는 그만 참았던 눈물을 쏟아 내고 말았다.
곧이어 자신의 그런 모습에 당황한 진설하는 의자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남궁천의 시선이 설차수를 향했다.
“설 소협,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평소 부드럽기만 하던 남궁천의 차가운 눈빛에 설차수는 흠칫 놀랐다.
슬쩍 팽가 사람들을 보니 죄다 불편한 얼굴이다.
그래도 숫자가 많아서 그런지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식이었다.
그들의 뻔뻔한 태도에 화가 난 설차수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저분들은 도리어 진 사매에게 감히 창인문 제자가 팽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고…….”
순간 팽각명이 설차수의 말을 끊었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말했소? 검왕의 후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지. 말이 ‘아’다르고 ‘어’가 다른데, 왜 없는 말을 붙여서 팽가와 남궁가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거요? 당신 어느 문파의 누구야?”
순간 울컥한 설차수가 언성을 높였다.
“천도문의 제자 설차수라 하오. 내가 없는 소리를 했소? 사대세가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들어도 못 들은 척해야 하오?”
“뭐가 어째? 천도문이라고 했겠다? 두고 봐라. 강호에서 함부로 입을 놀린 죄가 얼마나 큰지 알게 해 주마. 감히 천도문을 믿고…….”
팽각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다.
남궁천이 팽가를 향해 돌아서며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감히 너 따위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다시 한번 나와 설 소협의 대화에 끼어들면, 네놈 이빨을 뽑아 버리겠다.”
“…….”
남궁천의 호통에 반점은 쥐 죽은 듯 잠잠해졌다.
식사 중이던 다른 방파 사람들의 이목이 남궁천과 팽가로 집중됐다.
팽각명은 뜻밖의 전개에 놀라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비록 남궁천이 후기지수들 중에 으뜸이라고 하지만 그래 봐야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런데 마치 제가 화신지경의 고수라도 되는 것처럼 큰소리라니!
“뭐라! 닥치라고?”
“지금 우리 형님에게 ‘감히 너 따위’라고 했나!”
“남궁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봐요! 남궁 소협!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팽각명을 필두로 세 명의 팽씨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분위기다.
설차수와 유근식은 궁지에 몰린 남궁천을 돕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두 분은 나서지 마십시오. 이건 어디까지나 저와 진 소저의 일이니까요.”
두 사람의 도움을 거절한 남궁천이 팽각명과 그의 사촌들에게 말했다.
“애송이들! 팽가의 후광으로 후기지수 소리를 들으니, 남들도 다 그런 것 같지? 밖으로 나와라. 오늘 청운검의 격을 보여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