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77
377회. 나 놀러 가는 거 아냐
연적하는 효자암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달빛을 받으며 가다 보니 단단하게 지은 초막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지었을 때는 날림이더니 지금은 그런 느낌이 없었다.
초막만 봐도 삼년상을 제대로 치를 모양이다.
녹담평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남수경을 괴롭히다가 된통 걸려서 팔자에도 없는-그것도 남의 집-효자 노릇이라니.
명목상일지라도 적선수행 중이라 그런지 마음이 자꾸 관대해지는 것 같다.
초막으로 다가가니 벌써 ‘드르렁’ 하고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 누가 와서 잡아가도 모르겠네.”
중얼거리던 연적하는 초막 입구의 거적때기를 걷어 올리고 안쪽을 살폈다.
초막 안에는 이부자리 하나가 전부였다.
휑한 초막 안에 녹담평이 솜이불로 돌돌 말고 자고 있었다.
그는 다시 거적을 내리고 황하로 몸을 돌렸다.
강물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해가 떴다면 탁해 보였겠지만 달빛 아래서는 황하도 보석처럼 빛났다.
연적하는 바위 끝으로 걸어갔다.
달과 황하가 만들어 내는 광경은 차가우면서도 어딘지 몽환적이다.
을씨년스러운 풍광 탓인지 쓸쓸한 감정과 함께 지난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창고, 오봉산, 그리고 강호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
오봉십걸과 구천노도 심통, 십전무후 남궁연, 청운검 남궁천, 설차수, 유근식, 진설하, 그리고 외숙의 가족들과 청주삼협, 청불노…….
좌탈입망 한 청불노에 생각이 미치자 쓸쓸함은 허허로움으로 바뀌었다.
부모보다 청불노가 더 보고 싶은 걸 보면 효자는 아닌 모양이다.
아니, 솔직히 부모님의 얼굴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태어날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한집에 살았지만 만나기도 어려웠으니까.
허심(虛心)이 찾아오자 구천기가 저 홀로 일어나 기경팔맥을 돌아다녔다.
대주천이 끝나자 연적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콰콰콰콰-’ 하고 바위 아래서 격렬하게 굽이치는 황하의 물소리가 들려왔다.
연적하는 어둠 속에서 요란한 황하 소리를 뒤로하고 남연객점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연적하는 효자암으로 다시 나갔다.
초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녹담평이 힐끔 쳐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근처를 지나던 사람이 초막을 보고 호기심에 다가온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여름에는 하루에 열댓 명씩 그랬으니 관심 가질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부스럼으로 뒤덮인 흉측한 얼굴은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부스럼’ 녀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형씨, 여기서 뭐해?”
“삼년상 지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네 형이 아니다. 볼일 없으면 그냥 가라.”
그동안 혈기가 많이 죽었는지 녹담평은 시비를 걸지 않았다.
“시체를 수장(水葬)했어? 근처에 묘가 안 보이는데?”
“효자암의 녹담평을 모르는 걸 보니 뜨내기구나. 딱 한 번만 설명해 줄 테니까 잘 들어라. 녹림의 태상 호법이신 연 공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지. ‘녹 형제, 작고하신 부모님의 삼년상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녹 형제가 대신해 줄 수 있겠어?’라고.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다. 알았으면 조용히 가라.”
“내가 그랬다고?”
“…….”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녹담평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내가’라니?
‘뭐지? 자기가 연 공자라도 된다는 듯이…….’
녹담평과 눈이 마주치자 연적하가 말했다.
“정말 내가 그런 소리를 했어? 나는 다르게 말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대충 ‘나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은 것이 없지만 남들처럼 삼년상이란 걸 해 볼까 하는 마음은 있다. 하지만 보살핌받은 적이 없는 내가 하면 위선적이니까 나를 대신해서 네가 해라.’ 뭐 그런 식으로 말야.”
“다, 당신 누구야!”
느긋하게 앉아 있던 녹담평이 벌떡 일어났다.
“내 목소리 듣고도 모르겠어? 나야 나, 네가 삼년상 하기로 해서 삼보방을 건드리지 않았잖아.”
“정말 연 공자님이십니까?”
“삼년상 할 시간이 없어서 대신해 달라고 부탁한 연 공자는 누구야?”
그제야 녹담평은 ‘부스럼’이 연적하라는 걸 알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고, 공자님, 용서해 주십쇼. 제가 헛소리를 했습니다.”
연적하는 녹담평이 약간의 거짓말을 했음에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그였다 해도 그 비슷한 소리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적선수행을 하다 보니 날카롭던 마음이 누그러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오히려 그렇게라도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한 녹담평이 불쌍했다.
“할 만해?”
“예, 예!”
행여나 그가 다른 해코지라도 할까 봐 겁이 난 녹담평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좀 먹었냐?”
“예, 상도가 끼니때마다 먹을 걸 가져다줍니다. 물론 돈은 내고 있습니다.”
“이 짓도 지겹지?”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녹담평은 연적하의 친절에 놀라 부지런히 눈알을 굴렸다.
연적하가 바싹 얼어 있는 그를 지나쳐 바위 끝으로 걸어갔다.
“허튼짓 그만하고 가서 살아 있는 네 부모나 잘 모셔.”
“예?”
뜻밖의 소리에 녹담평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게 정말 강호의 악마로 알려진 연적하가 한 말이 맞단 말인가?
그것도 살짝 거짓말까지 한 자신에게?
“흉물스러운 초막 정리하고 가.”
“저, 정말 그래도 됩니까?”
“왜? 삼 년 꽉 채우고 싶어?”
“아, 아닙니다. 가라고 하시면 가겠습니다.”
가겠다고 하고도 녹담평은 긴가민가 싶어 가만히 서서 눈치만 살폈다.
연적하가 황하에 눈을 둔 채로 말 했다.
“녹 형.”
“예.”
“착하게 살아.”
“예!”
녹담평의 대답이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잠시 후 그는 들뜬 얼굴로 연적하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어째 분위기를 보니 정말 가라고 하는 것 같다.
“그, 그럼, 초막을 치울까요?”
“치우고 가.”
그제야 녹담평은 자신이 지난 일 년여간 살던 초막을 산산이 부쉈다.
살던 자리를 깨끗하게 청소까지 마친 녹담평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연적하는 바위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잡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꼬리를 물던 상념에서 막 벗어났을 즈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순간 연적하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떠올랐다.
허심에 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겨우 겨우 허심에 들었는데 다시 번잡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다니.
하지만 속세에서의 삶이란 본래 이런 것이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다.
연적하는 허심의 여운을 음미하며 상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연 공자님.”
목소리를 들어 보니 무당산에서 만난 적이 있던 금의위 백호 왕무양이었다.
“말해요.”
“사흘 후 우국사(祐國寺)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공자님께서는 그때 오시면 됩니다.”
“우국사?”
“예, 정오에 우국사 철탑(鐵塔)앞으로 오시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알았어요.”
연적하가 답하자 왕무양은 읍을 하고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흐음, 드디어 시작인가.’
문득 궁금해졌다.
유명교 현장 법사를 죽이는 건 적선(積善)인지 아닌지가.
하지만 그걸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연적하는 심통이 운영하는 금월주루를 찾아갔다.
손바닥만 한 마을임에도 주루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연적하가 들어서자 계산대에 있던 심통이 급히 달려 나왔다.
“어이쿠! 공자님, 어서 오십쇼. 어제는 왜 안 오셨습니까?”
연적하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이다.
이번에는 잔심부름을 하던 월아와 금아가 쪼르르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공자님, 어서 오세요!”
번거로운 걸 질색하는 연적하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빈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심통이 연적하의 맞은편에 앉으며 주문했다.
“우리 공자님은 닭 요리를 좋아하시니 종류별로 내오거라. 술은 향설주(香雪酒)로 하고.”
“예.”
월아와 금아가 주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흐뭇한 눈으로 제자들을 보는 심통에게 연적하가 말했다.
“장사가 잘되나 봐?”
“예. 좋은 술에, 안주도 먹을 만하고, 애들까지 싹싹하니 인기가 좋습니다.”
“아하! 그러니까 돈은 여기서 벌고 깽판은 객점에 와서 쳤다는 거네?”
“그, 그건, 그 당가놈이 공자님에게 해코지를 했다고 해서 그랬던 겁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지.”
“끙! 다시는 당가 놈과 싸우지 않겠습니다.”
심통의 답을 듣고서야 연적하는 화제를 돌렸다.
“나는 사흘 후에 떠날 거야.”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개봉.”
“적선수행이라도 가시는 겁니까?”
심통이 슬쩍 연적하의 안색을 살폈다.
개봉까지는 반 시진(1시간),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다.
적선수행이라면 촌 동네보다는 사람이 많은 곳이 좋을 것이었다.
“아니, 누굴 좀 도와주려고. 아, 그럼 적선수행이 되는 건가?”
연적하는 제가 말하고도 애매한 얼굴이다.
연적하가 가볍게 말했지만 심통은 그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연적하 정도 되는 고수가 도와줄 일이란 흔치 않은 까닭이다.
“공자님이 돕는다고요?”
“어. 그럴 일이 좀 있어.”
“그럼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심 노인이?”
“예. 안 됩니까?”
“주루는 어떻게 하고?”
“월아와 금아가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개봉이라면서요? 금방 올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연적하가 애매한 눈으로 심통을 보았다.
그가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나 그를 데리고 가도 되는지 모르겠다.
“심 노인은 강호에서 은퇴한 거 아니야?”
연적하가 눈을 끔뻑거렸다.
주루를 냈으면 유유자적하게 살 일이지 왜 따라나서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흐흐, 은퇴라니요? 인생이 강호 아닙니까? 은퇴는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아, 그런 거야?”
“그럼요.”
심통이 실실 웃을 때 월아와 금아가 닭 요리와 향설주를 가지고 왔다.
심통은 두 사람 사이에 슬쩍 끼려는 월아와 금아를 쫓아 보냈다.
그런 후에 연적하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저도 좀 데리고 가 주십쇼. 계산대나 지키고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말입니다.”
“나 놀러 가는 거 아냐.”
“잘 알지요. 강호에서 어디 소만 잡게 됩니까? 닭도 잡고 개도 잡지요. 공자님 같은 분이 개나 닭을 잡으면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 연적하가 피식 웃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꼭 따라가고 싶은 모양이다.
“알았어. 사흘 후, 아침에 출발할 테니까 객점으로 와.”
“흐흐, 그러지요.”
심통은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의 꿈은 연적하와 함께 강호를 종횡하는 것이라 물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공자님.”
“왜?”
“개봉에도 도사복을 입고 가실 겁니까?”
“도사복이 어때서?”
“공자님에게 어울리는 것 같지가 않아서요. 설마 도사가 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시겠죠?”
“나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야. 개봉에 갈 때는 환복할 거야. 사람들 이목을 끌고 싶지 않거든.”
“흐흐. 그럼 다행이고요.”
심통은 개운한 얼굴로 실실 웃었다.
연적하가 도사 차림을 하고 다니는 게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
사흘 후.
개봉.
오시 초(오전 11시).
대나무 등짐을 진 청년과 유엽도를 찬 노인이 개봉으로 들어왔다.
연적하와 심통이다.
길눈이 어두운 연적하를 대신해 심통이 우국사 가는 길을 알아냈다.
두 사람이 우국사의 철탑에 도착한 것은 정오를 조금 넘긴 때였다.
철탑 앞에 서 있는 연적하의 옆을 금의위 백호 왕무양이 자연스럽게 지나쳐 갔다.
“따라오십시오.”
속삭이듯 말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몇 걸음 앞서가는 왕무양의 뒤를 연적하와 심통이 휘적휘적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