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43
443회. 모두 다라면 어쩌겠느냐?
옥기린 양이선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누가 자신에게 해약을 먹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은인이 누군지 찾는 걸 포기해야 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도귀 고윤월이 흙먼지 섞인 침을 뱉으며 다가왔다.
한껏 풀어진 자세를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하기야 직접 당한 나도 실감이 나지 않으니…….’
양이선은 중독에서 벗어났지만 오히려 더 지친 얼굴로 창에 기댔다.
흙먼지를 정면으로 받아서 그런지 그의 몰골은 꽤나 보기 흉했다.
“패배를 인정하겠느냐?”
고윤월의 물음에 양이선은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말할 기운도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고윤월이 버럭 소리쳤다.
“놈!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구나! 팔 하나가 잘려도 그러는지 보겠다!”
고윤월이 양이선의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박도가 반 토막 나서 팔을 자르려면 거리를 좁혀야 했던 것이다.
그가 막 박도를 머리 위로 쳐들었을 때다.
마치 섬전처럼, 양이선을 지탱해 주고 있던 단창이 고윤월의 왼쪽 겨드랑이에 박혔다.
“억!”
고윤월은 팔을 번쩍 든 채로 굳었다.
겨드랑이로 밀려드는 극통에 진저리를 쳤지만 팔을 내리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창날이 더욱 깊게 파고들 것이기 때문이다.
양이선이 차가운 눈으로 고윤월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제 패배를 인정하겠느냐?”
결과적으로 양쪽 어깨에 구멍이 난 고윤월은 덜덜 떨며 답했다.
“내가 졌소. 인정하리다. 살려 주시오.”
그제야 양이선은 그의 겨드랑이에서 창을 뽑았다.
묵직한 신음과 함께 반 토막 난 박도를 든 고윤월의 손이 아래로 축 쳐졌다.
장천검 위소우는 싸움이 끝나자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행여나 그가 하남성에서의 ‘삼장불립’을 내세워 핍박하면 답이 없어서다.
하지만 연적하는 청로방이나 양이선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끝났네요. 그만 가 봐요.”
연적하의 축객령에 위소우는 쭈뼛쭈뼛 돌아섰다.
잠시 후 녹수방과 청로방 방도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관 주변에서 물러났다.
둘만 남게 되자 적월 공취산이 물었다.
“왜 그를 도와주었느냐?”
“오해하지 마. 나를 위해서 그런 거니까.”
“양이선을 해독시킨 게 너를 위한 일이라고?”
“적선 수행의 일환이야. 늙은이도 도사였다니까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지?”
“핑계도 다양하구나.”
“핑계 맞아. 복수도 끝났는데 좀스럽게 과거를 물고 늘어질 수는 없잖아.”
“흥! 이젠 대인배 행세냐.”
“하여간 이 늙은이는 속이 배배 꼬였어. 매일 나랑 같은 걸 먹는데 왜 그러지? 이봐, 혹시 나 몰래 뭐 다른 거라도 집어 먹어?”
“나에게 그럴 틈이라도 줘 봤느냐?”
“그러게. 그런데 왜 그렇게 속이 꼬였어? 무슨 말만 하면 협객 흉내니, 대인배 행세니. 이젠 징그럽다.”
공취산은 창밖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스승과 사형제들을 제물로 삼은 이후로 자신은 선의를 믿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그런 게 세상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적선 수행? 웃기는 소리.
선의조차도 이기심의 발로다.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일 뿐, 그가 진심으로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즈음,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늦기 전에 객점을 구해야 했다.
***
술시 말(오후 9시).
한 사내가 만리심(萬里心)이라는 간판 앞에서 오락가락했다.
양가장의 소가주 양이선이다.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주의 입에서 연적하의 이름이 튀어나와서다.
한 시진(2시간) 전.
승리를 축하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청로방 방주 장천검 위소우가 말했다.
“양 소협, 축하하오. 그런데 독 모래에 당한 걸 쥐도 새도 모르게 해독하다니. 역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하나 보오. 정주의 ‘옥기린’이라더니, 나는 오늘 양 소협에게 진심으로 탄복했소.”
위소우는 전과 달리 양이선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양가장이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청로방보다 뛰어난 무가인 탓이다.
그는 양이선이 그의 명성에 걸맞게 도귀 고윤월의 허를 찔렀다고 생각했다.
“실은 강풍이 불어올 때 누군가 은밀하게 도와주었습니다.”
“도와주다니요? 그럴 리가. 그 자리에는 도귀와 양 소협밖에 없었는데.”
“누군가 진기로 저의 아혈을 제압해서 강제로 뭔가를 먹였습니다. 저는 나중에야 그것이 해약인 줄 알았습니다.”
“설마, 격공점혈을 말하는 거요?”
위소우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멀리서 진기를 발출해 점혈을 하는 것은 거의 신기에 가까운 수법이었다.
“예, 그가 선의를 가졌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손쓸 틈도 없이 죽었을 겁니다. 그 자리에 그 정도 고수가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허, 설마…….”
위소우가 말을 흐렸다.
자신이 생각할 때 그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혹 짚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양이선의 물음에 위소우는 애매한 얼굴로 답했다.
“실은 그때 다관에서 연 공자가 독 모래의 독성에 대해 물었었소. 답답한 마음에 해약을 꺼내 그에게 건넸는데, 그 뒤로 돌려받지 않았소.”
그때는 싸구려 해약이라 잊어버렸는데 혹시 양이선에게 그걸 먹인 것일까?
‘그럴 리가. 양가장은 연적하의 원수라고 하던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위소우만큼이나 양이선의 머리도 복잡했다.
정황상 그의 짓이 분명한데, 자신을 구해 줄 이유가 없어서다.
오히려 훼방하면 했지 왜 돕는단 말인가?
하지만 해약도 그렇고 격공점혈이 가능할 고수는 연적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만리심’ 간판을 노려보던 양이선은 객점으로 들어갔다.
마침 객점 안의 식당을 청소하고 있던 주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쇼. 방을 구하러 오셨습니까?”
“아니오.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을 만나러 왔소.”
“아, 그러시군요. 누굴 만나러 오셨습니까?”
주인이 청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 초저녁이니 객점의 손님을 불러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연적하.”
“저어, 객점에 계신 손님의 이름은 저도 모릅니다. 특징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오늘 들어온 손님 중에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 있소?”
“아, 예. 그런 분이라면 딱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연적하요. 그에게 가서 청로방의 양이선이 만나러 왔다고 전해 주시오.”
양이선은 주인의 답을 듣지도 않고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
주인은 ‘청로방’이라는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빠르게 이 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연적하가 식당으로 내려왔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던 양이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생명의 은인이라 예를 표시한 것이다.
연적하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양이선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나를 보자고 했다고요?”
“오늘 저를 해독시켜 준 사람이 연 공자입니까?”
“왜요?”
연적하의 반문에 양이선은 그가 한 일임을 알았다.
해독해 준 사람이 그가 아니라면 ‘아니다’라고 답했을 테니까.
“연 공자가 맞다면 왜 그러셨는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내가 독 쓰는 사람들을 싫어해요. 독 때문에 개고생한 적이 있거든요.”
“…….”
그럴듯한 이야기에 양이선은 말문이 막혔다.
왠지 자신도 독에 당한 사람을 보면 도와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는…….”
무심코 ‘잊지 않겠다’고 말하려던 양이선은 이를 악물었다.
‘양가장에 대한 그의 복수심’과 ‘그에 대한 양가장의 원한’이 떠올라서다.
“은혜라고 생각할 거 없어요. 나와 양가장은 그런 말이 어울리지 않잖아요.”
“아직도 양가장을 향한 복수가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연적하가 되물었다.
“양가장은 어때요? 나를 용서할 수 있어요?”
“……다른 분들은 모르겠으나 나는 그럴 수 있습니다. 목숨의 빚이 있으니까요.”
솔직한 양이선의 말에 연적하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양가장 사람들이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같은 핏줄인 와룡장의 연씨보다 열배 백배는 나은 것 같다.
“내가 몰라서 그러는데, 하남성의 사파가 아직도 ‘삼장불립’이니 뭐니 그러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연 공자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더 집요하게 괴롭힙니다.”
연적하는 사파 고수들의 몰염치에 혀를 찼다.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삼장(와룡장, 백가장, 양가장) 사람들을 꽉꽉 밟고 있는 모양이다.
“조만간 ‘삼장불립’이란 말을 철회할 거예요. 그럼 양가장으로 돌아갈 건가요?”
“그래야지요. 정말 철회해 주실 겁니까?”
“내 복수는 오래전에 끝났어요.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도 양가장이 복수하겠다고 하면 진지하게 상대는 해 줄게요.”
마지막 말에 양이선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지 않을 겁니다. 양가장의 원로들도 연 공자가 와룡장에서 당한 일을 알고 있습니다. 무림인이라면 그 정도 복수는 당연하지요.”
목숨의 빚을 진 양이선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연적하의 입장에 섰다.
그가 보기에 양가장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연적하를 상대할 수 없었다.
명분이 있을 때 원한을 털어 내야 한다.
예컨대 그가 ‘삼장불립’을 철회하면 양가장도 과거사를 덮는 식으로.
백가장처럼 멸문당하지 않으려면 그게 최선이었다.
다행히 양가장은 ‘삼장불립’으로 재물을 잃었을지언정 피를 본 사람이 없다.
그러니 꼬장꼬장한 원로들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앞뒤가 꽉 막힌 건 사실이지만,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분들이시니까.
양이선은 한 식경(약 30분)쯤 머물다가 떠났다.
그가 떠난 직후, 공취산이 비 맞은 중처럼 구시렁거리며 내려왔다.
“방이 왜 이렇게 추워? 화로(火爐)라도 하나 들여놔야지. 얼어 죽겠구먼.”
“은근슬쩍 달아나려고 간 보러 온 건 아니고?”
“이 엄동설한에 달아난다고? 염병. 그러다 얼어 죽느니 며칠이라도 더 사는 게 낫다.”
투덜거리던 공취산은 몸이 안 좋은지 코를 훌쩍거렸다.
보통의 노인이 되어 버린 그에게 겨울 여행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혀를 차던 연적하는 주인에게 방에 불을 팍팍 때라고 채근했다.
죄인처럼 서 있던 주인은 결국 불을 더 지피겠다며 뒷문으로 나갔다.
연적하가 따끈한 차를 공취산에게 내밀었다.
공취산은 주름진 두 손으로 잔을 감싼 뒤 뜨뜻한 온기를 만끽했다.
“이야기는 잘 끝냈느냐?”
“잘 끝내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등에 칼 꼽는 강호에서.”
“싹수가 없는 놈이면 어디 한군데 부러졌을 텐데. 그래도 괜찮았던가 보구나?”
“사람은 됐더라고. 집안의 원수에게 고맙다고 하는 걸 보면.”
“은원이 그렇게 덧없느니라. 죽이고 싶도록 미운 감정도 결국에는 사라지니까.”
“유명교주가 사저랬지?”
“그랬지.”
“늙은이 말을 듣다 보면 헷갈려. 사저를 좋아하는 건지, 원망하는 건지, 죽일 만큼 미워하는 건지, 목숨 바쳐 도와주고 싶은 건지.”
“모두 다라면 어쩌겠느냐?”
연적하가 공취산을 힐끔 쳐다보았다.
공취산의 눈빛은 공허하기만 했다.
그렇게 심사가 복잡한데 도리어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이라니 신기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