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84
484회. 호랑이와 개
회의는 한 시진(2시간) 이상 계속 됐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문파마다 ‘석경장’과 ‘남맹’을 보는 시각이 달랐다.
‘전진파, 점창파, 공동파’가 부정적임에 반해, ‘화산파, 무당파, 의천문’은 호의적이었고, ‘소림사, 청성파’는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회의는 시종일관 평행선을 달렸다.
장로들의 말싸움에 지친 맹주 무극 상인이 총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총사 공손일랑 공손기가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제야 옥신각신하던 장로들은 입을 다물고 총사에게 주목했다.
“양측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조금 더 ‘남맹’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맹주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공손기는 맹주에게 짐을 떠넘겼다.
칠파일문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 터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빈도는 ‘남맹’도 우리 호천맹과 한 식구라고 생각합니다. ‘남맹’이 호천맹의 영역을 침범한다면 모를까? 단지 추측만으로 ‘남맹’을 규제한다면 천하인들이 우리를 비웃을 겁니다.”
전진, 점창, 공동파 장로들이 인상을 구겼다.
그들은 맹주가 자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손기의 생각은 달랐다.
‘호천맹의 영역을 침범하면 규제하겠다는 소리로구나.’
영역을 침범한다는 말은 가져다 쓰기 나름이다.
당장 남직례성에서 ‘호천맹’ 산하의 방파와 ‘남맹’의 방파 간에 시비가 일 수도 있다.
심지어 남직례성에서 ‘남맹’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도 영역 침범에 속한다. 정도 문파가 있는 곳은 모두 ‘호천맹의 영역’인 까닭이다.
그러니 맹주의 말대로라면 어느 때라도 ‘호천맹’은 ‘남맹’을 규제할 수 있다.
맹주가 마음만 먹으면…….
맹주의 발언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달리 대처할 방법이 없으니 그냥 내일로 미루어 버린 것이다.
마치 ‘팔황의 혈사’에 침묵하듯이 말이다.
기능이 거의 정지하다시피 한 호천맹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의는 여느 때처럼 답 없이 끝났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언쟁하던 장로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무극상인과 공손기는 나란히 마당을 가로질렀다.
묵묵히 걷던 무극상인이 물었다.
“무무 진인과 도천 진인, 월명상인은 왜 그렇게 ‘석경장’과 ‘남맹’에 각을 세우는 겁니까?”
“천지맹 시절에 기찰대를 운영하지 않았습니까.”
“그것과 관계가 있습니까?”
“연적하가 녹림에 있을 때 정파 기찰대와 자주 충돌했는데, 그때의 악연으로 그러는 걸 겁니다.”
“허! 그런 일이.”
생각지도 못한 답에 무극상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갈림길 앞에서 공손기가 슬쩍 운을 뗐다.
“맹주님께서 회의실에서 하신 말씀 말입니다.”
“어떤 말요?”
“‘남맹’이 ‘호천맹’의 영역을 침범 하면 규제를 가할 것처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아, 그 비슷한 말을 하기는 했지요.”
“맹주님의 진심을 알고 싶습니다.”
“흐음! 진심이라.”
무극상인은 쉽게 답하지 않고 먼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천지맹’에 이어 ‘호천맹’의 맹주가 되었다.
맹주는 곧 정파의 지존.
몇 년을 그렇게 지냈더니 남의 옷을 입은 것 같던 맹주 자리가 이제는 편안하다.
오히려 수도자 시절의 모습이 억지로 쥐어짜야 겨우 떠오를 정도.
관심도 ‘구도(求道)’에서 ‘정파의 중흥’으로 옮겨 갔다.
‘나만 득도하면 된다’에서 ‘모두를 위한 삶’으로 바뀐 셈이랄까.
이제는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희생도 감수할 수 있게 됐다.
수도자 시절에는 상상하지도 못하던 일이다.
“나는 ‘정파의 중흥’을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갈 수 있습니다.”
공손기는 기대 이상의 발언에 흠칫했다.
지옥이라도 갈 수 있다니.
“어디까지가 정파입니까?”
크게 보면 ‘남맹’도 정파니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극상인이 반문했다.
“칠파일문이 정파의 뿌리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공손기는 무극상인이 말한 정파의 범주를 확정 지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칠파일문의 중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
팔월.
산서성.
한중.
정오 무렵.
한수 강변에 오십여 기의 인마(人馬)가 나타났다.
스물은 흑포를, 서른은 혈포를 입었는데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흑포를 입은 무광곡성문 문주 초혼귀마 요진갈이 동방사자 탈혼마검 노도경에게 손짓했다.
노도경은 천인(天人)인 요진갈이 부르자 급히 말을 몰아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혈룡대 대주가 안 보이는데.”
교주는 명왕교의 장악을 위해 일문과 일대를 파견했다.
일문(一門)만으로도 충분한데 일대(一隊)를 추가한 것은 요진갈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다.
‘마교 육문의 문주를 홀로 보낼 수 없다’는 게 교주의 뜻이었다.
혈룡대를 요진갈의 수족으로 붙여 준 셈이다.
“도하(渡河)하기에 적당한 지점을 찾겠다고 앞서갔습니다.”
“무한까지 이 짓을 해야 한다고 했느냐?”
“예, 한 달 보름 정도만 고생하시면 됩니다. 무한에서 여산까지는 뱃길로 가면 되니까요.”
“여산이라. 벌써부터 지겹군.”
“그래도 풍광이 수려하고 기온도 적당하니 지내시기에는 천산보다 나을 겁니다.”
“흥! 천산보다 나은 곳은 저승밖에 없느니라.”
“그렇기는 하지요.”
노도경은 웃으며 요진갈의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날도 더운데 육문의 문주가 먼 길을 가려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그가 요진갈의 말 상대를 해 주고 있을 때, 혈룡대 대주가 돌아왔다.
“문주님, 일다경(약 20분)만 하류로 내려가면 나루터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강을 건너야 할 것 같습니다.”
혈룡대 대주 생기사귀 우불도의 말에 요진갈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아! 일다경이나 더 가야 한다고? 젠장, 엉덩이에 물집이 잡혔단 말이다.”
“동방사자, 문주님께서 불편해 하시는데 강을 건넌 뒤에 좀 쉬는 게 어떻겠소?”
무리의 우두머리는 요진갈이지만 안내인은 노도경인지라 우불도는 노도경의 의견을 물었다.
노도경은 흔쾌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십시다. 어차피 점심때도 되었고, 햇살도 뜨거우니 잠시 쉬는 것도 좋을 것 같소. 문주님,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히 묻지 말고 알아서들 해라. 머리는 쓰라고 있는 것이다.”
노도경의 입가에 씁쓰름한 미소가 어렸다.
기껏 생각해서 물었더니 바로 타박이다.
“그럼, 속하가 먼저 길을 열겠습니다.”
노도경은 행여나 요진갈이 다른 소리를 할까 봐 앞서 달려갔다.
얼떨결에 남겨진 우불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짐을 떠넘기고 달아난 노도경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냥 받아들여야 했다.
직급상 칠대 대주는 사방사자의 아래인 까닭이다.
요진갈의 마수에서 벗어난 노도경은 개운한 마음으로 한수 강변을 달려갔다.
***
호광성.
여산.
광명촌.
여름에 접어들면서 명왕교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지난겨울 실종된 적월 공취산이 풍지산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게 알려진 까닭이다.
광명정.
혼천혈귀 강상피가 피곤에 찌든 얼굴로 혼세검마 척진경을 보았다.
“오늘은 무슨 일로 모이자고 한 거요?”
“두 분도 내가 풍지산에 간자를 심어 놓은 것을 알고 계실 게요.”
강상피와 악불 방천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백두마군이 유명교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인맥은 남아 있었다.
“얼마 전 편지를 받았는데. 연적하가 적월과 함께 풍지산을 올랐다 하더이다.”
“…….”
뜻밖의 소리에 강상피와 방천각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멍하니 있던 방천각이 중얼거렸다.
“그럼 ‘연남천’이 ‘연적하’였다는 건가?”
공취산의 실종 뒤 명왕교는 가급적 외부 출입을 삼갔다.
그러다 보니 강호의 소식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
정파에서는 연적하를 ‘남천’으로 불렀지만 그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척진경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노부도 최근에야 연적하의 별호가 ‘남천’임을 알았소. 그놈이 황방산에서 제 별호를 이름처럼 사용했던 모양이오.”
강상피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연적하가 왜 그런 짓을 했다는 거요? 놈은 유명교와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소식을 전한 자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더이다. 다만 연적하와 적월이 함께 온 걸 보았다고만 했소.”
강상피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소리요. 설사 교주와 연적하가 손을 잡았다 해도, 그 어린 놈에게 백두마군을 생포해 갈 능력이 있겠소?”
“…….”
강상피의 지적에 척진경은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자신도 그 부분에서 자신이 없었다.
적월 공취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십두마병들에게서 그를 납치해 가다니?
교주가 직접 나선다면 모를까?
설사 천하십대고수가 나선다 해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때 방천각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아! 나도 연적하가 혼자서 그 일을 했다고는 믿지 못하겠소. 어쩌면 조력자가 있었을지도 모르오.”
조력자라는 말에 강상피와 척진경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연적하에게 조력자가 붙었다면 적월의 납치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조력자가 누구든, 최종적으로 적월을 교주에게 넘긴 자는 연적하일 게요.”
“…….”
무거운 침묵이 광명정을 감쌌다.
교주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이 막상 눈앞에 닥쳐오자 암담했던 것이다.
한참 만에 척진경이 말했다.
“교주는 적월 하나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오. 무슨 방도를 내야지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도 적월의 꼴을 면치 못할 것이오.”
강상피가 한마디 덧붙였다.
“연적하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소. 놈이 우리 명왕교를 건드렸으니 복수합시다.”
하지만 복수하자는 그의 말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예상과 어긋난 반응에 강상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연적하가 먼저 우리 뒤통수를 쳤는데 왜들 말씀이 없으시오?”
그러자 방천각이 답했다.
“연적하는 곁가지에 불과하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교주외다. 백두마군을 곶감 빼듯 빼 가고 있는 팔황신모부터 막아야 하지 않겠소?”
“옳으신 말씀이오. 호랑이를 앞에 두고 개새끼 따위와 놀아서야 쓰나.”
척진경은 연적하를 개에 비유했다.
두 사람이 반대하자 강상피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곰곰 생각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복수보다 자신들의 보호가 우선이었다.
“두 분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따르리다. 교주를 막을 좋은 방도가 있소?”
방천각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적월이 산 채로 잡혀갔으니 ‘음양고’의 비밀도 알려졌을 게요. 교주의 능력이라면 양고를 제거했을 수도 있소. 그렇다면 우리의 힘만으로는 교주를 막을 수가 없소. 가까이에 우리를 도와줄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말씀인데, 마교는 어떻소?”
순간 척진경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뭐요? 지금 천산으로 가자는 거요? 살육에 미친 놈들과 함께하자고? 그건 늑대를 피하기 위해 호랑이 굴로 뛰어들자는 소리외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언제 풍지산으로 끌려갈지 모르지 않소?”
그래도 척진경은 완강히 거부했다.
“안 될 말씀이오. 지난번 동방사자를 만났을 때 느끼지 않았소? 그들은 세상의 멸망을 바라는 정신병자들이오. 마교 교주가 우리를 환영할 것 같소? 팔황신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게요.”
“지금까지 적지 않은 사파 고수들이 천산으로 들어갔소. 우리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소?”
“벌써 잊으셨소? 그들과 달리 우리는 모두 ‘염마왕의 권속’ 이외다. 자칭 신이라는 마교 교주가 이교도인 우리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시오?”
방천각은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질겅질겅 씹기만 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유명교를 떠나면 만사가 잘 풀릴 줄 알았는데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