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92
492회. 약자는 동정받지 못한다.
낙양.
연가무관.
자시 말(오전 1시).
외부인의 침입을 가장 먼저 느낀 사람은 와룡검객 연무백이었다.
스스슥-.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에 연무백은 억지로 눈을 떴다.
일단 눈을 뜨자 인기척은 더 확실해졌다.
잠이 확 달아난 연무백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어 둔 검을 잡았다.
연무백의 움직임에 한때 ‘양주가인’이라 불리던 양이화도 잠에서 깨어났다.
“…….”
그녀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연무백이 먼저 속삭였다.
“쉿! 도적이 든 것 같소.”
무가 출신답게 양이화는 두 번 묻지 않고 옷부터 갖춰 입었다.
연무백은 양이화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마루로 나갔다.
“한밤중에 연가무관에는 무슨 일들인가!”
그의 외침이 주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목소리에 공력을 싣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공이 절정에 이르지 않고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기예였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복면인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뛰어난 와룡검객의 내력에 크게 놀랐다.
물론 놀랐을 뿐,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실전 경험과 무위도 결코 약하지 않은 까닭이다.
연무백과 복면인들이 잠깐 대치하는 동안 별채에 있던 연승백도 검을 들고 나왔다.
이로써 연가무관의 고수들이 모두 나온 셈이다.
강북오적의 첫째인 승야월장(乘夜越墻) 오동진이 조롱하듯 답했다.
“일은 무슨, 지나는 길에 뭐 쓸 만한 게 있을까 싶어 와 본 거지.”
연무백이 기막힌 얼굴로 되물었다.
“쓸 만한 게 있으면?”
“좀 나눠 가려고.”
“한밤중에 주인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크크! 주인이 바뀌면 허락받을 일이 없지. 그런데 아침까지 그렇게 서서 떠들 생각이냐?”
“도둑치고는 대담하구나. 다섯이 몰려다니는 도둑이라.”
의미심장한 눈으로 복면인을 둘러보던 연무백이 마당에 내려섰다.
그의 왼편에 양이화가, 오른편에 연승백이 나란히 섰다.
곧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덟 명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차차차창-.
채챙-.
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싸움이 시작되자 호리호리한 체형의 복면인 하나가 담을 넘어 들어왔다.
대도무문 공화연이다.
그녀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가까이에 있던 연승백의 거처로 숨어들었다.
침실로 들어가자 희미한 유등(油燈) 아래 서가와 침상이 보였다.
공화연은 손끝으로 서가의 책을 빠르게 훑었다.
자질구레한 책들이다.
능력 있는 도둑은 돈이 될 만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여긴 없군.’
무서(武書)가 십여 권 있었지만 눈길을 끌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침상으로 이동했다.
서가가 아니라 침상 주변에 숨겨 두기도 하니 확인할 생각이다.
공화연이 매의 눈으로 침상 주위를 쓸어 볼 때다.
밖에서 ‘악!’ 하는 신음이 들려왔다.
순간 그녀는 하던 동작을 멈추고 문가로 달려갔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복면인 하나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헉! 담을 넘은 지 반각(약 7분)도 안 됐는데 벌써? 서둘러야겠네.’
막 돌아서려던 공화연이 눈을 부릅 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또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물러났다.
다섯 중에 벌써 둘이나 당한 것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공화연은 슬며시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실패할 게 뻔하니 몸을 피하려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앞을 양이화가 막아섰다.
“도둑고양이처럼 어딜 가시려고?”
깜짝 놀란 공화연은 저도 모르게 마당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무백과 연승백이 세 명의 복면인을 여유 있게 상대하고 있었다.
“저어, 그냥 보내 주시면……. 안 되겠죠?”
“올 때는 마음대로 왔는지 몰라도 갈 때는……. 헉!”
발밑에서 ‘펑!’ 소리와 함께 연무가 피어오르자 양이화는 마루 아래로 급히 피했다.
그사이 공화연은 담을 넘어 사라져 버렸다.
그걸 멍하니 보던 양이화는 ‘치잇!’ 소리와 함께 마당의 복면인들에게 달려갔다.
양이화가 합류하자 그렇지 않아도 겨우 버티던 복면인들은 위기를 맞이했다.
견디다 못한 오동진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앞으로 던졌다.
눈앞에서 연무가 피어오르자 연무백과 연승백, 양이화는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오동진과 두 명의 복면인은 꼬리를 말고 달아났다.
시간이 지나자 자욱하던 연기는 스르륵 사라졌다.
연무백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지? 독인가?”
“독일 거예요. 혹시 모르니 가까이 가지 말아요.”
양이화가 질색을 하자 연무백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독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형님, 뭐 하는 놈들일까요? 유명교일까요?”
“글쎄다. 저렇게 달아나는 걸 보면 유명교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네요.”
연승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들은 과거 와룡장에 쳐들어왔던 유명교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양이화가 한마디 했다.
“어쩌면 도둑일지도 몰라요. 도둑들이 달아날 때 독연무를 사용한다고 들었거든요.”
연무백이 의아한 얼굴로 양이화를 보았다.
“도둑이라고? 그들이 왜 우리 연가무관을 노린다는 거요? 뭐 훔쳐 갈 게 있다고?”
그 질문에는 양이화도 답하지 못했다.
연가무관은 영세한 무관 중에 하나로 재물과 거리가 먼 탓이다.
연승백이 끼어들었다.
“모르죠. 숟가락도 훔쳐가는 게 도둑놈이니까.”
“그런 좀도둑치고는 무위가 뛰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우리 내공이 비약적으로 늘어나지 않았다면 당해 내기 어려운 상대였다.”
“흠!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네요. 단순한 도둑은 아니라는 건가.”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오자 양이화가 한마디 했다.
“그래도 위기를 넘겼네요. 소청단 덕분에.”
어딘지 씁쓸한 기색이 느껴지는 음성이다.
그녀의 말에 살짝 들떠 있던 연승백의 얼굴이 가볍게 굳었다.
소청단.
‘연남천’이 ‘연적하’라는 건 최근에야 알았다.
자신과 형수에게 그는 ‘병 주고 약 준 사람’이다.
자신은 가짜 법보 때문에 오른팔을 잃었고, 형수의 집은 풍비박산 났었으니까.
“재수 없는 새끼.”
연승백은 무심코 욕을 내뱉었다.
그러자 연무백이 한마디 했다.
“그런 소리 마라.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은혜는 아니죠. 병 주고 약 준 거니까.”
“병이라니? 적하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몰라서 묻는 거예요? 가짜 법보를 떠넘겼잖아요. 그 바람에 팔이 잘렸구만.”
“연 숙부의 ‘와룡검’을 돌려 달라고 떼를 쓴 건 우리였다. 그에게서 강제로 빼앗다시피 한 것을 잊었느냐?”
하지만 연승백은 동의하지 않았다.
“떼라뇨? 우리는 ‘와룡검’의 권리를 주장한 것뿐이에요. 그런데 그놈은 그게 법보가 아니라는 걸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 바람에 난 팔이 잘렸고요.”
“그는 ‘와룡검’을 법보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우리끼리 흥분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던 거 아니었냐? 그 책임을 적하에게 지우면 안 되지.”
“형님이야 팔이 멀쩡하니 그러실지 몰라도 난 그게 안 되네요. 잘린 부위가 욱신거릴 때마다 왠지 그놈에게 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
연무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몇 걸음 걷던 연무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잃은 팔 때문에 적하를 원망하는데, 적하라고 우리를 원망하고 싶을 때가 없겠느냐?”
연승백은 이를 앙다물었다.
다소 억지스럽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는 무림의 고인이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무명을 떨칠 기회조차 잃어버린 외팔이 검객에 불과하다.
‘나도 형처럼 사지가 멀쩡했다면, 형과 같은 소리를 했을지도 몰라.’
연승백은 상대적으로 비루한 자신의 처지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찬바람이 나게 몸을 돌려 전각으로 들어가 버렸다.
형제의 신경전을 지켜보던 양이화가 조심스레 연무백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 연무백이 물었다.
“당신도 적하를 원망하오?”
“모르겠어요. 양가장이 다시 문을 열어서 그런 걸까요?”
연적하의 지시로 사파는 더 이상 양가장을 핍박하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은 천하를 떠돌던 양씨들이 다시 양가장으로 모이는 중이다.
거기다 연남천의 도움까지 받은 양이화에게 원망이란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연무백이 양이화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나마 처가인 양가장과 연적하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 같아 다행이다.
문득 양이화가 조금 전까지 격전이 일어났던 마당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웬 도적일까요? 재물을 노리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구천검보’ 때문일 게요.”
“‘구천검보’요?”
“아무래도 ‘힘없는 자가 보물을 가졌다’고 생각한 모양이오.”
“에?”
양이화가 놀란 눈으로 연무백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더 많은 이들이 연가무관의 담을 넘게 될 것이었다.
“무관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운영해야겠소. 도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연무백의 눈에서 섬전 같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청룡무관’이나 ‘백호무관’과 달리 이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한다.
천하가 적이나 마찬가지다.
강호에서 약자는 동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잡아먹힌다.
탐스러운 먹잇감이 되었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다.
멈춰 서는 순간 적들에게 뜯어먹힐 테니까.
***
구월 중순.
산서성.
습현.
신시 말(오후 5시).
세 기의 인마(人馬)와 이두 마차가 마을로 들어섰다.
풍지산으로 가는 연적하 일행이다.
그래도 전에 한 번 왔다고 구천노도 심통이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었다.
거리를 지나던 심통이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객점을 가리켰다.
“저기가 어떻소?”
아직 날이 훤했지만 교구현을 지적에 두고 무리할 이유는 없었다.
청운검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끝에 있던 삼보절명 당운망이 끼어들었다.
“벌써 쉬자는 거냐? 교구현이 멀지 않다면 교구현까지 바로 가지?”
그러자 심통이 냉소를 쳤다.
“흥! 교구현에 가면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컴컴한 밤중에 객점을 찾아 돌아다니자고? 쥐뿔도 모르면서 나대지 마라.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중간은 가느니라.”
“이런 제길! 초행길에 그 정도 말은 할 수 있지. 너야말로 그렇게 함부로 주둥이를 나불거리다가 피똥 싸는 수가 있다.”
순간 심통이 흠칫했다.
남연객점에서 한창 당운망과 싸울 때 정말 피똥을 싼 적이 있어서다.
“이놈. 경고하는데 음식에 수작을 부리면 사지 중 하나를 자를 것이다.”
심통의 살기등등한 눈빛에 당운망은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두 노인의 말싸움을 지켜보던 남궁천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마치 개와 고양이 같았다.
하루 종일 눈만 마주치면 싸운다.
축축 늘어지는 한여름이나,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가을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고 보니 벌써 가을이군.’
마차에서 내리는 연적하와 남궁연을 보니 불현듯 정주의 진설하가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호천맹이 만들어지고 난 뒤로 그녀와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이번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들러 봐야겠구나.’
꾀꼬리처럼 다정한 동생 부부를 보니 진설하가 더 그리워진다.
이번에야말로 이야기를 매듭지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남궁천은 ‘죽음의 산’이라는 풍지산을 지척에 두고 감상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