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02
502회. 왕재천(王在天), 지상낙원?
십이월.
남직례성.
응천부.
연적하에게 ‘십만 명을 참수하겠다’고 선언한 팔황신모는 황실로 은밀히 현장 법사를 보냈다.
뒤탈 없이 십만의 목을 베기 위해서다.
금의위가 유명교를 견제하기 위해 현장 법사를 암살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황실의 모든 사람이 유명교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유명교 장생술에 목을 매는 태감과 후궁들은 여전히 유명교에 호의적이었다.
그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현장 법사는 태화전에서 황제를 알현했다.
태화전.
“만세, 만세, 만만세! 폐하의 성덕(聖德)으로 천하만민이 복을 받았으니…….”
“되었다. 긴히 할 말이 있다고?”
“그 전에 폐하, 세간에 떠도는 유명교의 소문은 모두가 거짓된 것들임을 알아주시옵소서. 폐하와 황실을 향한 유명교주의 충성심은 가히 무림 방파들 중에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야 무슨 말을 못 할까. 지난 봄에 너희가 황도에서 저지른 일을 뭐라고 부르는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팔황의 혈사라고 하던가?”
“그것 역시 유명교를 시기하는 자들이 지어낸 허황된 이야기들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 사람이 거짓말을 하니 진실처럼 보일 뿐이옵니다.”
“흥! 싫은 소리를 하니 다 거진이라고 하는구나. 고작 그런 소리를 하려고 다시 돌아왔느냐? 그렇다면 실망인걸. 위험을 무릅쓰고 왔다기에 무슨 긴한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현장 법사가 개봉 우국사에서 죽을 뻔한 이야기를 돌려서 한 것이다.
“아니옵니다. 유명교주가 폐하를 향한 충심을 보여 드리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폐하를 위하여 북방 오랑캐의 정벌에 앞장서겠다고 했습니다.”
뚱한 얼굴로 듣던 황제가 관심이 생긴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니까 북방의 정벌에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냐? 유명교주가?”
그건 꽤나 솔깃한 제안이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없다.
성공하면 왕실이 안정되고, 실패해도 유명교의 힘이 약해지는 까닭이다.
“그러하옵니다. 유명교를 선봉에 서게만 해 주신다면,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도 하겠다고 했습니다.”
“병졸이라도 괜찮으니 선봉에 서겠다?”
“예. 그러하옵니다.”
“왜? 유명교주는 세상일에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황실을 위해 선봉에 서겠다니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뜰 소리구나.”
“폐하와 황실에 대한 충정이 아니겠습니까?”
“잘 알겠다. 지금 원정군을 준비해도 봄이나 돼야 출병이 될 게다. 교주가 원하는 대로 선봉에 유명교를 세워 주겠다고 해라. 천하제일고수라는 유명교주가 백의종군을 하겠다니 그것참.”
“교주는 폐하와 황실을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 낮은 자리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알겠다. 물러가라.”
“예.”
현장 법사가 물러가자 황제는 사례병필태감(司禮秉筆太監) 이승을 불렀다.
“폐하 찾으시었습니까.”
“대장군 풍승을 들라 해라.”
풍승이라는 말에 이승이 흠칫 놀란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리 보느냐?”
“혹여 정벌군을 다시 일으키시려는 것입니까?”
“당연하지 않으냐. 적들이 국경 밖에서 세를 키우고 있는데 구경만 하라고?”
“풍승보다는 남옥 대장군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남옥은 기가 세서 유명교주와 상성이 좋질 않다. 말이 백의종군이지 유명교주는 천하제일의 고수다. 풍승이라면 적당히 교주의 비위를 맞춰 줄 수 있겠지.”
“폐하의 말씀을 들으니 과연 남옥보다는 풍승이 제격인 것 같습니다.”
이승이 탄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나 남옥과 유명교주가 전선에서 불화를 일으키면 그건 그것대로 재앙이었다.
유명교주가 홧김에 남옥을 죽이고 정벌군까지 장악하면 자칫 황실이 위태로워질 수 있으니까.
그날 황제는 대장군 풍승을 정벌군 지휘관에 임명하고, 북방 정벌의 준비를 시켰다.
***
합비.
남궁세가.
연적하는 마음을 정했지만 검왕 남궁벽과 청운검 남궁천에게 말하지 못했다.
남궁벽과 남궁천의 갈등이 심해 눈치가 보인 탓이다.
남궁벽이 천하의 안위와 연적하가 받게 될 비난을 걱정했다면, 남궁천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누이동생이라도 구해야 한다고 맞섰다.
연적하는 두 사람의 말을 경청하면서 구천노도 심통에게 여행 준비를 시켰다.
연적하가 남궁세가에 머문 지 사흘째 되던 날.
저녁 식사를 마칠 즈음 남궁벽이 연적하와 심통을 안채로 불렀다.
연적하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남궁벽과 남궁천의 안색부터 살폈다.
어제까지 어색한 얼굴로 데면데면 하던 두 사람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
“부르셨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남궁벽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준비는 잘 되고 있느냐?”
떠날 것을 염두에 둔 질문인지라 연적하는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예.”
“마음을 정했다면 서둘러야겠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오늘 낮에 ‘남맹’에서 무극문 출신의 무관들과 만났다. 내년 봄에 북방 오랑캐를 정벌한다는구나.”
“아, 예…….”
연적하는 그것과 자신이 무슨 관계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고 있던 남궁천이 끼어 들었다.
“아버지, 혹시 정벌군이 남맹에 도움을 요청했습니까?”
“그건 아니다.”
“그런데 왜 적하에게 서두르라고 하신 겁니까?”
“아무래도 유명교주가 머리를 쓴 것 같다.”
“예?”
남궁천은 갑자기 유명교주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북방 정벌과 유명교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어서다.
남궁벽이 연적하와 남궁천을 번갈아 보며 설명했다.
“유명교주가 먼저 황제에게 북방 정벌을 돕겠다고 했다는구나. 황제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대장군 풍승에게 정벌을 지시했다고 한다.”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 전쟁으로 십만을 참수하겠다는 거군요.”
“맞다. 황제의 비호 속에 십만을 참수하겠다는 속셈이지. 황제와 유명교주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 성사될 게다. 교주가 풍지산을 떠나기 전에 만나야 하니 서두르도록 해라.”
“예!”
연적하가 씩씩하게 답했다.
사람 일 모른다더니, 아침까지 강경하게 반대하던 남궁벽이 서두르란다.
남궁천이 옆에서 거들었다.
“적하야 너에게는 잘된 일이다. 어떤 존재가 올지 조금 신경 쓰이지만 어차피 유명교주는 강호에 관심이 없으니까. 풍지산에서 혼자 열심히 지지고 볶으라지. 아버지, 삼년지약 후에 호천맹에서 유명교주와 전쟁을 하겠다고 해도 절대 관여하지 마세요.”
“호천맹에 그럴 여력이나 있을지 모르겠구나. 지금 같아서는 등을 떠밀어도 다들 뒷걸음질 칠 게다.”
남궁벽의 말에 남궁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삼십 년의 평화 때문일까?
칠파일문은 예전의 그 칠파일문이 아니었다.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연적하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럼, 저는 내일 새벽에 풍지산으로 출발할게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하루 이틀 거리가 아닌 탓에 참아야 했다.
다음 날 새벽, 연적하와 심통은 남궁세가에서 내준 이두마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
남직례성.
전초현.
어두컴컴한 초저녁.
무서운 속도로 관도를 질주하던 마차가 길가의 허름한 주막에 멈춰 섰다.
뒤이어 마부석에 앉아 있던 남궁세가의 마부 지일강이 마차를 향해 소리쳤다.
“연 나으리, 오늘은 이쯤에서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곧이어 마차 문을 열고 연적하와 심통이 내렸다.
연적하가 겨울바람에 꽁꽁 얼어붙은 지일강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 아무 때라도 괜찮으니까 추우면 쉬었다가 가자고 하세요. 우리는 마차에 있어서 추운 걸 잘 몰라요.”
“예, 예! 걱정하지 마십쇼.”
지일강의 다 죽어 가는 얼굴을 보며 연적하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남궁세가 출신의 마부는 조금도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십전무후 남궁연을 아끼는 마음이야 잘 알지만 저러다가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스러울 정도다.
지금도 그렇다.
해가 지기 전에 숙소를 찾아야 하는데, 마부는 그냥 내달렸다.
때마침 주막이 눈에 띄었으니 망정이지 노숙을 할 뻔했다.
십이월에 노숙은 무림 고수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정도로 힘들다.
일반인인 마부에게는 더욱 고된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말 그대로 목숨을 도외시하고 마차를 몰고 있었다.
연적하는 밖에서 말을 돌보겠다는 그를 반강제로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말보다 아저씨가 먼저 쓰러지겠어요. 심 노인 귀가 밝으니까 먹고 나가요.”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결국 지일강은 연적하와 심통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일강은 음식이 나오자 마파람에게 눈 감추듯 먹고 후다닥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저는 말을 좀 보러 가 보겠습니다.”
음식을 입에 가득 물고 있던 연적하와 심통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보내야 했다.
식사를 마친 뒤 차를 마시던 심통이 물었다.
“그런데 공자님.”
“왜?”
“저는 솔직히 풍지산에서 공자님이 남궁세가로 가자고 할 때 좀 놀랐습니다.”
“왜 놀라?”
“왕복하는 데만도 넉 달은 걸리니까요. 그렇게 오랫동안 가모님이 혼자 있어도 괜찮은 겁니까? 어딘지도 모르는 이상한 곳이잖습니까?”
“왕들의 하늘?”
“예.”
“심 노인은 왕들의 하늘이 어떤 곳인지 알아?”
“모르죠. 저 하늘 밖에 있다면서요?”
“그래. 몇 개의 우주를 지나야 한다니 상상도 안 가. 내 머리로는 무리야, 무리.”
“그러니 더욱 서둘렀어야지요.”
“나는 연 누님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장인어른이나 천 형님에도 못 미치지.”
“확실히 공자님이 머리 쓰는 건 좀 문제가 있지요.”
“심 노인은 금사를 못 봤지? 금사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기가 질리더라. 천하십대고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금사는 무서웠어.”
“그 정도입니까?”
심통이 뜨악한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그의 입에서 ‘무섭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희대의 마녀, 유명교주도 옆집 할머니 대하듯 하던 연적하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보다 더 뛰어난 뭔가가 온다잖아. 아무리 내가 뻔뻔해도 심사숙고를 해야 할 때 정도는 알아. 나는 항상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사람이야.”
“그건 저도 알지요.”
심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적하가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상당히 꼼꼼한 편이며, 감당할 수 있을 경우에만 사고를 쳤다.
“그래서 남궁세가에 갔던 거야. 연 누님 다음으로 똑똑하고 믿을 수 있는 분들이니까.”
“그 정도의 시간은 괜찮았던 거군요?”
“누님이 범천욕계왕재천(梵天欲界王在天)이라는 고서를 읽고 해준 말이 있어. ‘왕재천’이라는 곳은 지상 낙원이나 다름 없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네?”
“‘왕재천’이면, ‘왕들의 하늘’ 아닙니까? 허! 삼두견과 흑기사가 온 세상이 지상낙원이라고요?”
심통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십두마병처럼 저승에서 온 마물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지상낙원에서 온 생김새 같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