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01
501회. 세상은 그 정도로 망하지 않습니다.
팔황신모는 운명론자였다.
그래서 자신의 사문인 태일관을 몰살시킨 것이라든가, 수도자들을 제물로 바쳐 천두마왕이 된 것 따위를 운명으로 치부했다.
운명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신언(神言)만큼이나 절대적이었다.
유명교에 방해가 되는 연적하에게 관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녀는 연적하와 십전무후 남궁연이 자신의 운명과 얽혀 있다고 믿었다.
연적하는 어린 시절에 죽은 동생의 화신이라 생각될 정도로 닮았고, 십전무후는 금사가 선택한 제물인 까닭이다.
그 운명의 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너도 십전무후처럼 제물이 되고 싶으냐?”
그 말은 ‘너도 왕들의 하늘로 가고 싶으냐?’라는 질문과도 같았다.
연적하가 쏘아붙이듯 답했다.
“그래요! 당신도 양심이 있다면 나를 연 누님에게 보내 줘요. 안 그러면 풍지산에 마물이 들끓게 만들 거예요.”
십두마병과 백두마군을 죽이겠다는 소리다.
그러자 팔황신모는 지난밤 금사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흉내 냈다.
“너를 왕들의 하늘로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네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쓸 것 없어요. 그러니까 보내 줘요.”
“네 문제라고 했느냐?”
팔황신모가 가소롭다는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내 문제라니? 그는 아직 자신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도 무슨 문제가 있나요?”
“전혀 없다. 그러니 나와 관계된 문제라고 생각지는 마라. 네 말대로 이건 너의 문제니까.”
“뭐가 문제라는 거죠?”
“초혼제(招魂祭)가 등가교환(等價交換)이라는 것을 벌써 잊었느냐?”
“등가교환?”
“여량 정인문의 문주 우인몽으로는 삼두견, 적월로는 흑기사, 그리고 십전무후로 금사가 왔느니라. 이 말을 듣고도 짐작가는 바가 없느냐?”
“묻지 말고 그냥 말을 해요.”
“적월 이전까지는 초혼제가 실패했거나, 성공해도 마물이 강림했을 뿐이다. 제물에 따라 소환 대상이 결정되는 셈이지. 나는 십전무후를 쓰고서야 제대로 된 신격을 소환할 수 있었다. 금사 말이다.”
“그래서요?”
“너는 너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설마 내가 부족해서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자 팔황신모가 피식 웃었다.
“천만에. 그 반대다.”
“그럼 됐지 뭐가 문젠데요!”
“너의 무위는 십전무후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가히 천하십대고수에 비견될 정도지. 그런 너를 대신해서 ‘왕들의 하늘’에서 누가 올 것 같으냐?”
“누가 오는데요?”
“‘왕들의 하늘’은 세 명의 천신(天神)과 여덟 왕, 그리고 아홉 군주가 다스리는 곳이다. 십전무후를 제물로 소환한 금사는 아홉 군주 중의 하나지. 그보다 뛰어난 너를 제물로 쓰면 누가 올 것 같으냐? 어쩌면 왕의 신격이 강림할지도 모른다. 군주인 금사도 절대지경보다 뛰어난데 왕이라니! 너는 그 힘을 상상할 수 있겠느냐?”
“나는 별로 관심없어요.”
“아니, 관심을 가져야 할 게다. 너는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할지 알고 있으니까.”
“…….”
순간 연적하는 할 말을 잃었다.
십만 명의 참수.
무슨 일이란 그 미친 짓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소환된 존재와 나는 심령이 연결되지. 삼두견과 흑기사를 보았겠지? 신격인 금사조차도 내 뜻을 거역하지는 못한다. 왕도 그럴 테지. 아무리 왕이라 해도 신격의 일부만 강림할 테니까.”
“서론이 기네. 본론을 말해요.”
“금사와 장차 강림할 왕을 누가 상대할 수 있겠느냐? 호천맹? 녹림? 남맹? 후후, 살려 달라고 나에게 무릎 꿇고 애원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
“나는 불로불사를 이룰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금사와 왕의 힘으로 십만 명을 참수하겠다. 그래도 ‘왕들의 하늘’로 가고 싶으냐? 십전무후와 십만 명의 목숨을 맞바꾸겠느냐는 말이다.”
연적하는 답하지 못했다.
지금의 유명교와 금사만 해도 호천맹과 녹림이 감당하기 어렵다.
거기에 금사보다 뛰어난 뭔가가 더해진다면?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유명교주의 말처럼 될 것이다.
연적하가 머뭇거리자 팔황신모가 말했다.
“십전무후에 대한 너의 마음도 불로불사를 향한 나의 열망에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마음이 정해지면 그때 연락하도록 해라.”
팔황신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돌아서 나가려는 그녀에게 연적하가 물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겠죠? 원하는 게 뭐예요?”
“그건 네 마음이 정해지는 날 말해 주마. 십만 명의 참수에 비하면 어려운 일도 아닐 게다.”
말을 마친 팔황신모는 어기충소의 수법으로 까마득히 날아올라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었던 구천노도 심통이 슬그머니 돌아왔다.
“공자님?”
“어.”
눈에 띄게 침울해진 연적하의 모습에 심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기가 잘 안 됐습니까?”
“잘 됐어.”
“표정은 영 아닌데요?”
심통은 연적하의 안색을 살피며 마루로 올라갔다.
그때까지도 연적하는 넋 나간 얼굴로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하아! 미치겠네.”
탄식하던 연적하는 심통에게 팔황신모와의 대화를 들려주었다.
“……나더러 마음이 정해지면 연락하라네. 아무리 불로불사에 미쳤다고 해도 그렇지. 십만 명을 참수하겠다니? 천두마왕이 되더니 사람을 파리처럼 여긴다니까.”
심통이 기막힌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 십만 명이라니. 평생을 사파에서 지냈지만 팔황신모 같은 마두는 처음 봅니다.”
“심 노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어?”
연적하의 질문에 사파에서 닳고 닳은 심통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한참 고민하던 심통이 슬며시 말문을 열었다.
“유명교주 말입니다. 어차피 공자님이 ‘왕들의 하늘’로 가든 말든 십만 명을 죽일 거 아닙니까?”
“그러겠지.”
“그렇다면 뭘 고민하십니까? 가모님이라도 구하십시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금사만 해도 벅찬데 또 뭐가 올지 몰라서. 호천맹과 녹림, 남맹이 연합한다고 해도 감당하지 못할 거야.”
“지금 공자님이 남 걱정하실 때입니까?”
“걱정 안 하게 됐어? 나 때문에 세상이 망할지도 모르는데?”
“공자님, 세상은 그 정도로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면?”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안 담그시게요?”
“구더기 따위가 아니니까 그러지.”
“공자님 마음대로 하십쇼. 제가 공자님이라면 ‘왕들의 하늘’로 가겠습니다.”
머리를 설레설레 젓던 연적하가 말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긴요. 당연한 걸 가지고.”
심통은 더 이상 ‘어떻게 할 거냐?’고 묻지 않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연적하의 마음이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연적하와 심통은 교구현을 떠났다.
남궁세가에 남궁연이 ‘왕들의 하늘’에 살아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
연적하와 심통이 남직례성 합비의 남궁세가에 도착한 것은 십이월 중순경이었다.
안채.
검왕 남궁벽이 안쓰러운 눈으로 초췌한 몰골의 사위 연적하를 보았다.
반년이 넘도록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닌 그는 누가 봐도 유랑 낭인이었다.
납치된 뒤에 사라진 딸보다 사위인 그가 더 걱정이 될 지경이다.
“얼굴이 상했구먼.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예, 아직 쌩쌩해요.”
연적하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양팔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였다.
“네가 건강해야 연이도 찾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설사 연이를 찾는다 해도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또한 의미가 없음이야.”
“예, 녹림에 있으면서 여행을 자주 다녀서 괜찮아요.”
연적하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녹림에 침투한 십두마병을 잡으러 일 년 가까이 돌아다닌 적도 있었으니까.
물론 그때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눈치를 보고 있던 청운검 남궁천이 조심스레 물었다.
“적하야, 연이에 대한 소식은 있느냐?”
“예. 실은 그 문제로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달려왔어요.”
“상의할 게 있다고?”
연적하는 남궁벽과 남궁천에게 팔황신모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 혼자 결정하기에는 너무 큰 일 같아서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가고 싶은데, 여덟 왕 중에 하나가 오기라도 하면……. 아니, 아홉 군주 중에 하나만 더 와도 세상은 유명교주의 뜻대로 될 거예요.”
남궁벽의 입이 쩍 벌어졌다.
유명교주보다 강한 존재가 풍지산에 있다니!
유명교주도 천하십대고수의 아래가 아닌데, 그보다 강자라니 기가 막혔다.
“금사라는 자가 그렇게 강해 보이더냐?”
“예, 제가 어검술로 조종하고 있는 청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강탈해 가더라고요. 신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저보다 한 수 위로 보였어요.”
연적하가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하자 남궁벽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적하는 천하십대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고수다.
그런데 그보다 한 수 위라니?
결국 천하십대고수보다 강하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금사라는 자의 본심을 알 수가 없구나. 유명교주에게 십만 명을 참수하라고 했다니. 사람을 죽임으로 신적 존재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거늘.”
“그 금사 때문에 유명교주도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혹시 신살자(神殺者)를 말하는 거냐?”
남궁천의 말에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도 결국 ‘누군가를 죽임으로 내가 풀려난다’는 거잖아요.”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군.”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십만을 죽이는 것’과 ‘금사를 죽인다’는 어딘가 닮아 있었다.
“금사가 유명교주 허파에 이상한 바람을 집어넣었네! 유명교주가 너를 붙잡고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아신다고요? 왜 그런 건데요?”
“오래전 구천노도가 이매망량의 독에 중독됐을 때를 생각해 보거라. 그때도 백두마군을 데려오라는 조건을 걸지 않았느냐?”
“그랬죠.”
“이번에는 금사를 죽이는 데 한 손 거들라고 할 게다. 혼자서는 금사를 죽일 자신이 없을 테니까. 신살자가 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할 테지.”
“그전에 제가 왕들의 하늘로 갈 텐데요?”
“그 정도야 기다려 줄 테지. 적월 때에도 꽤 오래 기다리지 않았느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궁벽이 한마디 했다.
“‘왕들의 하늘’로 갈 생각인가 보구나.”
“…….”
연적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침묵은 곧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일대의 협객인 남궁벽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유명교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사파는 유명교주를 막지 못한다. 그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겠지?”
그러자 남궁천이 끼어들었다.
“적하가 가지 않으면, 유명교주를 막을 수는 있답니까? 없습니다. 적하가 가든 안 가든, 유명교주는 십만 명을 참수할 겁니다.”
“그래서? 유명교주가 금사보다 더한 마물을 손에 넣어도 괜찮다는 거냐? 대놓고 십만 명을 참수하겠다는 사람에게? 천하인들이 적하를 원망하고 저주할 게다.”
남궁벽과 남궁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부자간의 눈싸움이 길어지자 연적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싶어 달려왔는데 십만 명의 참수를 막을 방법은 없는 모양이다.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심통의 말대로 남궁연이라도 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