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50
550회. 사매, 내 여자가 돼라
산음현에서 연적하의 뜻에 거스를 사람은 없다.
특히나 같이 살아가는 현천문도들에게 그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정덕행은 사형제들의 배웅을 받으며 동문으로 향했다.
대낮이라 동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와는 별개로 동문의 관병들은 습격의 여파 때문인지 잔뜩 긴장한 얼굴이다.
정덕행이 초소로 다가가자 관병 중에 하나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무슨 일인가?”
“자경단에 가입하려고 왔는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 자경단을 찾아왔다고? 그렇다면 저쪽으로 가게.”
관병이 길 건너편의 대형 천막을 가리켰다.
천막 지붕을 뚫고 나온 굴뚝으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덕행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화로를 끼고 방에 틀어박혀 있어도 추운데 천막이라니!
그는 마치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소처럼 터덜터덜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자경단 천막.
정덕행은 제법 두께가 느껴지는 천막 문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내부는 보기와 달리 넓고 훈훈했다.
그가 들어서자 한가하게 잡담을 나누고 있던 자경단원들이 일제히 쳐다보았다.
그들 중에는 현천문도들도 있었다.
“자경단에 가입하려고 왔습니다만 어느 분께 신청해야 하는지…….”
그러자 한쪽 구석에 있던 초로의 노인이 장부를 들고 다가왔다.
“잘 왔네. 나는 소이문의 장로인 강수성이네. 장하신 소협은 어느 문파의 제자이신가?”
“현천문의 삼대제자 정덕행이라 합니다.”
강수성이 장부에 이름을 기록하며 말했다.
“현천문의 정덕행이라. 오늘 현천문에서만 두 분이 오셨구먼. 환영하네. 눈이 녹을 때까지 잘 지내 보세나. 매일 나와 있는 게 힘들겠지만 나름 좋은 점도 있다네.”
“좋은 점요?”
“관병들과 안면을 익혀 두면 동문에서만큼은 관병들에게 대우를 받을 걸세. 그건 부수적인 거고 진짜는 따로 있네. 훗날 자네가 관리가 된다면 남들보다 빨리 진급하게 될 걸세.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관리가 되어야겠지만 말이야. 그럼 적당한 자리에서 쉬도록 하게.”
강수성이 눈을 찡끗해 보인 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정덕행은 선배 자경단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나누었다.
야수가 출몰하면 함께 싸워야 하니 그 정도 정성은 들여야 했다.
인사를 마친 그는 쭈뼛쭈뼛 연적하에게 다가갔다.
“연 대협, 말씀하신 대로 자경단에 가입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약속대로 무공을 지도해 달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그러자 연적하가 뚱한 얼굴로 답했다.
“조장님 말씀 못 들었어요? 적당한 자리에서 쉬라고 하셨잖아요?”
“아, 예.”
정덕행은 다섯 명의 현천문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젠장, 이게 아닌데…….’
공지섭과 공지유 남매와 뚝 떨어져 앉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영 편치 않다.
눈치를 보던 정덕행은 슬그머니 일어나 천막 밖으로 빠져나갔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기운에 육신은 괴로웠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가만히 있으려니 더욱 추워서 정덕행은 동문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저 멀리 가리산이 보였다.
‘씨발…….’
삼 년 전 봄.
가리산.
미시 초(오후 1시).
현천문 이대제자 천산월은 제자들을 불러 모은 뒤에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이번 산행(山行)의 목적은 약초 채집 훈련이다. 이 작은 산에 무슨 대단한 약초가 있겠느냐마는, 운 좋게 약초를 캔다 해도 모두 현천문의 것이니 욕심은 금물이다.”
스승의 지적에 여섯 명의 제자들은 가볍게 웃었다.
“산중에서의 훈련이니 동문 간의 우애와 협동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혼자 튈 생각을 버리고 어떻게 해라?”
그의 물음에 여섯 명의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동료를 배려해라!”
고개를 끄덕이던 천산월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가리산에는 ‘초급(草級)’ 야수인 ‘거록(巨鹿)’과 ‘타우(脫牛)’가 있다. ‘초급’이라고 녀석들을 얕보면 안 된다. 아무리 ‘초급’이라 해도 너희들로는 무리이니까. ‘거록’과 ‘타우’는 온순해서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발정기의 숫컷 ‘타우’는 난폭하고 사나워 먼저 덤벼들 수 있다. 그럴 때는 원진(圓陣)을 구성하고 버텨라. 언제까지?”
여섯 명의 제자들이 즉시 답했다.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래, ‘타우’는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는다. 몇 차례 건드려 보고 방어가 단단하면 금방 포기하지. 그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알겠느냐?”
“예!”
“지금부터 개인행동은 불허한다. 최소한 이 인 일 조로 다니되, 다른 조와 이십 보 이상 떨어지지 마라. ‘서로 시야가 닿는 범위 안에 있으라’는 말이다. 그럼, 출발해라.”
여섯 명의 제자들은 옆 사람과 짝을 이뤄 천천히 산으로 올라갔다.
제자들의 뒤를 천산월이 느긋하게 따라갔다.
‘출발해라’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덕행은 공지유의 옆으로 이동했다.
그의 움직임을 시작으로 삼대제자들은 두 사람씩 조를 이루었다.
일각(15분)쯤 지났을까?
조원들과 거리가 벌어지자 정덕행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사매, 보름 후에 내가 불우산으로 가는 거 알지?”
“네.”
“아버지가 길몽(吉夢)을 꾸셨대. 어쩌면 이번에 현천문 최초로 소요종 제자가 나올지도 몰라.”
“아, 네.”
정덕행이 공지유를 힐끔 보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잡풀에 고정되어 있었다.
약초학에 입문한 지 일 년이 지났으니 한창 빠져 있을 시기이기는 하다.
그래도 그렇지 소요종의 제자가 될지도 모른다는데 ‘아, 네.’는 좀 심했다.
“사매.”
“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진지하게 듣자.”
“듣고 있어요.”
여전히 그녀의 눈은 풀숲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괜히 심술이 난 정덕행은 들고 있던 막대기로 그녀가 보고 있는 풀을 헤집었다.
“왜 그러세요?”
“내가 소요종에 들어가면 사매는 나랑 눈도 못 마주쳐. 괜히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옆에 있을 때 잘해.”
“잘하고 있잖아요.”
“뭘 잘해? 남이 말하는데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약초를 캐야 하니까 그러죠. 약초 안 캐실 거예요?”
“우리가 무슨 약초꾼이야? 약초 캐는 걸 배우게? 우리는 무인이야, 무인.”
“무슨 소리예요? 약초학은 종문 제자들도 배운다고 하던데.”
공지유의 시선이 다시 풀숲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정덕행이 불쑥 말했다.
“내가 사매 좋아하는 거 알지? 난 소요종 제자가 돼도 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사매, 내 여자가 돼라.”
“…….”
공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덕행이 물었다.
“대답은?”
“싫어요.”
“뭐?”
정덕행이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공지유를 보았다.
자신은 훤칠하게 생긴 데다가 가문도 좋아 따르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볼게요’도 아닌 ‘싫어요’라니?
“싫다고요.”
“왜?”
“사형은 왜 제가 좋은데요?”
“좋으니까.”
“저는 싫어요.”
“왜 싫은데?”
“싫으니까요.”
정덕행은 자신을 거부하는 공지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산음현의 총각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자신을 거부하다니?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러는 것이리라.
“나 그냥 해 본 말 아니다. 진짜 소요종 제자가 돼도 변심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니까?”
“죄송한데 사형이 변심하든 말든 저는 관심 없거든요?”
“그건 네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산음현에 나만 한 남자가 있는 줄 아냐?”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공지유가 빠르게 발을 놀렸다.
“멈춰! 두 사람이 함께 다니라는 말 못 들었어?”
“함께 다니고 싶으면 이상한 소리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안 그러면 사형과 같이 다니지 않을 거예요.”
“서라고! 혼자 가지 말라니까!”
말과 함께 정덕행은 들고 있던 막대기를 그녀의 앞으로 길게 내던졌다.
막대기의 효과인지 공지유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게 같이 가자니까.”
정덕행이 씨근덕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갈 때다.
갑자기 공지유가 뒤쪽으로 손을 내뻗었다.
“사형, 오지 마요.”
하지만 정덕행은 그녀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고 가까이 다가갔던 그는 한순간 얼음처럼 굳었다.
때마침 두 개의 거대한 뿔을 가진 ‘초급’ 야수 ‘거록’이 나무 아래에서 사납게 울어 댔다.
“무우우! 무-!”
흥분한 듯 앞발로 땅바닥을 때릴 때마다 ‘퍽퍽!’ 소리와 함께 땅거죽이 뒤집혔다.
‘거록’ 근처에 떨어져 있는 막대기를 보니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던진 막대기가 하필 ‘거록’을 자극한 모양이다.
거칠게 머리를 뒤흔들던 거록이 한순간 정지했다.
정덕행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거록’의 흥분이 최고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이윽고 ‘거록’과 눈이 마주친 순간, 정덕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가리산을 보며 부끄러운 과거를 회상하던 정덕행이 버럭 소리쳤다.
“씨바알-!”
진짜 씨발이다.
‘거록’의 붉은 눈과 마주치자마자 앞뒤 생각 없이 달아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막대기가 ‘거록’을 자극했다는 건 착각이었다.
사실 그곳에서 ‘거록’과 신경전을 벌인 건 철갑사(鐵甲蛇, 단단한 피부를 가진 뱀)였다.
그것도 모르고 공지유를 내팽개치고 달아났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공지유는 그날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 뒤로 공지유와는 어색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잊으려 할수록 가리산의 일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씩씩거리다가 잠자리에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부친의 길몽에도 불구하고 소요종에서 개최한 ‘비승과해’에서 떨어졌다.
그 이듬해 성주의 친위대를 뽑는 시험에 도전했지만 낙방했다.
모두 가리산의 여파다.
마음에 그토록 큰 돌덩어리를 안고 있었으니 결과가 좋을 리가 있나.
그 수치스러운 기억이 자신의 인생을 말아먹었다.
공지유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아니, 거절하더라도 천 사부의 지시를 어기고 단독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막대기를 던지는 일은 없었다.
그랬다면 ‘거록’의 발밑에 깔린 게 철갑사였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결국 자신을 망하게 한 건 공지유다!
그가 한창 공지유를 원망하고 있을 때 관병과 자경단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오?”
“정 소협! 뭐가 나타났소?”
그제야 정덕행은 ‘아차!’ 싶었다.
자신의 외침에 야수라도 출몰한 줄 알고 우르르 몰려온 모양이다.
“아닙니다. 열심히 해 보자고 기합을 넣던 중입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별일 아니라니 다행이구려.”
관병들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바로 돌아갔다.
자경단은 중요한 전력이라 별것도 아닌 일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아서다.
자경단도 하나 둘 걸음을 돌렸다.
잠시 후 자경단들마저 모두 돌아가고 연적하와 정덕행만 남았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정덕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정씨.”
연적하의 말투가 다시 변했다.
그걸 깨달은 정덕행이 긴장한 얼굴로 답했다.
“예?”
“누굴 귀머거리로 알아? 뭐? 기합을 넣던 중이라고? 무슨 기합을 욕으로 넣어? 씨발 그거, 설마 나 들으라고 한 소리야?”
“그,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뭔, 천막에서부터 똥 씹은 얼굴이더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앞에서 해. 소인배 새끼들처럼 뒤에서 욕이나 처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