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6
56회. 그래서 어쩌라고
수풀이 묵직하게 흔들리더니 전신에 피 칠갑을 한 늙은이가 튀어나왔다.
노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좌우를 살폈다.
무영신투 백교였다.
곧이어 중년인, 천일보가 절뚝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헉! 헉! 씨펄!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지랄이래. 고작 다섯 명 때문에. 씨펄!”
백교는 더 이상 따라붙는 사람이 없자 들고 있던 검을 칼집에 넣었다.
“하악! 하악! 어르신, 산을 두 개나 넘었으니 이젠 끝난 거겠지요?”
말과 함께 천일보는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는 어디에서 칼을 떨궜는지 맨손이었다.
초식동물처럼 귀를 쫑긋거리던 백교도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휴우! 염가는?”
그래도 한 일 년여 데리고 다니며 정이 들었는지 염사웅의 안위가 궁금한 모양이다.
“죽었습니다.”
“병신 같은 놈. 맞설 생각을 하질 말았어야지. 누군 싸울 줄 몰라서 달아났나.”
백교는 요령껏 상방의 무사들만 골라 베면서 도망쳤다.
행여나 낙양오협이 달라붙기라도 할까 봐 칼도 딱 한 번씩만 썼다.
솔직히 적풍채가 작정하고 맞상대했으면 양패구상 할지언정 일방적인 학살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낙양오협을 피해 도주를 명한 채주의 결정은 옳았다. 비록 수하들의 절반가량을 잃었지만 보복당할 염려는 없으니까.
“어르신,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아! 오늘은 위험하니 내일쯤 산채로 가 보자.”
백교가 멍한 눈으로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녹림에 몸담은 뒤로 요즘처럼 살기 힘든 적이 없다.
채주인 염라도부 장한위는 지금까지 약탈한 재물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했다. 지난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은자 열 냥쯤 만져 본 것 같다. 그걸 위해 부채주인 살인대도 요범에게 얼마나 살랑거렸는지 모른다.
‘차라리 이참에 오봉산으로 돌아가 볼까.’
그래도 풍연초는 욕심이 없어서 부하들을 잘 챙겼다.
오늘따라 오봉산채로 돌아간 구밀복검 심양각이 부럽기만 하다.
“너, 가진 돈이 좀 있느냐?”
“은자 한 냥쯤 있습니다.”
백교가 부러운 얼굴로 천일보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다 닦아 쓰고 한 푼도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모았는지 모르겠다.
“쩝, 그 돈이면 보봉현에서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겠군. 에혀! 가자.”
“예.”
급히 일어난 천일보가 절뚝거리며 앞장섰다.
***
평정산.
낙양오협은 화양상방의 상인과 무사들에게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짐을 덜었습니다.”
“낙양오협의 협명이 사해에 울려 퍼질 겁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협객이십니다.”
이소민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는 보통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감동이 밀려온다. 이 맛에 정파의 협객들이 사마외도를 응징하고 다니는가 보다.
한차례 폭풍 같은 인사가 끝나고, 상단이 다시 움직였다.
천풍도 양무기가 자연스럽게 낙양오협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하! 수고들 했네. 다들 실전은 처음이라더니 펄펄 날더군. 자네들 협행이 낙양에 전해지면 집안의 어르신들도 기뻐할 걸세.”
한순간 낙양오협의 표정이 움찔했다.
공인받고 나선 강호행이 아니라서 다들 켕기는 모양이다.
“이틀 후면 오봉산이네. 그곳에도 녹림의 산채가 하나 있지.”
황동엽이 양무기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곳의 규모는 어떻게 됩니까?”
솔직히 황동엽은 상대하기 버겁다 싶으면 걸러 갈 생각이었다. 녹림을 상대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다.
양무기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적풍채보다 작고, 성정도 온순한 편이네. 요구하는 통행세도 다른 녹림에 비하면 거의 푼돈 수준이지.”
가만히 듣고 있던 연설주가 한마디 던졌다.
“그래도 남의 재물을 빼앗아 가는 건 죽어 마땅한 짓이에요.”
“맞는 말이네. 그래 봤자 그들은 도적이지. 다만…….”
양무기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이소민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네.”
머뭇거리던 양무기는 전임 대주에게 들은 비사를 털어놓았다.
“……솔직히 천지상인이 정말 오봉산채에 갔었는지조차 불명확하네. 만수상방에서는 그 부분에 있어 해명조차 하지 않고 있지. 물론 여러 사람의 체면이 달려 있으니까 이해는 가지만.”
“그러니까 ‘오봉십걸의 무위가 생각보다 높을 수도 있다’, 뭐 그런 뜻입니까?”
황동엽의 물음에 양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봉산채를 토벌하러 간 상방은 많았지만 성공한 상방이 없네. 거의 무패라고 봐도 될 정도지. 물론 군소 상방들이 개별적으로 시도한 거라 의미 없는 전적이지만 말일세.”
이소민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칠파이문을 상대로 싸워서 승리했다면 모를까? 고만고만한 군소 상방을 상대로 무패라는 표현은 과한 거 아닌가요? 한낱 도적들에게.”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내 전임자도 그들에게 패했는데 무한의 천풍문 출신이지. 칠파이문과 비교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나 할까.”
양무기는 이소민 앞에서 칠파이문에 대한 자부심을 슬쩍 드러냈다.
다른 낙양오협들은 듣고도 못 들은 척 넘겼다.
그들 역시 칠파이문의 직전제자가 아니라서 자존심은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듯 입술을 삐죽이던 연설주가 한마디 했다.
“가요! 우리가 오봉산채의 도적들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 주자고요!”
“연 매, 나도 찬성이야. 오봉십걸인지 뭔지 박살 내 주자고. 흥! 도적 주제에 십걸이 뭐야, 십걸이.”
이소민까지 거들자 분위기는 토벌로 기울어졌다.
대충 결론이 나자 황동엽은 양무기에게 정중히 요청했다.
“양 대협, 오봉산채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십 대 초중반인 낙양오협은 삼십 대 중반인 양무기를 대협이라 칭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그에게 소협이라고 부르기 뭐해서다.
“하하! 알겠네. 그들도 자네들의 정체를 알면 꽁지가 빠지게 달아날 걸세.”
양무기는 패기만만한 후배들을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저들처럼 강호행을 하던 이십여 년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
보봉현.
오봉산.
하가촌에서 점심을 해결한 화양상방의 상단은 느긋하게 오봉산으로 들어갔다.
낙양오협의 신위를 확인한 상인들은 전과 달리 주변 풍광까지 감상했다.
그래도 신의대주 양무기는 일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기는 싸움이라 해도 까딱 잘못하면 생사가 갈릴 수 있으니 당연하다.
“멈춰라!”
호통과 함께 이십여 명의 도적이 길을 막았다.
불과 이틀 전에 사십여 명의 도적을 일방적으로 도륙한 신의대 무사들이 실소를 흘렸다.
당랑거철이라는 말에 맞는 상황이다.
고작 이십여 명으로 신의대 열다섯과 낙양오협의 앞을 막아서다니!
독심낭인 황요명이 상단을 슥 둘러 본 뒤에 말했다.
“양 대주? 화양상방이지? 이번에는 상인이 몇이야? 적당히 후려치자고.”
그러자 양무기가 스산한 얼굴로 답했다.
“이놈! 오봉십걸의 이름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구나! 오늘 오봉산에 누가 왔는지 안다면 그러지 못할 텐데?”
순간 황요명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상방 무사들도 전과 달리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쫄 황요명이 아니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오봉십걸이 산채에 있는데 칼부림을 하자는 건가?’
“양무기! 네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오봉산의 주인이 누군지 그새 잊었단 말이냐? 우리 풍 채주님이 계속 봐주니까 만만해 보이지?”
이번에는 연설주가 한 걸음 나서며 받아쳤다.
“흥! 주인 좋아하시네. 네놈들이 오봉산을 돈 주고 사기라도 했단 말이냐? 말이 필요 없다. 오봉십걸이라는 도적들이 누구냐? 낙양오협께서 친히 왕림하셨으니 앞으로 나서라!”
“미친년! 감히 오봉십걸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입에 담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낙양오협이라고 했냐? 어디서 굴러먹던 연놈들인지 몰라도 오늘이 제삿날인 줄 알아라!”
“뭐, 뭐라고!”
난생처음 듣는 욕설 앞에서 연설주가 파르르 떨었다.
제대로 된 소개도 하기 전에 칼질이 날 것 같자 양무기가 나섰다.
“너 이놈! 낙양오협이 누군지나 알고 망발이냐! 의천문과 와룡장, 팔선문, 대연문, 칠양문의 일대제자들이다. 네놈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
황요명은 의천문이라는 소리에 찔끔 놀란 얼굴이지만 그렇다고 꼬리를 내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병신아! 오봉산에서는 오봉십걸이 왕이야!”
‘헐!’
지켜보던 황동엽은 투기 넘치는 도적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의천문과 와룡장의 이름까지 나왔건만 오봉산의 도적들은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심지어 적풍채의 절반에 불과한 숫자로 살기등등하기까지 하다.
처음으로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달아나는 사십 명보다 눈앞의 저 이십여 명이 더 위험한 것은 자명한 사실.
게다가 얼마나 무공에 자신이 있으면 저렇게 기세등등할까?
긴장으로 황동엽의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 갈 때다.
면전에서 대놓고 욕먹은 연설주가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았다.
“감히 누구에게 미친년이래! 죽여 버리겠어!”
말과 함께 연설주가 저돌적으로 달려갔다.
적풍채의 경험으로 간이 부은 것도 있지만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탓이다.
그러자 거의 반사적으로 낙양오협이 그 뒤를 따랐다.
깜짝 놀란 양무기가 신의대 무사들에게 명했다.
“쳐라!”
기다렸다는 듯 십오 명의 무사들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곧이어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싸움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거침없던 말발과 달리 도적들의 무공이 약해서다.
도적 중에 다섯이 죽고 나머지는 사로잡혀 꽁꽁 묶였다.
비교적 손쉽게 싸움에서 이겼지만 신의대주 양무기의 표정은 어두웠다.
놀랍게도 오봉산채의 도적들은 단 한 놈도 달아나지 않았다. 심지어 사로잡힌 지금도 여전히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그 바람에 호위무사들이 둘이나 죽었다.
부상자도 다섯.
적풍채와의 싸움에서 경상자만 셋이 나온 것과 너무도 대조되는 결과다.
양무기는 낙양오협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들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이번 싸움에 대한 자체 품평을 하고 있었다.
‘좋지 않아.’
양무기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수하들도 이런데 오봉십걸은 또 얼마나 거칠까?
물론 오봉십걸에게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놈들이 의천문의 이 소저에게까지 칼질을 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강호의 생리를 전혀 모르는 놈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럴 경우 피차에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족보의 무게를 모르는 도둑이나 그런 도둑을 만난 낙양오협이나…….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됐으니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
그는 ‘일이 조금 꼬였지만 아직 걱정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믿었다.
화양상방은 굴비 두름처럼 엮인 도적들을 앞세우고 산채로 올라갔다.
산채로 향하는 길은 뻥 뚫려 있었다.
그 정도로 외침이 없었는지, 혹은 자신이 있어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산채의 앞마당에 들어갈 때까지 화양상방을 막아서는 사람이 없었다.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자 양무기와 낙양오협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녹림의 산채라고 해서 조악한 움막을 기대하고 왔는데, 그게 아니다.
넓은 앞마당에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꺅꺅’거리며 뛰어다녔다. 그 뒤로 거대한 전각과 제대로 지어진 그럴듯한 집들도 여럿 보였다.
뒤늦게 꽁꽁 묶인 도적들을 발견한 아이들이 송사리 떼처럼 흩어졌다.
잠시 후 불편해 보이는 몸을 이끌고 웬 노인 하나가 사람들 앞으로 나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