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5
55회. 천하 창생을 살리기 위해 싸운다.
낙양 동편 언사.
와룡장.
술시 초(오후 7시)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세상을 물들일 무렵, 와룡장이 발칵 뒤집혔다.
“뭐라고? 설주가 어떻게 됐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당장 그 애를 내 앞에 데리고 오거라!”
백미주의 음성이 대청마루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의 앞에 서 있던 맏아들 연무백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 강호행을 하겠다고 서찰에 남긴 걸 봐서는…….”
“그래서? 여동생이 집을 나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제까짓 게 뛰어야 벼룩이지. 낙양을 밤새 뒤져서라도 끌고 와!”
“강호행 운운했으니 낙양에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 어린 게 낙양에 있지 않으면? 혼자서 제가 무얼 할 수 있다고?”
연설주의 나이가 올해로 스물한 살이지만 백미주의 눈에는 여전히 아이였다.
“그게, 혼자가 아닐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혼자가 아니면 설주가 누구와 함께 나갔다는 것이냐?”
결국 연무백은 낙양오협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설주는 입만 열면 ‘낙양오협과 협행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들과 동행 중일 겁니다.”
“미친!”
백미주의 입에서 바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곱게 키운 딸이 강호의 여협 흉내를 내서 가출까지 할 줄이야!
“너는 오빠라는 놈이! 그걸 알면서도 여동생이 낙양에 들락거리게 내버려 두었단 말이냐! 네가 그러고도 오빠야? 제자들 걱정하는 거에 반만이라도 동생을 신경 썼어 봐!”
급기야 장자인 연무백을 향해 욕설까지 퍼부었다.
홧김에 그동안 연무백에게 섭섭했던 감정을 은근슬쩍 쏟아 낸 것이다.
연무백은 변명하지 않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도 설마하니 연설주가 집까지 나갈 줄은 몰랐다. 말이 강호행이지 가족들에게 그건 그냥 가출이었다. 그래서 더 충격이 컸다.
“당장 설주를 찾아와! 삼진상방에서 이 사실을 알면 설주가 위험해져! 어서 나가지 않고 뭐해!”
백미주의 호통에 연무백은 상승대 제자들을 이끌고 낙양으로 달려갔다.
이 밤에 소란이 난 건 와룡장만은 아니었다.
팔선문, 대연문, 칠양문, 의천문까지 난리가 났다. 의천문주 이연익은 즉시 제자를 풀어 낙양의 객잔은 물론 버려진 집까지 싹 뒤졌다.
그러나 낙양오협들의 털끝도 발견하지 못했다.
날이 밝자마자 네 집안의 대표들은 부리나케 의천문으로 달려갔다. 후속 대책을 세우기 위함이라지만 실은 의천문주 이연익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서다.
***
여주.
정오 무렵, 다섯 명의 청춘 남녀가 도시로 들어섰다.
비단옷과 번지르르한 병장기로 보아 명문가의 자녀들 같다.
그렇다.
그들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호행에 나선 낙양오협이었다.
이소민이 길 건너의 무릉반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저기서 뭐 좀 먹을까요? 상인들도 지나는 길에 들를 거 같은데.”
“그러자.”
“그게 좋겠다.”
다른 말이 없는 걸 보니 다들 꽤나 배가 고팠나 보다.
무릉반점에 들어간 낙양오협은 대충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음식을 시켰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하나둘씩 나왔다.
낙양오협이 막 식사를 시작할 즈음, 이십여 명의 손님이 밀려들었다. 등에 맨 봇짐과 나누는 대화를 보니 상방의 상인들이 분명했다.
황동엽은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뒤에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향하는 곳은 상인들의 탁자였다.
황동엽은 눈치껏 지휘자로 보이는 상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보아하니 상단 분들 같은데, 맞습니까?”
화양상방의 행수 정운관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는 한눈에 봐도 무림의 청년 고수였다.
그렇지 않아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는데 무슨 용무가 있나 보다.
“아, 예. 저는 신양현에 본점이 있는 화양상방의 행수 정운관이라 합니다.”
“이제 보니 정 행수셨군요. 나는 낙양오협의 첫째인 황동엽이라 합니다. 팔선문의 일대제자이지요.”
팔선문이라는 말에 정운관은 반색을 했다.
낙양을 오가는 상인치고 팔선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일대제자면 문주의 직계이니 잘 보여야 하는 게 당연하다.
“어이쿠! 팔선문 분이셨군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쪽에 있는 일행은 나의 의형제들입니다. 나처럼 대연문, 칠양문, 의천문, 와룡장의 일대제자들이지요.”
순간 정운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대연문과 칠양문이야 팔선문과 비슷한 위치라 해도 의천문과 와룡장은 급이 달랐다.
특히나 의천문은 당금 무림의 주인이라는 칠파이문의 하나다. ‘칠파이문에 아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누가 건드리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다.
정운관의 허리가 더욱 굽어졌다.
비록 낙양오협의 이름은 생소하지만 그들과의 인맥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까닭이다.
황동엽이 말을 이었다.
“실은 이번에 우리가 강호행을 나왔습니다. 일단 탑하로 가는 길에 녹림도들을 퇴치할 생각인데. 정 행수께서도 아시다시피 강호행 소리만 들어도 녹림도들이 꼭꼭 숨어서 나오지 않는 터라.”
“아!”
닳고 닳은 상인 정운관은 금방 상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강호행은 칠파이문의 제자들이 해마다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칠파이문에서는 강호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제자에게 문외 출입의 자유를 부여했다.
강호행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 당연히 그 대상은 강호의 악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거리에서 악인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강호행에 나선 협객들은 주로 작은 녹림 방파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오죽하면 ‘악인을 만나려면 산채로 가라’는 말까지 있을까.
그러나 작은 녹림 방파는 정파의 강호행에 상당히 비협조적이었다. 칠파이문의 신진고수를 상대하기도 쉽지 않지만, 재수 없게 사상자라도 나오면 반드시 보복당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강호행에 대한 소문이 돌면 세가 약한 녹림 방파는 외부 활동을 자제했다. 칠파이문의 신진고수를 건드리는 것은 벌집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물론 칠파이문도 상대하기 꺼려 할 정도로 거대한 산채나 수채들은 예외다. 그들은 칠파이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걸 아는 신진고수들도 그들을 피해 다녔다.
‘낙양오협이 적풍채와 오봉산채를 노리고 있구나!’
그건 화양상방에는 희소식이었다.
그 두 산채만 밟아 놓아도 통행료를 적지 않게 절약할 수 있으니 말이다.
“혹시 저희 상단과 동행하려고 그러시는 건지요?”
정운관의 말에 황동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오히려 영광입니다! 함께 가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잘 모시겠습니다.”
그 즉시 낙양오협의 화양상방 합류가 결정됐다.
정운관은 바로 신의대의 대주 천풍도 양무기를 불러와 낙양오협에게 소개했다.
양무기 역시 칠파이문인 무극문 출신의 제자인지라 낙양오협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는 이 기회에 적풍채와 오봉산채를 확실하게 찍어 누르자고 좋아했다.
삼십 대 후반인 양무기와 이십 대 초중반인 낙양오협은 금방 친해졌다.
그로부터 이틀 후.
신의대주 양무기가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산에 적풍채가 있네. 염라도부가 채주로 있지. 욕심만 많지 무공은 소문보다 뛰어나지 않네.”
양무기의 눈에서 신광이 번득였다.
지난번 호위대주가 은자 팔십 냥에 합의를 봤다고 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다녔다. 하지만 후배들도 있고 하니 이참에 판을 새로 짤 생각이다.
화양상방이 평정산으로 들어서고 일각(15분)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사십여 명의 도적들이 나타났다.
적풍채의 부채주 살인대도 요범이 장난스럽게 대도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여어! 양 대주!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시나? 그래도 계산은 하고 가셔야지.”
신의대주 양무기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적풍채의 호걸들을 기다렸소. 지난번 호위대주가 팔십 냥에 합의를 봤다고 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다녔는데, 이젠 계산을 정확하게 하고 싶어서 말이오.”
요범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정중하게 말했지만 저건 싸워 보자는 소리였다.
뒤쪽에 서 있던 염라도부 장한위의 입에서 대뜸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개 후레자식 같으니! 계산을 정확하게 하자고? 팔십 냥도 우는 소리를 해서 깎아 준 건데, 안되겠네. 들어라! 이 시간부터 저 새끼들의 통행세는 백 냥이다!”
“크크큿! 예!”
“알겠습니다요!”
적풍채의 도적들이 크게 웃으며 병장기를 머리 위로 붕붕 휘둘렀다. 초장부터 무력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대주 양무기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신의대 대원 열다섯이 학익진이라도 펼치는 것처럼 양무기의 좌우로 길게 늘어섰다.
그러나 채주 장한위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정말 한번 해보자 이거냐? 이것들이 요즘 피를 안 봤더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얘들아!”
그의 입에서 ‘쳐라!’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이다.
학익진 앞으로 다섯 명의 젊은 무인들이 걸어 나왔다.
낙양오협들이다.
첫째인 황동엽이 천천히 검을 뽑으며 말했다.
“네놈이 적풍채의 염라도부렷다. 오늘 낙양오협이 네놈의 목을 가져가려고 왔다. 살인강도 짓도 오늘로써 끝인 줄 알아라!”
‘이런 씨벌!’
장한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새파랗게 어린것들의 면상과 말을 들어 보니 강호행에 나선 신진고수들이다.
‘이겨도 의미 없고, 지면 두고두고 개망신이며, 행여나 상대에게 깊은 상처라도 입히면 후환이 무궁하다’는 그 강호행 말이다.
“낙양오협이라니? 너희들의 스승이 누구냐?”
장한위가 아무리 성질이 더럽다 해도 다리를 뻗을 자리 정도는 안다. 상대에 맞게 칼질의 수위를 조절해야 하니 신원 확인은 필수였다.
“나는 팔선문의 일대제자 황동엽이다!”
“난 대연문의 대제자 오중산이다.”
“칠양문의 손상극.”
“흥! 난 의천문의 일대제자 이소민이에요! 하늘을 대신해서 당신의 죄를 응징하러 왔어요!”
“난 와룡장의 일대제자 연설주다!”
장한위는 물론 요범의 얼굴까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팔선문, 대연문, 칠양문, 와룡장은 그렇다 치자. 저 의천문은 어쩌란 말인가!
장한위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이소민에게 물었다.
“이소민이라고 했느냐? 부친의 이름이 무엇이냐?”
“연 자, 익 자를 써요.”
강호 초행인 이소민은 상대의 질문에 선선히 답을 했다.
다른 때 같으면 흉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 반대였다.
“서, 설마 너는 의천문주 이연익의 딸이냐?”
“그래요.”
이소민이 고고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장한위와 요범의 낯빛이 대번에 거무죽죽하게 죽었다.
의천문주 군자검 이연익.
그도 무섭지만, 그의 부친이자 의천문의 태상인 의천검존 이의정은 공포 그 자체다. 천하십대고수의 일 인인 그는 녹림에서 염라대왕으로 통했다. 이소민의 얼굴에 생채기라도 냈다간 적풍채는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
‘씨바알! 씨바알! 왜! 왜!’
적풍채 채주 장한위는 흉악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라도 쏟을 기세였다.
목격자가 없다면 두려울 게 없지만 지금은 너무 많다.
이들을 모두 죽여 살인멸구 할 수 없다면 달아나는 게 상책이었다.
장한위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황동엽이 외쳤다.
“형제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천하 창생을 살리기 위해 싸우자! 쳐라!”
“예!”
“알겠습니다!”
낙양오협이 이구동성으로 답하며 달려 나갔다.
장한위가 미처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다.
가장 먼저 황동엽의 검이 장한위를 찔러 갔다.
장한위는 얼떨결에 도끼를 휘둘러 검을 쳐 냈다.
챙.
맑은 소리와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소민과 요범이 얽혀 돌아가고 있다.
정당한 대결이었어도 요범은 이소민을 당해 내지 못한다.
하물며 지금은 절대 상대에게 상처를 내면 안 되는 상황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불쌍한 요범의 상체는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튀어!”
장한위는 자신의 도끼를 황동엽에게 던지고 뒤로 내뺐다.
때마침 그때 요범의 박도가 뚝 부러졌다.
‘이때다’ 싶은 요범도 가까운 숲으로 달아났다.
뒤이어 ‘와아!’ 하는 고함과 함께 신의대 무사들이 전면으로 밀고 나갔다.
적풍채 산적들은 마치 태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이리저리 정신없이 내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