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94
594회. 어디서 자리 타령이야?
검서린 진인은 태을 존자도 인정한 소요종 최고의 미녀다.
단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한산월 제군의 적전제자인 그녀는 삼십 대에 ‘원영 육 성’을 이루었다.
원영을 만든 진인들의 다음 목표는 ‘원영지체(元變之體)’다.
그것은 원영을 육체만큼 키워 나가 마침내 합일하는 것으로 인내와의 싸움이었다.
그 지난한 세월 동안 진인들은 ‘천애불문비’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대신 소요종의 무공을 배웠다.
사실 종문에서 무공은 주(主)가 아니다.
무공을 익히는 것은 ‘원영지체’를 이룬 뒤에도 계속해서 살아남기 위해서일 뿐이다.
물론 경지가 올라갈수록 주객이 전도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 검서린 진인이 한동안 뜸했던 천애곡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이유는 비경(秘境) 진입의 준비를 위해서다.
‘원영 칠 성’에 도달한 진인들에게는 비경의 출입 권한이 주어진다.
비경은 신비지경(神秘地境)의 줄임말로 모든 진인들이 꿈에도 바라는 장소였다.
오직 비경에서만 검령(劍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검령은 ‘검의 원령(怨臺)’이라고도 불리는 초월적인 능력이다.
‘검강’이 ‘진검강’을 이길 수 없듯, ‘진검강’은 ‘검령’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자연히 약육강식의 종문 사회에서 검령은 가장 강력한 생존의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 초월적인 능력인 검령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검령은 스스로 인간을 선택했다.
인간과 초월적 존재인 검령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신비지경, 즉 비경이었다.
문제는 이 비경이 어느 한 종문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경의 문은 음기가 가장 강한 날 밤에 열렸다.
그때가 되면 아홉 종문에서 수련하던 고수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은원으로 얽힌 아홉 종문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분위가 좋을 리 없다.
비록 아홉 종문이 비경으로 통하는 신비지문(神秘之門) 앞에서의 싸움은 금지시켰지만, 비경 안에서의 살육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종문 간의 다툼과 경쟁은 비경 안에서 극에 달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비경에서 검령을 얻고 무사히 귀환하기 위해서는 영기를 갈고닦아야 했다.
그게 검서린 진인이 최근 들어 다시 ‘천애불문비’를 찾는 이유였다.
그건 다른 말로 그녀가 ‘원영 칠 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천애곡에서 검서린 진인은 아주 특별한 존재다.
한산월 제군의 제자라는 후광도 있지만, 검서린 진인의 존재 자체가 빛을 발했다.
그녀가 소요종 최고의 미녀이자 최고의 후기지수인 까닭이다.
천애곡을 찾는 자들의 대부분이 방사(연단)와 노사(연허)였다.
진인을 넘어가면 더 이상의 진전이 없어 사실상 ‘천애불문비’를 찾지 않았다.
이미 수백 년을 보았기에 새로울 게 없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비경을 준비하는 검서린 진인 같은 사람만 드나들었다.
‘방사’나 ‘노사’는 검서린 진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녀의 자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건 어쩌다 찾는 다른 ‘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검서린 진인의 선배였지만 그들은 검서린을 어려워했다.
검서린의 별호는 검후(劍后).
검의 최종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그녀의 자리를 탐할 진인은 없었다.
그 검후 검서린이 묘한 눈으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청년을 보았다.
처음부터 자리 따위에 연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우가 몇 달이고 반복되다 보면, 마침내 거기에 익숙해지고 만다.
그래서 지금은 나무 그늘진 바위 위를 자신의 자리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상대가 진인쯤 됐다면 자신에 대한 도발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명성을 위해 우회적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허리에 두르고 있는 하얀 띠를 보니 방사 중에서도 말단.
십중팔구 모르고 하는 행동임이 분명했다.
검서린 진인은 그런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너는 누군데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 이 시간이면 항상 내가 사용한다는 걸 몰랐느냐?”
막 ‘천애불문비’에 집중하려던 연적하가 고개를 돌렸다.
이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연적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자리에 주인이 있었나 봐요? 몰랐네요. 빈자리가 보여서 앉았던 것뿐이에요.”
고작 자리 하나로 여자와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비켜나며 여자를 보니 허리에 띠가 없었다.
최소한 노사(연허)라는 소리다.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강한 걸 보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자리에 앉으려던 검서린 진인이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자리에 주인이 있었나 봐요?’라니?
그건 혹시 ‘천애곡의 주인은 종문이지 네가 아니다’라는 비난인 걸까?
‘아니 그건 그렇고 이건 무슨 냄새지?’
고수답게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 그녀는 연적하가 남긴 냄새를 놓치지 않았다.
“멈추어라.”
“예?”
여자의 명령에 연적하가 엉거주춤 돌아섰다.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연적한데요?”
“어디 소속이냐?”
“소격각요.”
순간 부드럽던 검서린 진인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그가 소격각 소속이라면 저 냄새는 분명 뒷간에서 묻혀 온 것이리라.
청정한 자신의 자리에 뒷간 냄새라니!
그녀는 자신의 자리가 오물로 더럽혀지기라도 한 것처럼 발끈했다.
“감히 내 수도처를 더럽히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자리 발언으로 쌓였던 감정이 냄새라는 좋은 변명거리를 만나 폭발했다.
검서린 진인의 날카로운 호통은 무덤처럼 적막하던 천애곡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명상을 접고 검서린 진인과 청년 간의 다툼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대라각의 곽종산 노사(연허)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는 단번에 청년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헛! 저놈은?’
며칠 전의 ‘비승과해’ 때 자신이 삼일각까지 길 안내를 해 준 싸가지였다.
곽 선배, 곽 후배 해 가며 자신을 놀려 먹던 놈.
마지막에 ‘알았으니 가 봐요’라며 거만하게 손을 까딱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동안 보이지 않아 떨어졌으려니 생각했는데 용케도 방사가 된 모양이다.
그런데 척 보니 검후 검서린에게 단단히 찍힌 분위기다?
그는 한달음에 검서린의 앞으로 달려갔다.
“검서린 진인! 저는 대라각의 곽종산 노사라 합니다.”
“곽종산? 연적하라는 저 방사를 거들기 위해 나선거라면 그냥 물러나라.”
“저는 저놈의 편을 들기 위해 나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저놈이 얼마나 몹쓸 놈인지를 검후께 말씀드리기 위해 나왔습니다.”
“몹쓸 놈이다?”
검서린 진인이 관심을 보이자 곽종산은 연적하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놈은 금년에 ‘비승과해’를 통과하였는데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참가자 주제에 오히려 저를 후배라고 조롱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이참에 진인께서 저놈의 버르장머리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사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그러자 검서린 진인이 황당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너는 정말 곽 노사에게 후배라고 했느냐?”
“내가 설마 그랬겠어요? 처음에 ‘선배’라 불렀더니 ‘선배가 아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후배냐?’고 했던 게 전부인데요?”
잠시 생각하던 검서린 진인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연적하 네 죄가 크다. 팔 하나를 잘라 교훈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나, 이제 갓 입문하여 종문의 사정에 무지하니 죄를 감해 주겠다. 곽종산 노사.”
“예.”
“그대가 나에게 달려올 정도로 원한이 깊으니 나를 대신하여…….”
그때다.
뚱한 얼굴로 듣고 있던 연적하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전에 하나 물어볼게요. 우선 내 죄가 뭔지 설명 좀 해 줄래요?”
그러자 검서린 진인이 서늘한 얼굴로 답했다.
“진인의 수도처를 더럽힌 것과 대라각의 곽 노사를 능멸한 게 죄가 아니면 무엇이냐?”
“아니 내가 언제 진인의 수도처를 더럽혔다고 그래요?”
“뒷간 냄새나는 몸뚱어리로 내 자리를 더럽혀 놓고 발뺌할 셈이냐!”
순간 연적하의 눈에서 서릿발 같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야, 너 지금 냄새나는 몸뚱어리라고 했냐? 생기다가 만 게 선배라고 대접해 줬더니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내 몸에서 왜 뒷간 냄새가 나는 줄 알아? 그건 너 같은 인간이 싸질러 놓고 내버려 둔 똥을 대신 치워 줘서 그런 거야. 고마운 줄 모르고 어디서 냄새 타령이야! 그리고 이게 네 자리냐? 천애곡을 네가 돈 주고 샀냐고? 어디서 자리 타령이야? 하여간 덜 생긴 것들이 꼭 꼴값들을 떨어요.”
“…….”
검서린 진인은 갑작스러운 욕설에 눈만 끔뻑거렸다.
소요종 제일 미녀이자, 최고의 기재로 추앙을 받던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꿈만 같았다.
이게 정말 꿈이라면 지독한 악몽이다.
그녀가 ‘너’, ‘생기다가 만 거’, ‘지랄’ 등 상상을 초월한 욕설 앞에서 멍하니 서 있을 때다.
먼저 정신을 차린 곽종산이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연적하를 덮쳤다.
“이 미친노옴!”
그는 상대가 입문제자인지라 검도 뽑지 않았다.
대신 단순 무식하게 연적하의 얼굴을 커다란 주먹으로 후려쳤다.
하지만 가만히 맞아 줄 연적하가 아니다.
“그래 미쳤다! 어쩔래!”
한 걸음 슬쩍 물러나는 것으로 주먹을 피한 연적하가 앞으로 튕겨 나갔다.
곧이어 ‘쩍!’ 하는 찰진 소리와 함께 곽종산이 뒤로 훨훨 날아갔다.
몇 차례 눈을 깜빡거리는 것으로 평상심을 회복한 검서린 진인이 차갑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입문제자라지만, 정도가 지나쳤다. 알량한 너의 재주가 끝내 피를 보게 만드는구나. 너는 소요종에서 살 자격이 없다.”
죽음의 선고와 함께 검서린 진인이 검을 뽑았다.
검서린 진인의 검이 ‘지이잉!’ 하고 묵직한 검명(劍鳴)을 토해 냈다.
근처에서 명상을 하던 소요종 고수들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천애곡에서의 칼부림은 장구한 소요종 역사에서도 흔치 않은 일인 까닭이다.
만약 이 자리에 제군(현인)이나 노조(독요)가 있었다면 검서린을 만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천애곡에 검서린 진인을 멈춰 세울 수 있는 윗분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검서린 진인은 담담해 보였지만 속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부터 상급 검공인 천벽일홍(天碧日紅)을 펼쳤다.
슈아아악-.
검 끝에서 일어난 시퍼런 진검강, 천벽(天碧)이 파도처럼 연적하를 쓸어 갔다.
연적하도 급히 품에서 청사(靑蛇)를 꺼내 들었다.
진검강이 코앞까지 밀려오자 연적하는 즉시 구천세법 오 식 건곤번천(乾坤飜天)을 펼쳤다.
콰아아아-.
천벽과 건곤번천이 충돌한 순간, 천벽이 방향을 바꿔 하늘로 말려 올라갔다.
‘하늘과 땅이 뒤바뀐다’는 건곤번천의 오의(奧義)에 휘말린 것이다.
하지만 천벽일홍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하늘에서 불덩어리 같은 검광이 뚝 떨어져 내렸다.
천벽에 감추어져 있던 일홍(日紅)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연적하는 천둔검의 검결을 떠올렸다.
치심일허 무사불변(置心一虛 無事不辨).
마음을 비워 두고, 무엇을 어떻게 해 보려고 하지 말라.
그것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찾아온 영감이었다.
연적하는 되받아칠 생각을 털어 내고 청사를 가만히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꽈르릉! 꽈광!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연적하가 서 있던 자리는 흙먼지에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