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21
621회. 범의 소리와 용의 울음
연적하는 천애곡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무너져 내린 절벽 아래쪽은 마지막 기연을 꿈꾸며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반개한 눈으로 돌무더기를 응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장엄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저건 그들이 ‘천애불문비’의 조각에 의지할 만큼 약한 존재라는 고백인 때문이다.
연적하는 빈자리를 찾아 조심조심 돌아다녔다.
하지만 돌무더기 근처에서 빈자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 진인.”
누군가의 부름에 돌아보니 검서린 진인이다.
“아, 예.”
연적하는 반사적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검서린 진인도 묵례로 화답했다.
“자리가 없으시면 이쪽으로라도 오세요.”
검서린 진인이 비어 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한눈에 봐도 그녀를 위해 사람들이 거리를 띄워 둔 것 같았다.
빈자리를 본 연적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잡고 비몽사몽간에 만난 노인과 사조의 말을 정리하고 싶어서다.
그가 막 자리에 앉자 검서린 진인이 말했다.
“늦었지만 진인이 되신 것을 감축드려요. 스승님께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아, 예. 고맙습니다.”
연적하는 검서린 진인의 행동에 기분이 묘했다.
자신은 검서린 진인이 자리싸움에 앙심을 품고 있으려니 생각해 피해 다녔다. 그러던 차에 축하 인사를 받으니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검서린 진인이 슬쩍 운을 뗐다.
“그런데 태을 존자님의 이야기가 사실일까요?”
“어떤 이야기요?”
“‘천애불문비’ 조각에 영성(靈性)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온 거 아니에요?”
“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생각을 정리할 것도 있고 그래서 겸사겸사 들러 본 거예요.”
“모르셨나 보다. ‘천애불문비’가 부서진 날 태을 존자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대요. 여기 온 사람들은 모두 영성을 얻으려고 모인 거예요.”
“그럼 저 사람들이 모두 영성을 흡수하고 있는 거예요?”
“그랬으면 난리 났죠. 그런 희망을 품고 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저만 해도 며칠째 ‘흡자결’을 써 봤지만 얻은 게 없거든요. 제 사형제들도 다 저와 같은 소리를 하더라고요. 연 진인도 ‘흡자결’을 써 보면 알게 될 거예요.”
“‘흡자결’이 뭐예요?”
“어머, ‘흡자결’을 아직 모르세요? 하긴, 진전이 너무 빨라서 그걸 배울 틈도 없었겠네요. ‘흡자결’은 영기를 흡수하는 기초 공법이에요. 무궁전의 만류각에 가시면 ‘흡자결’을 기록한 무경서가 있어요. 연 진인은 반 시진(1시간)이면 익힐 수 있을 거예요.”
“아, 흡수…….”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득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신령스러움에 ‘진짜’와 ‘가짜’가 있다고 하시더구나. 가짜는 내가 도달하는 것이나, 진짜 신령스러움[眞靈]은 스스로 찾아온다고.
‘흡자결’도 내가 도달하는 것에 속할까?
그건 모르겠지만, 최소한 스스로 찾아오는 것은 아닌 게 틀림없다.
태을 존자의 말처럼 ‘천애불문비’ 조각에 영성이 있을까?
그 영성이 만약 ‘진짜 신령스러운 것’이라면 ‘흡자결’로는 얻지 못할 것이다.
연적하는 비범하지 못한 자신이 그런 결론을 얻은 것에 스스로 감탄했다.
뒤이어 스승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스스로 찾아온다고요?
-그래, 스승님은 ‘그가 오고 내가 기다리는 것이지 내가 가는 게 아니다’라고 하셨다.
-기다리라고요? 언제 올 줄 알고요?
-진짜가 오면 범의 소리가 바람을 일으키고, 용의 울음이 구름을 일으킨다[虎嘯風生 龍鳴雲起]고 하셨다.
-사람이 하는 건 없고요?
-물론 진실한 믿음[眞信]을 가져야 하지. 스승님은 늘 그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순간 머리부터 등줄기까지 오싹하며 전율이 일어났다.
기다림이다. 만약 ‘천애불문비’ 조각에 ‘진짜 신령스러운 기운’이 깃들어 있다면,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 찾아올 때까지.
‘흡자결’ 따위로 내가 취하려고 하면 안 된다.
스스로 찾아오는 것만이 진짜다.
연적하는 반개(半開)한 눈으로 ‘천애불문비’ 조각을 응시했다.
연적하가 갑자기 침묵하자 검서린 진인은 그를 힐끔 보았다.
분명히 ‘흡자결’을 먼저 익히라고 조언했건만, 무슨 배짱인지 바로 명상에 들어간 것 같다.
‘이 사람 뭐지?’
하지만 마냥 그를 이상하게 여길 수만은 없었다.
그는 ‘천애불문비’의 마지막 인연자였다.
그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갔지만, 이유가 있으니 그러는 것이리라.
‘아무래도 조금 지켜봐야겠어.’
그녀는 그를 살피며 부지불식중에 그의 행동을 조금씩 따라 했다.
산중의 해는 빨리 진다.
해가 지자 천애곡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것이다.
옆자리를 힐끔거리던 검서린 진인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저녁 식사 시간 전후로 천애곡을 떠났다.
어차피 오늘의 명상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검서린 진인은 초월전이 있는 용화봉으로 돌아갔다.
***
다음 날 아침.
검서린 진인은 식사를 하러 향도관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허, 참. 별일이야.”
“왜요?”
“천애곡에서 밤을 새운 사람이 있는 것 같더라고.”
“밤을 새워요? 거기에 뭐가 있다고? ‘천애불문비’가 있을 때도 그러는 사람은 없었잖아요?”
구요각의 진소방 노사가 황당한 얼굴로 사형인 곡비 노사를 보았다.
‘천애불문비’는 수십만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 대오각성(大悟覺醒)의 와중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면 모를까?
명상을 위해서 그러는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지금은 영감의 원천인 ‘천애불문비’도 부서진 상태.
돌무더기 앞에서 누가 밤을 지새운단 말인가.
“사제도 알 텐데. 소격각의 연적하라고.”
“예. 요 며칠 잠잠했죠. 왜요?”
“새벽에 소담관의 제자가 물을 길어 오려 천애곡에 갔다가 그를 보았다는군.”
“연적하를요?”
“사람이 보이길래 갔더니 그가 꾸벅꾸벅 졸고 있더라네?”
“헐! 특이한 사람이네요. 숙소를 두고 왜 거기서 그러고 있데?”
“그래서 내가 돌멩이로 뒤통수라도 찍지 왜 그냥 뒀냐고 한마디 했어.”
“그러게 말입니다. 좋은 기회를 날렸네요.”
진소방 노사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물론 빈말이다.
구요각 사람들 만큼 연적하의 무위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으니.
검서린 진인은 식사를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연적하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에 ‘쿵!’ 하고 묘한 울림이 일어났다.
‘뭔가 있다!’
연적하 진인이 그냥 천애곡에서 밤을 새울 리가 없지 않은가!
검서린 진인은 식판을 내던지듯 반납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누가 보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어검비행을 써서 천주봉으로 날아갔다.
***
천주봉.
천애곡.
스으으-.
검서린 진인을 태운 검이 미끄러지듯 천애곡 입구에 내려앉았다.
검서린 진인은 경신술을 펼쳐 나는 듯 계곡 안쪽으로 달려갔다.
과연! 어제의 그 자리에 연적하가 앉아 있었다.
석상처럼 앉아 있는 그를 보니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검서린 진인은 발소리를 죽여 연적하의 옆으로 다가갔다.
반개한 눈을 보니 틀림없이 명상 중이다.
설마 깨달음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일까?
그건 물어보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검서린 진인은 어제 자신의 자리에 슬쩍 앉으며 말을 걸었다.
“일찍 나왔네요? 혹시 밤을 새운 건가요?”
“예.”
검서린 진인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답하는 걸 보니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건 아닌 모양이다.
‘아니, 천애불문비 조각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왜 저러지?’
그녀는 ‘혹시나’ 싶어서 급히 ‘흡자결’을 운영했다.
하지만 ‘역시나’ 천애불문비 조각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명상으로 밤을 새운 모양이네.’
검서린 진인의 고운 아미가 한껏 찌푸려졌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니고, 누가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왜 밤까지 새워 가며 명상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종문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빠른 성취를 보이는 사람이!
점심시간이 되자 검서린 진인은 옆을 힐끔거렸다.
연적하 진인은 여전히 반개한 눈으로 돌무더기만 보고 있었다.
‘잠도 안 자고, 식음까지 전폐하겠다고? 왜?’
그녀는 연적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입문한 뒤로 수많은 선후배의 수련을 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이 또한 유례 없는 일.
문득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스승은 지금이 ‘대변혁의 시대’라고 했다.
‘대변혁의 시대’에 앞서 나가는 사람은 누가 봐도 연적하 진인이다.
‘천애불문비’의 마지막 인연자.
입문한 지 이레가 되기도 전에 진인이 된 사람.
‘나도 움직이지 않겠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검서린 진인이 연적하의 명상에 합류하고 하루가 지났다.
무명(無名)의 연적하와 달리 검서린 진인은 종문에서 유명인이다.
적지 않은 숫자의 노사와 진인 들이 그녀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돌무더기 주변 자리가 하나 둘 채워졌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검서린 진인을 흉내 내던 사람들 중에 절반이 포기하고 떠나갔다.
검서린 진인은 누가 남든 떠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더 이상 ‘흡자결’도 쓰지 않았다.
사흘 내내 ‘흡자결’을 펼치기도 힘들지만, 연적하가 쓰지 않으니 접어 버린 것이다.
칠 일째 되던 날 새벽.
반개한 눈으로 돌무더기를 응시하던 연적하의 입에서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은 끔찍하게 지겨웠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진령(眞靈)이, 스스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라고?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비몽사몽간에 만난 노인의 말만 아니었다면, 사조의 유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래 버티지도 못했을 게다.
‘추도영법’부터 ‘통천안’까지 자신이 아는 건 모두 동원했지만 허사였다.
진령이 기다리면 스스로 찾아온다는 걸 알았지만, 사조는 늙어 죽었다.
그만큼이나 기약 없는 기다림은 어려운 거다.
차라리 늙어 죽을지언정, 병신처럼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을 만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연적하는 진인으로 늙어 죽은 사조를 떠올렸다.
‘내가 가는 게 아니라 그가 오는 거다.’
돌이켜 보면 구천현녀를 만날 때도 그랬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때가 낀 ‘구천현녀경’을 닦은 것뿐이었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닦아 봐야 얼마나 잘 닦는다고.
대가 없이 구천현녀가 와 준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지난 칠 일간의 기다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기다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부끄럽다.
하는 일 없이 칠 일, 칠십 일, 칠 년, 칠십 년, 칠백 년을 기다리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건 창고에 갇힌 여섯 살짜리 아이가 ‘구천현녀경’을 닦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마음을 짓 누르던 답답함은 사라지고 푸들푸들 김빠진 웃음이 나왔다.
그때 돌무더기에서 ‘쩡-’ 하는 소리가 울렸다.
거의 동시에 기괴한 소리가 천애곡을 뒤흔들었다.
크허헝-.
쿠오오-.
뒤이어 돌개바람과 구름이 천애곡에 들이닥쳤다.
‘설마 이건 범의 소리와 용의 울음인가?’
연적하는 반개한 눈을 번쩍 떴지만 돌풍과 운무가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추도영법’의 구결을 나직이 읊조렸다.
“헉!”
태산만 한 백호와 그에 버금가는 크기의 붉은 용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백호가 일으킨 바람과 붉은 용을 감싼 구름이 팽팽하게 맞선 형국이다.
연적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포룡검(捕龍劍)의 수법으로 왼손으로는 백호, 오른손으로는 붉은 용을 잡았다.
순간 바람이 구름을 당기고, 구름이 바람을 감싸 안았다.
꽈르릉-!
강렬한 우렛소리와 함께 ‘천애불문비’의 진령이 연적하에게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