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29
629회. 진짜가 아닌 가짜라고
비경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모른다.
해와 달이 뜨지 않고, 하늘은 언제나 저녁노을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어서다. 그래서 소모하는 벽곡단이나 선단의 숫자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연적하는 벽곡단을 입에 물고 나무를 등지고 기대앉았다.
벌써 두 개째니 비경에 든 지도 이틀쯤 지났을 게다.
은소선 진인은 검령이 고산준령에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검령은 비경 안 어디에나 있다. 물론 책에 의하면 그렇다.
당연히 이 거칠고 황량한 사막에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막에서 검령을 얻은 진인도 있었다.
고산준령에서 얻은 검령이 월등히 많아서 사막에 없는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문제는 사막이고, 고산준령이고 간에 검령의 부름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검령과 인간은, 한쪽에서 부르면 응답하는 인격적인 관계다.
지금까지 검령을 얻었다는 사람들은 ‘검령이 나를 불렀다’고 했다.
그래서 검령(劍靈)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검의 혼령이라니…….’
강호에서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지금은 검령 소리를 하도 들어서 그런지 이젠 익숙하다.
‘그런데 왜 나를 안 부르는 거냐고.’
부르면 허둥대지 않고 어디라도 달려갈 마음의 준비는 다 끝냈다.
하지만 부름이 없는데야 도리 없다.
연적하는 천뢰종의 진인들이 모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통이 다 죽이네 어쩌네 했으니 분위기가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괜찮아 보였다.
그들과 함께 생활해야 할 심통을 생각하면 다행이다.
그가 자신을 따라 ‘왕들의 하늘’에 왔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 번은 봐줄게.’
비록 그가 뒤통수를 치기는 했지만 전혀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자신이 그의 처지라 해도 그와 비슷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심 씨’라며 거리를 두었지만, 언젠가 그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두 개의 영기가 몸 안에 있으니 조심하라고 가르쳐 준 것도 그래서다.
피로가 몰려오자 연적하는 슬쩍 눈을 감았다.
강호의 고수들은 아무리 피곤해도 완전히 잠들지 않는다.
특히나 집이 아니라 야외에서 노숙을 하는 경우에 더더욱 그랬다.
절반쯤 수면에 드는 걸 가리켜 ‘한 쪽 귀를 열어 두고 잔다’고들 한다.
연적하도 한쪽 귀를 열어 두고 잠들었다.
-연적하.
‘누님?’
“누님?”
연적하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 부르자 비몽사몽간에 ‘누님?’이라고 중얼거리다 눈을 떴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붉게 타들어 가는 하늘만이 여기가 비경임을 강변하고 있었다.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연적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법 오래 잠들었던지 허리가 뻐근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천태종의 진인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두 구의 시체도 안 보이는 걸 보니 어딘가에 대충 묻고 떠난 모양이다.
연적하가 천천히 몸을 풀며 출발 준비를 할 때 심통이 다가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어.”
“아까 뭐라고 하시는 것 같던데. 혹시 저를 부르신 건 아니지요?”
“전혀. 잠꼬대였어.”
“아, 예. 참, 가급적 천뢰종의 일에는 관여하지 마십쇼.”
“설마 지금 나에게 경고하는 거야? 한 대 더 맞아 볼래?”
“경고가 아니라 충심에서 조언을 드리는 겁니다. 지금처럼 공자님이 천뢰종의 일을 방해하면 천뢰종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심 씨, 내가 그런 거 무서워할 사람 같아? 나 연적하야, 연적하.”
“예, 예. 잘 알지요. 하지만 공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검령을 얻기 전까지는 주의해 주십쇼.”
“나보다는 심 씨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조심해. 지금 심 씨가 남의 일에 훈수 둘 때가 아니야.”
“걱정하지 마십쇼. 그건 제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연적하가 ‘쯧쯧’ 하고 혀를 차자 심통이 뻘쭘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노조가 되면 구주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을 겁니다. 그때 공자님을 찾아뵙겠습니다.”
문득 연적하가 사막을 보며 물었다.
“석경장에 돌아갈 방법이 있냐고 물었었지?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 거야?”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돌아가고 싶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삼천(三天)의 신위(神位)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불로장생을 꿈꾸고 있구나.”
연적하는 단번에 심통의 욕망을 알아차렸다.
유명교의 팔황신모처럼 심통도 불로장생의 맛을 알아 버린 모양이다.
“강호에서는 헛된 꿈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한 일이니까요. 저만 해도 이미 죽었을 몸인데 진인이 되면서 수명이 늘어났습니다. 공자님은 죽음이 임박한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까?”
연적하는 심통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마음’ 운운하는 것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몰라. 한창때의 내가 그런 걸 알겠어?”
“저는 강호에서 불로장생에 대한 팔황신모의 욕심을 욕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막상 죽음에 임박하자 살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더군요. 십두마병이 아니라 백두마군, 천두마왕이 되라고 해도 사양하지 않았을 겁니다. 살 수만 있다면요.”
“지금도 수명이 늘어났잖아. 거기서 더 바라면 추해져.”
“죽음이 임박했던 지난겨울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
연적하는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늙은이가 죽고 싶지 않다는데 그냥 죽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공자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살아서 꼭 갚겠습니다.”
“갚지 않아도 돼. 그냥 늙어 죽자.”
“흐흐흐. 공자님도 제 나이쯤 되면 아실 겁니다. 늙어 죽는 것의 비애를요.”
“심 노인만 그러는 거 아니잖아. 생명이 있는 것들은 다 생로병사를 한다고.”
연적하는 마음이 풀어졌는지 심통을 ‘심 노인’이라고 불렀다.
심통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왕들의 하늘’에는, 종문에는, 생로병사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팔황신모의 마공 따위가 아니라 창조신이 가르쳐 준 바른길로요. 그 길을 가겠다는 겁니다.”
“내가 말했잖아. 여기 있는 건 바른 게 아니야. 진짜가 아닌 가짜라고.”
“제 수명이 늘어났습니다. 그게 왜 가짜입니까?”
“그래도 가짜야. 삼백 자 구결로 만든 영기와 흡자결의 영기가 섞이지 않는 걸 보면 몰라? 이 세계는 가짜투성이야. 욕심이 만든 가짜라고.”
“가짜라고 해도 좋습니다. 공자님은 늘 저에게 회광반조라고 하셨었지요? 강호였다면 저는 겨울을 나지 못하고 죽었을 겁니다. 가짜라도 당장 내가 불로장생만 할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하아! 마음대로 해. 하지만 세상 일이 심 노인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팔황신모를 봐. 그 노파는 ‘왕들의 하늘’에 오지도 못하고, 엉뚱하게 우리가 왔잖아. 심 노인이 팔황신모처럼 ‘죽 쒀서 개를 주게 됐다’ 해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흐흐흐. 갈 길이 훤하게 보이는데, 설마 제가 죽을 쒀서 개에게 주겠습니까?”
“천뢰종에 잘 붙어 있어. 나중에 강호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 찾아갈 테니까.”
“저는 아직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는데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이야. 그때도 심 노인이 ‘왕들의 하늘’에 남겠다고 하면 인정해 줄게.”
“예, 예. 그나저나 가모님에 대한 소식은 좀 있습니까?”
“아직 없어. 검령을 얻으면 구주를 돌아다녀 보려고. 연 누님이 구주에 있다면 찾게 될 거야.”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노조가 되면 가모님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든지.”
돌아선 연적하는 다리에 신행부를 붙이고 뜨거운 사막으로 뛰어들었다.
연적하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심통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그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뒤로 서민 진인이 다가갔다.
“심 진인. 장 진인께서 찾으십니다.”
심통이 뒤를 돌아보자 서민은 상대하기 싫다는 듯 바로 돌아섰다.
심통은 천뢰종의 진인들을 쓸어 보았다.
장우검 진인, 서민 진인, 권명운 진인, 그리고 이름 모를 부상자 하나.
장우검 진인은 내상이 심해 요양이 필요할 정도지만 서민과 권명운은 생생했다.
‘아쉽군. 아쉬워.’
모두 죽이자고 한 말을 엿들었는지 천뢰종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야 대놓고 시비 거는 사람이 없지만, 나중에 무슨 험한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쳐 죽이고 싶지만 서민과 권명운 진인은 모두가 ‘원영 팔 성’의 고수들.
‘원영 칠 성’에 불과한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미친 척하고 금강저를 써 볼까?’
노조인 우이단녹록의 검령도 상대한 금강저니 진인들의 진검강쯤은 씹어 먹을지도.
한순간 심통의 눈으로 살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눈을 깜빡여 살기를 떨쳐 냈다.
천뢰종의 진인들이 자신을 내치지 않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저들이 필요한 까닭이다.
“찾으셨습니까?”
심통의 음성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장우검 진인이 슬쩍 눈을 떴다.
“소요종의 진인은 떠난 건가?”
“예.”
“나는 자네가 따라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남았나?”
“저는 천뢰종의 제자니까요.”
“하지만 소요종 진인에게 모두를 죽이자고 한 것도 자네였지.”
“말씀드렸다시피 그를 떠보기 위해서 했던 말입니다. 그의 각오와 진심 따위를 알아야 했으니까요.”
뻔뻔한 변명을 심통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늘어놓았다.
그의 당당한 태도에 민망해진 장우검 진인이 오히려 눈을 돌렸다.
“사실이든 아니든 관계없네. 어차피 지금은 서로가 필요한 때이니까. 그보다는 소요종의 연 진인에 대해 알고 싶어서 불렀네. 그는 어떤 사람인가?”
“보셨다시피 무위는 뛰어나나 심성이 연약한 사람입니다.”
장우검 진인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천뢰종과 손을 잡았든지, 아니면 심통의 말처럼 모두 죽이고 영기를 갈취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최고 고수인 그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조용히 떠났다.
그런 건 종문은 물론, 구주의 방식도 아니다.
그저 병신 같은 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싶은 건 다른 데 있었다.
“그가 종문의 흡자결을 불완전한 것처럼 말하던데, 정작 그 이유를 잘 듣지 못했네. 뭐라고 하던가?”
심통이 곤혹스러운 눈으로 장우검 진인을 보았다.
그것에 대해 말하려면 삼백 자 구결부터 밝혀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었다.
삼백 자 구결은 완전함의 일부다.
그 진정한 가치를 알고 난 뒤로 옥청 진인에게 가르쳐 준 것도 후회하고 있던 참이다.
“별것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공법을 천하제일로 알고 있는데, 그래 봐야 속세의 공법이지요.”
“그래? 자네 몸에 흡자결로 흡수하지 못한 영기가 있다는 건 또 뭐고.”
“흡자결로 흡수하지 못하는 영기가 있겠습니까?”
심통이 장우검 진인을 빤히 보았다.
그러자 장우검 진인이 머쓱한 얼굴로 답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나.”
종사들도 흡자결로 영석의 영기를 흡수하니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길 즈음, 모래 언덕 위로 세 사람이 나타났다.
천뢰종 진인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새로 등장한 진인들을 살폈다.
세 명의 진인들은 다섯이나 되는 무리를 보고도 당당하게 다가왔다.
비경에서 조원의 숫자가 많을수록 약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 까닭이다.
세 명의 진인이 빠르게 다가왔다.
잠시 후 그들 중 선두에 선 백미백염의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천태종의 진인들이오. 잠시 쉬었다가 갑시다.”
묻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다.
그 정도로 천태종 일행의 무위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순간 서민 진인과 권명운 진인이 곤혹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하필이면 하고 많은 종문 중에 천태종이라니!
녹지 어딘가에 천태종의 시신이 묻힌 무덤도 있을 텐데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