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6
66회. 좋은 추억으로 바꾸어 주마
사해루.
하가촌에서 유명한 요릿집으로 일반 손님은 물론 녹림도들까지 애용하는 장소다.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에 사해루로 노인과 아가씨가 들어섰다. 의천문의 태상 의천검존 이의정과 그의 손녀 이소민이다.
졸고 있던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와 두 사람을 빈자리로 안내했다.
대충 음식을 시킨 두 사람은 묵묵히 차를 마셨다.
이소민은 눈을 내리깔고 차만 마셨다.
처음에는 분명 도적이 된통 당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따라나섰다.
그런데 막상 하가촌에 도착하자 심장이 벌렁거리고 현기증까지 났다.
한순간 ‘괜히 따라왔나?’ 하는 자책이 들었다.
그런 이소민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의정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이 편치 않은가 보구나.”
“……네.”
이소민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할아버지라면 자신을 이해해 줄 테니까.
“나도 젊은 시절에 강호행을 다닌다고 설치다가 남경에서 크게 당한 적이 있다. 그 뒤로 기분이 나빠서 남경에는 가지도 않았지.”
“어머 정말요?”
“그래. 이 할아비도 태어날 때부터 강했던 건 아니란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십 년쯤 지나 남경으로 찾아가 복수를 했다. 그 뒤로 남경은 좋은 추억이 되었지.”
“훗!”
‘좋은 추억이 되었다’는 말에 이소민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은 너도 이곳이 불편할 게다. 불쾌한 기억밖에 없으니 당연하지. 이 할아비가 금방 좋은 추억으로 바꾸어 주마. 내가 십 년씩이나 살아 있을 것 같지가 않거든.”
“아니에요, 할아버지. 저는 십 년 뒤라도 좋아요. 그동안 그 도적은 더 고수가 되었을 테니까, 할아버지가 복수해 주세요.”
“이런, 나는 십 년이나 기다려 줄 인내심이 없단다. 당장에 요절을 내 줘야지.”
“치이! 사랑하는 손녀를 위해서 십 년도 못 기다려 준단 말이에요?”
“허허허! 그럼 그렇게 할까?”
두 사람이 가볍게 농담을 나눌 때 사해루의 문을 거칠게 열고 세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순간 점소이가 호들갑을 떨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이쿠! 호걸님들 오셨습니까? 창가 쪽에 좋은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리로 가시지요.”
하가촌에서 호걸 소리를 듣는 이들은 오봉산채의 도적밖에 없다. 그들은 무전취식을 하지 않아 점소이가 반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점소이는 세 남자를 안내한 뒤에 주문을 받고 종종걸음으로 돌아갔다.
오봉산채의 가도는 무심코 사해루를 둘러보다 이소민과 눈이 마주쳤다.
‘응?’
가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에 익은 미녀였다.
사실 이소민과 같은 미녀는 흔치 않아 쉽게 잊을 수가 없다. 다만 지금은 화사한 옷차림과 가벼운 화장으로 첫눈에 알아보기 어려웠을 뿐이다.
가도는 옆자리에 있던 오삼을 쿡 찔렀다.
“왜?”
“저기, 낙양오협 아냐?”
낙양오협이라는 말에 오삼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오봉산채의 도적들도 귀가 있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낙양오협의 가문이 유명교에 당한 걸 알고 모두가 만세를 불렀다. 오봉산채의 도적들처럼 갑자기 툭 튀어나온 유명교를 환영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의천문의 군자검도 당분간은 오봉산채를 신경 쓰지 못할 거라고 좋아했다. 그런데 왜 낙양오협이 하가촌을 돌아다닌단 말인가!
곁눈질로 여자를 보던 오삼은 소름이 쫙 돋았다.
도도한 얼굴로 앉아 있는 미모의 여자는 의천문주의 딸 이소민이었다.
‘이런 씨벌! 군자검의 팔까지 잘렸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나저나 저 늙은이는 또 누구지?’
그는 노인과 의천검존 이의정을 연관 짓지 못했다. 녹림의 도적들에게 천하십대고수는 전설 속의 인물이나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그래도 오삼은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오봉십걸을 제외하면 도적들 중에 실력 있는 사람은 독심낭인 황요명 정도다.
나머지는 그야말로 병풍 수준에 불과했다.
늙은이는 차치하고, 저 이소민이 칼을 뽑아도 세 사람은 끝장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왕청도 머리를 움츠렸다.
자존심 강한 정파의 여고수가 다시 찾아온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복수다.
세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다가 천천히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때 이의정의 입술이 열렸다.
“앉아라.”
동시에 끈적한 살기가 세 도적의 몸을 찍어 눌렀다.
의형살인의 경지가 만들어 낸 힘에 세 도적은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숨 쉬기도 어려운지 목을 움켜잡고 버둥거렸다.
결국 가도와 왕청이 입에 거품을 물고 뻗었다.
오삼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잠시 후 숨통을 조이던 압력이 사라졌다.
“사, 살려 주십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오삼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이의정의 낮은 목소리가 오삼의 귓가에 박혔다.
“오봉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 어디더냐?”
“오, 오봉산 제일봉입니다.”
“너는 가서 오봉십걸에게 전해라. 의천검존이 내일 아침까지 오봉산 제일봉으로 오란다고. 만약 한 놈이라도 달아나면 이 두 도적의 목숨을 먼저 거두고, 그다음 나머지를 찾아 죽이겠다.”
의천검존이라는 말에 오삼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천하십대고수는 살아 있는 전설이자 무림의 하늘이니 당연하다.
“예, 예, 전하겠습니다!”
오삼은 저도 모르게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이의정의 전신에서 풍기는 태산 같은 기도에 감히 고개를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의정이 손을 휘두르자 기절한 두 도적이 한쪽 구석으로 주르륵 밀려 갔다.
오삼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쳐 사해루를 빠져나갔다.
사해루에 있던 손님들은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정작 이의정과 이소민은 음식이 나오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시작했다.
***
보봉현.
오봉산채.
허겁지겁 산채로 뛰어 올라간 오삼은 마침 마당에 있던 풍연초를 만나 의천검존의 말을 전했다.
잠시 후 상화각으로 오봉십걸들이 모였다.
풍연초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연적하와 오봉십걸들을 둘러보았다.
“하아! 오는 길에 다들 대충 들었겠지? 의천검존이 가도와 왕청을 인질로 잡고 있다. 내일 아침 오봉산 제일봉에 우리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을 죽이고, 다른 식구들도 찾아 죽이겠단다. 어쩌면 좋겠느냐?”
오봉십걸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적하에게로 향했다.
곤란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던 연적하가 입을 열었다.
“그가 원하는 건 나니까, 내가 혼자 갈게요.”
“오라버니, 천하십대고수는 위험하다면서? 그냥 달아나 버리면 안 돼요?”
하소백의 말에 심양각이 한마디 했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체면 때문에라도 자신이 한 말을 지키려고 할 겁니다. 오봉산채의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내 죽이겠지요. 물론 우리 모두를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겁니다.”
그의 말에 오봉십걸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솔직히 이런 식의 결말은 누구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됐어요. 내가 가서 해결을 볼게요. 나에게 복수하려고 온 거잖아요. 일단 내가 가면 다른 사람들까지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다가 오라버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요?”
하소백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하자 연적하가 피식 웃었다.
“내가 뭐 죽으러 가냐? 천하십대고수라고 해도 나를 죽이기는 힘들어. 정 안되겠다 싶으면 달아나면 돼.”
한채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의천검존이 화가 나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 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그 전에 도망쳐야겠네요?”
그때 심양각이 끼어들었다.
“그러지는 못할 겁니다. 연 공자님과 싸우고 난 뒤에는 그도 가족 걱정을 해야 할 테니까요. 연 공자님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오봉산채도 무사할 겁니다. 강호의 생리란 그런 거니까요.”
“정말 그럴까요?”
“그럼요. 지킬 게 많으면 함부로 살인을 하지 못합니다. 적이 강하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 후과를 감당하기 어려우니까요. 녹림도 열 명의 목숨보다 자기 가족 하나의 목숨이 더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아!”
한채연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연적하가 복수하겠다고 나서면 골치 아파지는 건 의천검존이었다.
“승패를 떠나서 연 오라버니가 그의 손에서 살아남아야 우리도 안전해지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공자님께서 패하더라도 몸을 피할 수 있다면 이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공자님의 나이에는 의천검존의 손에서 빠져 나가기만 해도 대단한 거지요. 의천검존에게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을 겁니다.”
하소백이 연적하를 향해 주먹을 말아 쥐어 보였다.
“오라버니! 들었죠? 무리하지 말고 잘 달아나요!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연적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심양각을 바라보았다.
“야아! 심 노인. 진짜 장난 아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지?”
“흐흐. 별거 아닙니다. 이런 건 강호에서 오래 굴러다니다 보면 절로 터득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존의 지혜라고나 할까요?”
심양각의 자랑질에 풍연초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쳇! 잔머리를 무슨 대단한 지혜라고. 안 그러냐? 고명아?”
하지만 부채주인 탁고명은 받아 주지 않았다.
사실 그는 암담하던 차에 심양각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받은 상태였다.
“형님,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심 노인의 심기는 우리와는 차원이 달라요.”
“이런 젠장. 이젠 심기씩이나?”
풍연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괜히 혹 떼려다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도적들은 오봉십걸의 눈치만 살폈다. 행여나 그들이 달아나면 뒤따라 도망치겠다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러나 오봉십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제야 눈알만 굴리던 도적들도 조금씩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걱정과 한숨 속에 밤이 지났다.
오봉산채의 도적들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상화각으로 모여들었다.
상화각에 나와 있던 오봉십걸들은 굳이 그들을 해산시키지 않았다.
연적하는 오봉십걸들과 인사를 나눈 뒤 오봉산 제일봉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늘 오르던 산인데 오늘따라 낯선 느낌이다.
천하십대고수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허리에 찬 박도가 무겁게 느껴졌다.
파천마군 석무해와 칼을 맞댈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게 비무와 결투의 차이인가 보다.
연적하는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으면서 파천마군과의 비무를 되새겨 보았다. 그렇게라도 하니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솔직히 의천검존이 두렵지는 않았다.
‘질 것 같다’와 ‘목숨을 잃을 것 같다’는 건 엄연히 다르다.
심지어 ‘질 것 같다’도 ‘몇 수의 차이로 지느냐’에 따라 느끼는 위기감이 다르다. 그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써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다 보니 어느새 오봉산 제일봉이었다.
숲 언저리에 무릎 꿇고 있는 가도와 왕청이 보였다.
두 사람은 연적하와 눈이 마주치자 지옥에서 보살을 본 얼굴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조금 더 위쪽에 신선풍으로 수염을 기른 노인과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었다.
의천검존과 이소민이다.
이소민은 나들이용 옷을 곱게 차려 입어서 그런지 훨씬 더 여성스러웠다.
이의정이 연적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이의정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보통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볼 수가 있다.
예컨대 연적하의 전신에서 풍겨 오는 맑은 기운과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 그리고 두려움을 모르는 담담한 눈동자 같은 것 말이다.
‘헐! 일개 도적이 아닌데…….’
녹림삼존의 경지라고 해서 무공이 뛰어난 소마두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만나 보니 마치 소싯적의 자신을 보는 듯하다.
이의정은 소림사를 나온 뒤 전진교에서 오랜 세월 수도했다. 의천문의 심법에 ‘현천팔극’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의정과 같은 도가 계열의 고수는 마공의 고수를 만나면 거부감부터 든다. 반면 같은 도가 계열을 만나면 왠지 흐뭇하고 기꺼운 마음이 된다.
그 모든 게 선입견이겠지만, 어쩌겠는가?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