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7
67회. 하늘의 인연 땅의 인연
할아버지 의천검존 이의정과 함께 오봉산 제일봉에 오르는 이소민의 심정은 담담했다. 의천검존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하가촌에서는 살짝 긴장도 됐었다.
그러나 막상 오봉산에 들어서자 긴장은 사라졌다. 오히려 뻔뻔한 도적이 제압당해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녀가 의천검존과 함께 맞은편 산의 운무를 감상하고 있을 때 인기척이 들렸다.
이소민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대담하게도 그 젊은 도적이 혼자 올라오고 있었다.
‘제법 용기가 있네?’
의천문의 원로들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저 도적은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마치 ‘한번 해보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이의정의 입이 열렸다.
“네가 오봉십걸에게 무공을 가르친다는 그 아이냐?”
“예.”
연적하는 공손히 대답했다.
상대가 의천검존이라서가 아니라, 신선과 같은 풍모에 절로 존경심이 들어서다.
의천검존은 연적하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형태의 사람이었다. 무공이 뛰어난 고수라기보다는 신선에 가까운 그런 존재 말이다.
공손한 태도에 이의정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오랜 세월 살아온 이의정의 눈에 도적의 심성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투박하고 거칠기는 하지만 때 묻지 않은 원석.
손녀를 욕보인 것에 대한 적의는 흐려지고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사문이 어떻게 되느냐? 녹림은 아닌 것 같은데.”
“가전 무공이에요.”
“오호! 훌륭한 집안인가 보군.”
이의정은 더 묻지 않았다.
사문이 사파가 아닌 것으로도 충분했다.
기본적인 정보는 됐고, 다른 건 손을 섞다 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내 손녀를 인질로 잡고 돈을 요구했다지?”
“아, 예, 어쩌다 보니…….”
연적하가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 연설주만 아니었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는다고, 낙양오협은 연적하의 복수에 휘말린 것뿐이었다.
“내가 기분이 나쁜 건 그것만이 아니야. 몸값으로 은자 백 냥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내 손녀이자 의천문 문주의 딸에게 고작 은자 백 냥이라니? 그건 의천문과 나에 대한 모욕이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연적하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의정은 ‘이놈 봐라?’ 하는 얼굴로 한마디 더 했다.
“내 손녀를 인질로 한 걸 보면 나조차도 안중에 없다는 말이렷다?”
“전혀요. 솔직히 저는 군자검 아저씨까지만 생각했거든요?”
의천문의 문주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상대에게서 이의정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세상 물정을 전혀 꼬맹이를 보는 그런 기분 말이다.
“군자검은 상대할 자신이 있었느냐?”
“쪼끔요?”
“푸헐!”
이의정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의천문의 문주 군자검을 동네 아저씨쯤으로 여기는 도적이 있을 줄이야!
“군자검이 천하십대고수에는 들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의 경지는 결코 낮지 않다. 너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봐야겠다.”
“아…….”
연적하는 올 것이 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의천검존의 목적은 손녀의 복수에 있다. 그건 결코 말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곧이어 이의정이 손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는 물러나 있거라.”
“네.”
이소민은 두 명의 도적이 있는 곳까지 물러났다.
손녀가 충분히 뒤로 물러난 것을 확인한 이의정이 연적하를 보며 중얼거렸다.
“허허! 노부가 검에 피를 묻힌 게 벌써 삼십 년 전. 군자검이 다치지만 않았어도 마주할 일은 없었을 텐데. 만남은 하늘의 인연이요 관계는 땅의 인연이라. 검으로 너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 하늘에 묻겠노라.”
연적하는 ‘은원과 무관하게 칼을 섞어 보자’는 소리로 알아들었다.
이의정이 천천히 검을 뽑자, 연적하도 박도를 뽑았다.
이의정이 슬쩍 검 끝으로 연적하를 가리켰다.
쉬이이익.
돌연 벼락처럼 일어난 검풍이 앞으로 쏘아 갔다.
연적하는 박도를 횡으로 그어 검풍을 무위로 돌렸다.
다음 순간 이의정이 한 걸음 내디뎠다.
순간 그의 신형이 일 장(약 3미터)여 거리를 건너뛰어 연적하 앞에 나타났다.
그야말로 유령과도 같은 신법에 연적하는 일순 당황했다.
휘리릭.
이의정의 검이 연적하의 전신을 집요하게 두드렸다.
상, 하, 좌, 우, 중.
실초와 허초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그것은 오행무상검이었다.
연적하 역시 처음부터 사 식 풍화겁륜으로 맞받아쳤다.
그것이 아니고는 도저히 사방에서 밀려드는 검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어린 녀석이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치자 이의정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곧이어 이의정의 검신이 파란 빛에 휩싸였다.
현천팔극신공을 검에 실은 것이다.
이른바 검경(劍勁).
검신에 실린 기운[劍氣]이 넘쳐 외부로 발산되는 경지다.
검기를 건너뛰고 검경을 쏟아 낼 정도로 이의정의 내공은 무지막지했다.
챙.
연적하는 박도가 검에 닿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황급히 보니 박도의 이가 나갔다.
조금만 더 세게 부딪쳤으면 도신이 잘렸을지도 모른다.
연적하는 내력을 모두 끌어 올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박도에 내력을 쏟아붓는 순간, 다시 한 번 이의정의 검이 춤을 추었다.
차차차차창.
도검으로, 손바닥을 맞댄 것만큼이나 무지막지한 내공 대결이 이어졌다.
이의정의 내공은 바다와 같았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검공에 연적하는 숨 돌릴 틈도 없었다.
한차례 검공이 휩쓸고 지나갔다.
연적하가 정면으로 검공을 받아 내자 여유만만 하던 이의정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검술의 현묘함은 말할 것도 없고, 공력까지도 뛰어나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가능한가?
그렇다고 유명교의 초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대의 내공은 기가 막힐 정도로 순수했다.
과거 무당이나 화산파 고수들과 비무할 때보다 더 진한 선기(仙氣)가 느껴졌다.
힘의 근원이 그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사악한 수법이 아닌 순수한 내공이라는 뜻이다.
그것도 도가기공!
‘이게 녹림삼존의 경지라고?’
누구의 식견인지 몰라도 한참 잘못 봤다.
이 정도면 녹림삼존도 씹어 먹을 무위다.
이제야 그가 한 말이 이해가 갔다. 이 정도라면 군자검이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의정은 한 걸음 물러나 검을 눈높이로 들고, 검결지를 가볍게 검극에 붙였다.
현천팔극검의 기수식이었다.
자신의 성명절학인 현천팔극검을 펼치려는 것이다.
긴장한 이소민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저렇게 진지한 할아버지는 처음 본다.
저 젊은 도적이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말인가?
할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도적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린다.
‘추악한 도적’에서 ‘사실은 굉장한 사람’으로 변해 갔다.
그녀는 문득 자기가 ‘할아버지 손에 도적이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닫고 흠칫 놀랐다.
‘안 돼. 저 사람은 도적일 뿐이야!’
천하 창생을 위해서라도 녹림의 도적은 사라져야 한다.
이소민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엉뚱한 상상을 떨쳐 냈다.
그러는 동안 이의정과 연적하의 결투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의정의 검을 감싸고 있던 빛은 점점 진해져 나중에는 검신을 가릴 정도였다.
검강이다.
닿는 모든 것을 산산이 부숴 버린다는 초극의 경지.
이의정은 그 검강으로 절학인 현천팔극검을 펼치고 있었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터져 나갔다.
꽈르르릉. 꽈광.
경력에 스친 바위가 쩍쩍 갈라졌다.
사방팔방이 온통 현천팔극의 검영으로 가득 차자 연적하는 지면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도저히 풍화겁륜으로 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공중에서 연적하는 이의정의 머리 위에 오 식 건곤번천(乾坤天)을 쏟아 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힐 정도의 엄청난 도강이 뻗어 나왔다.
그러나 건곤번천으로는 현천팔극의 촘촘하게 깔린 검강을 해체하지 못했다. 이대로 지면에 떨어졌다가는 검강을 맨몸으로 받아야 할 상황.
연적하는 ‘차핫!’ 하고 짧은 기합과 함께 하늘로 더 높이 솟구쳤다.
그때 이의정이 잡고 있던 검에서 손을 뗐다.
쉬이이익-.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이 날아올랐다.
이기어검이었다.
대경실색한 연적하는 박도를 종횡으로 휘두르며 육 식 천뢰무망(天雷無望)을 펼쳤다.
촘촘하게 뻗어 나간 도기가 그물처럼 검을 감쌌다.
그러나 이의정이 검결지를 가볍게 떨치자 검은 그물을 찢고 나왔다.
어째 외통수에 걸린 기분이다.
“에라!”
연적하가 돌연 박도를 집어 던졌다.
빙글빙글 돌며 날아간 박도가 검신을 때렸다.
땅.
검이 튕겨 나자 이의정은 검결지를 살짝 뒤로 물렸다가 앞으로 뻗었다.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검이 다시 힘차게 날아올랐다.
‘응?’
그런데 방금까지 있던 상대가 없다.
황망한 가운데 주위를 살펴보니 어느 틈에 도적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두 팔을 빳빳하게 뒤쪽으로 뻗고 뛰는 모양새를 보니 가관이다.
언젠가 저잣거리에서 얼핏 저 비슷한 경신술을 본 기억이 났다.
날아가는 제비를 본떠 만든 비연보라고 했던가?
현묘한 검공에 어울리지 않는 경신술이지만 속도 하나만큼은 기가 막혔다.
단숨에 이십여 장(약 60미터)의 거리를 벌린 연적하가 잠깐 멈춰서 소리쳤다.
“헉헉! 할아버지! 내가 원래 검을 쓰는 사람인데요! 검을 안 가지고 왔어요! 어! 움직이지 마세요! 다음에 정식으로 다시 싸워 보자고요!”
이의정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연적하는 몸을 돌려 달아났다.
황당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이의정에게 이소민이 다가갔다.
“할아버지? 끝난 거예요?”
“헐! 저런 고약한 놈을 보았나. 이거 참.”
이의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뒤를 쫓을 수도 있지만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지라 내키지 않았다.
‘쯧! 놈에게 한 방 먹여 주기 직전이었는데…….’
똥 싸고 밑 안 닦은 기분이다.
이소민이 쌀쌀맞은 얼굴로 산 아래 쪽을 노려보았다.
“핑계를 대고 달아나다니 참 비겁한 사람이네요. 그렇죠?”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왜요?”
“저놈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에?”
이소민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럼 지금까지 박도를 들고 할아버지와 싸운 건 뭐란 말인가?
검과 도는 다르다.
검은 찌르기에 좋고, 도는 베기에 좋다. 물론 검에 베기가 없는 건 아니다. 당연히 도에도 찌르기가 있다. 그렇다 해도 그 둘의 쓰임새는 전혀 달랐다.
“할아버지는 그가 도와 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고 생각하세요?”
이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의 도법에는 유난히 찌르기가 많았다. 검법과 도법을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모습이었지. 검법의 조예가 상당할 거라고 생각된다.”
“그런 사람이 왜 박도를 써요?”
“모르지. 검법이 숨겨 둔 한 수일지도. 아니면 아직 자신이 없다거나.”
“어머, 말도 안 돼. 검의 고수가 박도로 할아버지와 맞섰다고요?”
이소민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의정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놀라느냐?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이 할아비도 박도를 쓸 수 있느니라.”
“그건 할아버지니까 가능한 거잖아요.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 녀석도 만류귀종에 발을 걸쳤나 보지.”
이의정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설마요.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보세요?”
“너도 듣지 않았느냐? 자기 입으로 검 쓰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든.”
“할아버지! 그건 아니죠.”
이소민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도적이 달아나면서 하는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