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61
661회. 후회할 일 하지 마세요
염화전 아래의 현무정.
달빛을 받아 생긴 전각 그림자에 수호각 고수들이 석상처럼 시립하고 서 있었다.
잠시 후 군림전 전주인 대륜 제군이 허공에서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황석 노조가 수호각을 대표해 눈인사를 건넸다.
대륜 제군이 물었다.
“어떤 상황인가?”
“한 식경(약 30분) 전 침입자가 빙설화 제군의 창문으로 잠입했습니다. 그 뒤로 다시 창문이 열리지 않았으니 아직 방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치는?”
“염화전 주위에 천라지망과 적연부동(寂然不動)의 법진을 펼쳐 놓았습니다.”
적연부동이라는 말에 대륜 제군은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그것은 술법을 금제하는 법진이었다.
오행금종진이 통하지 않음을 알았으니 현명한 대처라 할 수 있다.
수호각에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꽤나 준비를 했던 모양이다.
“남자던가, 여자던가?”
“그건 아직……. 침입자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알아보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 추위면 창문이 단단히 닫혀 있었을 텐데. 그렇게 빨랐다고?”
“저희는 빙설화 제군께서 창문을 열어 주신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야심한 밤에 외부 침입자에게 창문을 열어 줬다?”
대륜 제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종문 전쟁의 와중에 지휘관이 왜 그런 수상한 짓을 한단 말인가?
“최근 빙 제군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하기야 손님이 찾아오면 빙설화가 아니지. 불청객이 나비인지 벌인지 궁금하군.”
황석 노조는 나비와 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륜 제군은 때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빙설화 제군의 창문만 응시할 뿐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지시를 기다리던 황석 노조가 슬쩍 물었다.
“이제 어찌할까요?”
“지난번 침입 이후로 석 달 만인가?”
“그렇습니다.”
“회포를 풀 시간은 줘야지. 아직은 경계를 풀지 않았을 거야. 조금 더 기다려 주자고.”
“예.”
황석 노조의 시선이 빙설화 제군의 창으로 향했다.
이 야심한 시간에 구주 제일 미녀라는 빙설화 제군과 단둘이 있다니!
누군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빠득! 오늘은 그 면상을 꼭 확인해 주마.’
분노와 질투심에 사로잡힌 그는 어둠 속에서 이를 빡빡 갈았다.
***
축시 초(오전 1시).
똑. 똑. 똑.
침상 위에 누워 있던 남궁연이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 늦은 시간에 문을 두드리다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연적하를 돌아보았다.
“염화전 주변에 몇 사람이 은신하고 있던데 나를 봤나?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들이 있는 걸 알고도 들어온 거야?”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은 종문 전쟁 중이라고.”
질렸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남궁연은 문가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죠?”
그런데 뜻밖에도 문밖에서 들려온 것은 추회 존자의 음성이었다.
“나다.”
깜짝 놀란 남궁연은 연적하에게 조용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낸 후 문을 조금 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잠이 안 와서 산책을 하다 잠시 들러보았다. 괜찮다면 나와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겠느냐?”
추회 존자의 웃는 눈을 본 남궁연은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나섰다.
염화전 일 층의 객청에는 어느새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추회 존자는 관리자인 양화영 진인을 돌려보낸 후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냄새를 맡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늦은 밤의 차라. 이러는 것도 오랜만이군.”
“차를 마시자고 부른 건 아니겠죠?”
빙설화 제군의 물음에 추회 존자가 피식 웃었다.
“대륜 제군과 수호각에서 준비를 단단히 했더구나. 오늘 또 불청객이 찾아왔다지?”
“…….”
빙설화 제군은 대답 대신 조용히 찻잔을 집어 들었다.
추회 존자가 직접 나설 정도면 이미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아무래도 결단의 시간이 된 것 같다.
“나는 네가 ‘삼천의 신’이 되기 위해 인간관계를 끊은 줄로 알았다. 생각이 바뀐 것이냐?”
“영영 못 만날 줄 알았던 남편과 다시 만났거든요.”
“…….”
깜짝 놀란 추회 존자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야심한 밤에 누군가 만나는 건 알았는데 그 사람이 남편일 줄이야.
“천지종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걸 보니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구나. 종문 사람이냐?”
“네.”
“소요종만 아니면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소요종이에요.”
황망한 눈으로 빙설화 제군을 보던 추회 존자가 고개를 저었다.
“쯧쯧! 하고 많은 종문 중에 하필……. 아니, 이제 종문의 구별은 의미가 없으려나. 그래도 때가 좋지 않구나. 대륜 제군이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게다.”
“대륜 제군은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요.”
“소요종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설마…….”
추회 존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소요종에서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연적하 제군밖에 없었다.
“네, 맞아요. 그 사람이에요.”
“지금 염화전에 있는 사람이 그라고?”
“네.”
추회 존자는 믿어지지 않는지 몇 번이고 눈을 끔뻑였다.
한참 후에 정신을 수습한 추회 존자가 물었다.
“진명 제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스승님은 아직 몰라요.”
“네가 외부인과 만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만나는 사람이 그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냐?”
“대륜 제군이 그 소란을 피웠는데 어찌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가 소요종 사람인 줄은 모른다는 말이었어요.”
“허면 진경에서의 싸움은, 네가 양보한 것이었느냐?”
“전혀요. 그의 무위가 저보다 뛰어난 것은 사실이에요.”
곰곰 생각하던 추회 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대륜 제군과 수호각에서 꼬리를 잡지 못했을 정도니. 그런데.”
그녀는 서늘한 눈으로 빙설화 제군을 응시했다.
“너는 소요종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느냐? 지금도 구주의 종문을 통합할 생각이 있느냐는 말이다.”
빙설화 제군은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사람들은 말하더군요. 천지종 연합과 천뢰종 연합 간의 싸움에서 이긴 쪽이 종문을 통합할 거라고. 종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누가 이길 것 같은가요?”
“나는 네가, 우리 천지종이 종문을 통합하기를 바란다.”
“더 뛰어난 쪽이 승리할 거예요.”
“무위는 연 제군이 앞선다고 치자. 나는 지략에 있어서 네가 구주 제일이라 믿는다. 너는 불귀곡에서 검 한번 뽑지 않고 태상종과 무극종을 굴복시켰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해다오.”
“내가 누군가와 약속을 한다면, 그 상대는 오직 그 사람뿐이에요.”
“그에게 ‘구주의 종사’ 자리를 내어 주겠다는 것이냐?”
“아니요. 나는 단지 그를 제외한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뿐이에요.”
콰작.
순간 추회 존자의 손아귀에서 찻잔이 바스러졌다.
천외천의 지략을 가진 빙설화 제군이 소요종과의 싸움에서 진다면, 그건 양보한 것일 뿐이다.
추회 존자는 이미 빙설화 제군의 마음이 전쟁에서 떠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삼천의 신’이 되겠다는 네 말을 믿고 종사패까지 내어 줬다. 네가 나를 대신해 천지종의 이름으로 종문을 통합하리라 믿었다. 그런 나의 믿음과 기대를 배신하겠는 것이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다.
빙설화 제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추회 존자가 적당한 지점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되기를 바랐다.
태상종과 무극종의 종사들이 불귀곡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추회 존자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말해라. 나를 위해 천지종의 이름으로 구주의 아홉 종문을 통합하겠다고.”
“추회 존자님의 바람은 알지만 나는 이미 사실을 말했어요. 더 뛰어난 쪽이 승리할 거라고. 그게 종문의 방식이 아니던가요?”
그러자 추회 존자가 버럭 소리쳤다.
“아니! 더 뛰어난 사람은 바로 너다! 네가 패한다면, 그건 알량한 네 남편을 위해 승리를 양보한 거란 말이다! 그러지 않겠다고 말해! 나와 천지종을 위해 승리하겠다고 약속하란 말이다!”
빙설화 제군이 씁쓸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내 남편이 어떤 존재인지 몰라요. 어떤 법진으로도 그를 가둬 둘 수 없어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상대에게는 어떤 지략도 통하지 않아요.”
그러나 추회 존자는 빙설화 제군이 져 줄 생각으로 핑계를 댄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지금의 너는 내가 알던 빙설화가 아니다. 빙설화는 이런 연약한 여자가 아니었단 말이다!”
추회 존자는 빙설화 제군이 연적하 제군을 위해 그런다고 오해했다.
지금까지 보아 온 빙설화 제군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건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그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남자에 눈이 멀어 여염집 아녀자 같은 소리나 하다니!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소요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겠다고 약조해라. 네 그 잘난 남편과 다시 만나고 싶으면 약조하란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죠? 설마 그를 해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그 미꾸라지 같은 놈을 무슨 수로 해치겠느냐. 너를 두고 하는 소리니라.”
“나를 해치겠다고요?”
“더 이상 너를 믿을 수가 없게 됐다. 그러니 천지를 두고 맹세해라. 소요종, 천뢰종, 천태종을 병탄시키고, 구주의 종문을 일통하겠노라고.”
빙설화 제군이 기막힌 눈으로 추회 존자를 보았다.
약속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맹세를 하란다.
“맹세하지 않는다면요?”
“우리가 나누어 마신 차에는 금령선액(禁靈仙液)이 들어 있었다.”
순간 빙설화 제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금령선액은 ‘영기를 봉하는 약’으로 죄인에게 벌을 줄 때나 쓰는 물건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금령선액의 봉인을 풀어 줄 해령신수(解靈神水)가 있다. 맹세해라. 천지종의 이름으로 구주의 종문을 일통하겠다고. 그럼 해령신수를 주고, 오늘의 일을 사과하겠다.”
“그래도 못 하겠다면요?”
“너를 미혹게 하는 것이 소요종에 있으니, 소요종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너를 가두어 둘 것이다.”
“제가 없다면 소요종과의 전쟁은 더더욱 힘들 텐데요?”
“내가 너를 볼모로 잡고 있음을 알아도 연 제군이 날뛰겠느냐?”
“훗! 그러니까 내 머리가 아니라 몸뚱아리를 이용해 보겠다는 건가요?”
“누가 뭐라 해도 너는 우리 천지종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나는 너를 앞세워 소요종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추회 존자님, 후회할 일 하지 마세요.”
“후회라. 부부가 일심동체라니 너는 그에게 ‘구주의 종사’를 양보해도 상관없겠지. 하지만 나와 천지종 제군들에게 ‘구주의 종사’는 목숨만큼이나 중한 자리니라. 남자 따위에 마음이 팔려 큰 뜻을 저버리다니. 빙설화, 너에게 실망이다.”
“저도 추회 존자님에게 실망이에요.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게 될 거예요.”
빙설화 제군은 가만히 영기를 움직여 보았다.
역시나! 마치 돌덩이가 된 듯 몸속의 영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추회 존자가 말했다.
“곡분조.”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천수각의 각주 곡분조 노조가 객청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빙설화 제군이 적과 내통하였으니 지금 즉시 천수각의 뇌옥에 가두어라. 물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말 것이며, 일체의 면회를 금한다.”
“예.”
빙설화 제군에게 다가간 곡분조 노조는 조심스레 그녀의 팔꿈치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빙설화 제군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그를 떨쳐 냈다.
“내 발로 갈 테니 앞장서세요.”
곡분조 노조가 추회 존자를 힐끔 보자, 추회 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빙설화 제군은 천수각 진인들에 둘러싸여 염화전을 떠났다.
천수각 고수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대륜 제군은 천천히 염화전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