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63
763회. 진짜 어이가 없네?
약제사 서원정이 조심스레 청년을 살폈다.
보통 사람이 이렇듯 귀한 선단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어서다.
일단 겉모습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깊고 그윽한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귀인은 이 선단을 어디에서 얻으셨습니까?”
“누가 주더라고요.”
“이것은 실로 귀한 선단이니 주신 분이 종문과 관련된 분일 듯싶소. 동주야.”
“예.”
“종문의 선단은 상중하로 나누어지지만, 그것을 뛰어넘은 것도 존재한다. 그것을 천품(天品)이라 하는데 이 선단이 그러하다. 천품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귀인께 감사드리고, 정성을 다해 모시도록 해라.”
부친의 말에 서동주는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으로 움찔했다.
그렇듯 귀한 선단들을 고작 은자 세 냥 값으로 얻었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는 급히 청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귀인을 몰라뵙고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저희 금향각의 귀빈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주인장의 말에 연적하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급히 가던 길이라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요. 여하튼 은자 세 냥보다 귀한 선단이라는 게 밝혀졌으니까 이만 가도 되죠?”
그러자 서동주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부끄럽군요. 다만 하루라도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인의 진심 어린 간청에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도 이곳에서 하루쯤 맛난 음식을 먹고 싶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천지종으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마음만 받을게요. 내가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서동주는 아쉬운 얼굴로 청년을 보았다.
선단의 가치를 모르고 주었다면 모를까?
알면서도 정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세 개나 주다니 기인이 따로 없다.
“허면 귀인의 존함만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연적하예요.”
“연 소협이셨군요. 아무 때라도 다시 들러 주시면 그때는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럴게요. 그럼 이만.”
연적하가 움직이자 서원정 일가가 배웅에 나섰다.
그들의 행동에 부담을 느낀 연적하는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홀연히 사라졌다.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자리를 피한 것이다.
눈앞에서 갑자기 연적하가 사라지자 서원정 일가의 입이 쩍 벌어졌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서원정이 장성한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동주야. 어쩌면 저분은 종문의 제자인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다음에 다시 찾아 주시면 열과 성을 다해 모셔야 할 것이다.”
“예.”
우두커니 서서 노을에 물든 거리를 바라보던 서원정 일가는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
금향각에서 나온 연적하는 다시 무량하를 따라 서쪽으로 날아갔다.
한참을 날아가던 그는 어두워지자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생각해 보니 금향각에서 하룻밤 묵었어도 괜찮았겠다 싶다.
한 가지에 꽂히면 다른 게 안 보이는 건 반신(半神)이 돼서도 여전한 것 같다.
“그래도 뭐 달빛이 좋으니까.”
뭐라고 할 사람도 없건만 연적하는 변명을 했다.
세 개의 달빛을 받은 무량하는 반짝반짝 빛이 나서 밤에도 어둡지 않았다.
그는 달빛에 의지해 계속해서 이동했다.
하지만 사람이 밤에 돌아다니지 않고 잠을 자는 건 피로를 풀기 위해서다.
이대로라면 분명 밤낮이 바뀌고 말 터.
무량하와 백리하가 교차하는 지점에 도착하자 그는 천천히 강변으로 내려갔다.
문득 고개를 들어 세 개의 달을 보니 자정 무렵인 것 같다.
‘자정이면 아직 늦은 건 아니지.’
연적하는 오랜만에 노숙을 할 생각으로 적당한 자리를 찾아다녔다.
보는 눈은 비슷한가 보다.
좀 아늑한 느낌이 든다 싶은 장소에 가 보면 꼭 누군가 자고 있었다.
무량하와 백리하가 교차하는 지점이라 그런지 피난민이 꽤나 많았다.
본의 아니게-마치 한 마리 야수처럼-어슬렁어슬렁 강변을 돌아다니던 연적하가 멈칫했다.
멀리서 억눌린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방향을 가늠하던 연적하는 이내 유령처럼 강변에서 사라졌다.
숲속 공터.
일곱 명의 사내들이 일가족으로 보이는 네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땅바닥에 나뒹굴었던 사십 대 남자가 비칠거리며 일어났다.
“으윽! 대공자! 내 오늘의 일을 반드시 성주님께 고하여……. 큭!”
청년의 발길질에 남자가 다시 뒤로 넘어갔다.
이윽고 청년이 좌우에 둘러선 수하들에게 턱짓을 했다.
사내 둘이 쓰러진 중년 남자의 좌우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
청년, 대공자 진위강이 남자에게 다가가 가소롭다는 얼굴로 말했다.
“관 대작(大爵)은 왜 그 나이 먹도록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를까? 이 혼란의 시기에 관 대작에게 누가 관심이나 둘 줄 알아? 모르긴 몰라도 이번 난리통에 대작들의 절반은 죽었을걸?”
“그, 그게 무슨 소리요?”
호암성의 고관인 관인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진위강은 천중협이 자리한 호암성 성주 진홍엽의 장자였다.
피난길에 우연히 그와 만났는데 하나뿐인 딸에게 너무 추근대서 피해 다녔다.
위험을 무릅쓰고 강변이 아닌 숲에서 노숙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
하지만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집요한 그의 추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 전 노숙을 하던 중에 그를 만난 것이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라고, 자다 말고 그를 접대하다가 기어코 사달이 났다.
딸에게 지분거리는 그를 만류하다가 호위들에게 얻어맞은 것이다.
몇 대 때리고 말려니 생각했는데 번들거리는 진위강의 눈을 보니 불안했다.
“이건 모두 관 대작이 자처한 거야.”
“내가 뭘 자처했다는 거요?”
“나는 관 대작의 딸을 첩실로 들일 생각이었어. 그런데 관 대작은 나를 장인을 때리는 사위로 만들었잖아. 멀쩡한 나를 패륜아로 만들었다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나는 대공자에게 백아(白兒)를 첩실로 주겠다고 한 적이 없소.”
백아는 관인호의 외동딸인 관소백을 뜻했다.
진위강이 스산한 눈빛으로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게 문제야. 관 대작이 순순히 내 말에 따랐으면 우리 모두가 행복했을 거라고.”
왠지 섬뜩한 느낌에 관인호는 노기를 누르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오늘 일은 묻어 두리다. 그러니 대공자도 그만…….”
“맞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오늘 관 대작을 묻어 줄게. 그리고 백 낭자는 나와 운우(雲雨)의 정을 나눌 거고, 관 대작의 마누라도 내 수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 게 될 거야.”
참다못한 관인호가 버럭 소리쳤다.
“미친놈! 성주님이 알면 아무리 네놈이 대공자라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묻어 준다니까? 모르겠어? 관 대작 옆에 백 낭자도 관 대작의 마누라도 나란히 묻어 줄게.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 정도 인심은 쓸 줄 알거든.”
모두 죽인다는 협박에 관인호는 급히 태도를 바꿨다.
“대, 대공자! 잘못했소! 제발 우리를 용서해 주시오! 백아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대공자가 시키는 대로 하리다!”
“허! 관 대작. 그런 머리로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지? 상전이 원하는 게 뭔지 전혀 모르고 있잖아? 내가 원하는 건 백 낭자라고.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 같으니.”
호위 중에 하나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흐흐. 대공자님, 밤이 깊었습니다. 빨리 거사를 치르고 쉬셔야지요? 잠이 부족하면 몸이 상하십니다.”
이번에는 한쪽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관소백이 진위강의 앞으로 달려가 머리를 조아렸다.
“대공자님! 저희 가족을 살려 주세요! 대공자님이 하라시는 대로 다 할게요! 제가 첩실이 될게요! 그러니 저희 가족을 살려 주세요!”
관인호는 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공자가 독심을 품으면 자신은 물론 딸과 처의 앞날까지 비참해지는 까닭이다.
호위들이 아쉬운 얼굴로 관인호의 처를 보았다.
대공자가 관소백을 첩실로 들이는 선에서 끝내면 자신들만 닭 쫓던 개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한순간 진위강 대공자의 입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진위강 대공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백 낭자, 뜻은 가상한데 늦었어. 이미 관 대작이 선을 넘어 버렸거든. 이 일에 성주님을 끌어들이면 안 됐어. 대신에 운우지락(雲雨之樂)이 뭔지 제대로 가르쳐 줄게. 이승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말야.”
가지고 놀다가 죽이겠다는 말에 관소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호위들은 관인호의 처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대공자를 모신 뒤로 이런 호사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호위 둘에게 양쪽 팔이 잡힌 관인호가 미친 듯 발버둥쳤다.
“진위강! 이 개 같은 놈아!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 내 귀신이 되어서라도……. 악!”
그를 잡고 있던 호위가 주먹으로 관인호의 입을 후려쳤다.
관인호는 한참 동안 입에 감각이 없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쯧쯧’ 하고 혀를 차던 진위강이 관소백의 귓가에 속삭였다.
“백 낭자가 반항을 하면 관 대작의 사지를 하나씩 자를 거야. 관 대작이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라면 마음대로 소리쳐도 돼. 하지만 오늘 밤 백 낭자가 나를 기쁘게 해 주면 첩실로 들일지도 몰라. 그럼 모두가 사는 거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교활한 진위강의 말에 관소백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는 모두를 죽인다고 하더니, 지금은 기쁘게 해 주면 살 수도 있단다.
뻔한 거짓말 같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관소백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뚱아리쯤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었으니까.
진위강이 관소백의 얼굴로 손을 뻗어 갈 때다.
어두운 숲에서 한 청년이 중심을 잃은 듯 비칠거리며 튀어나왔다.
“어이쿠! 좋은 구경 하다가 넘어질 뻔했네?”
청년을 발견한 관인호가 버럭 소리쳤다.
“이보게! 이자들은 호암성 성주의 장자인 진위강과 그의 호위들이네! 나는 호암성의 관……. 악!”
호위 중 하나가 다시 한번 주먹으로 관인호의 안면부를 후려쳤다.
관인호는 그 한방에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졌다.
그러자 연적하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어이쿠! 관 대작 아저씨, 가만히 계시지. 아프겠다.”
숲속에서 지켜본 연적하는 이미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관 대작은 증인을 만들어 볼 생각으로 그런 모양인데 괜히 미안했다. 자신이 등장하자마자 알은체를 했으면 맞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호위 넷이 청년을 사방에서 에워쌌다.
이윽고 호위대장 곽소삼이 위협하듯 검을 뽑아 들고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러자 연적하가 불쾌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누군데?”
호위대장 곽소삼은 대답에 앞서 진위강 대공자를 힐끔 보았다.
자신들의 정체를 밝혀도 되는지 묻는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진위강이 관소백을 버려 두고 불청객에게 다가갔다.
“나는 호암성 성주의 장자인 진위강이오. 탐관오리(貪官汚吏)인 관 대작과 그 가족들을 잡아 족치던 중인데, 그쪽은 이들과 관계가 있소?”
진위강의 말에 연적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와아! 이 뻔뻔한 새끼 좀 보소? 얼굴에 철판을 둘렀나? 내가 구주를 종횡했지만 너 같은 종자는 처음 본다. 첩실을 들이네 마네 지랄 떨다가, 재미만 보고 싹 다 죽이겠다고 하더니, 뭐 탐관오리? 누군 구주를 지키겠다고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는데 뒤에서 이런 짓을 벌여? 그것도 호암성 성주의 아들이라는 놈이? 진짜 어이가 없네?”
진위강과 호위들은 급히 시선을 교환했다.
청년의 입에서 종문 제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질린 얼굴로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던 진위강이 확인하듯 물었다.
“호, 혹시 종문의 제자십니까?”
“종문의 제자가 아니라……. 구주 종문의 대종사님이시다. 이 귀태(鬼胎) 녀석들아.”
말과 함께 연적하가 손목을 한차례 털었다.
돌연 진위강과 여섯 호위들의 발아래서 화염이 솟아올라 그들을 휘감았다.
화르르륵-.
어찌나 열기가 강했던지 일곱 명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