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0
80회. 줄을 잘 서야 하느니라
그러나 붉은 점의 사내, 이춘은 후퇴하지 않았다.
“유명교 고수들이 전대의 거마들이잖아. 그놈들이 좋은 일 하는 거 봤나?”
그 말에는 텁석부리 왕진청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유명교에 있는 마두들의 과거가 끔찍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야 그렇지만. 하여튼 청운관만 꼬이게 됐어. 남양상방에 뒤통수를 맞았으니. 와룡장에 이어 청운관도 문을 닫는 건 아닌가 몰라.”
순간 나른한 얼굴로 졸고 있던 연적하가 눈을 떴다.
이춘이 자신 있게 말했다.
“괜찮아. 청운관을 돕겠다고 낙양의 무관들이 나섰으니까 승산은 있어.”
“그들이 경천검객의 상대가 될까?”
“경천검객은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거야. 화산파 속가제자가 유명교 쪽에 선 홍방을 돕겠어? 그냥 마지못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라던데.”
“그러니까 청운관으로 가자?”
“두 번 말하면 입 아프지.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남양상방에 붙는 거야. 두고 봐. 낙양에서 온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청운관이라니까.”
“하긴 유명교에서 직접 이런 자잘한 일에 관여하지는 않을 테고…….”
“내말 믿어. 홍방이 유명교 쪽에 줄을 댔지만 유명교 핵심은 아니잖아. 홍방만으로는 청운관과 낙양 무관들을 당해 내지 못한다니까.”
이춘의 확신에 찬 말에 왕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낭인들은 줄을 잘서야 한다.
경천검객이 뒷짐 지고 있는다면 남양상방과 홍방은 청운관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연적하에게 와룡장은 애증의 대상이다.
백미주와 이복형제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만, 그래도 아버지에 관한 약간의 추억이 남아 있다. 연무룡이 그를 살뜰히 보살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이들처럼 괴롭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룡장인지라 문을 닫았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것이다.
연적하가 두 낭인들에게로 다가갔다.
“아저씨들, 뭐 좀 물어볼게요. 와룡장이 문 닫았다는 건 무슨 소리예요?”
이춘이 갑자기 끼어든 소년을 힐끔 바라보았다.
정갈한 옷차림과 허리에 걸린 내력 있어 보이는 검을 보니 보통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불쾌해하기보다 상대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로 했다.
“얼마 전에 월하선자가 와룡장을 접수했네. 저항하는 연씨는 죽이고 거기에 교당을 세웠지.”
“거기 살던 연씨들은 다 죽었나요?”
“죽은 건 몇몇 원로들이네. 안주인은 백가장으로, 아들들은 양가장으로 피했다고 하더군.”
“아…….”
연적하의 착잡한 표정을 본 이춘이 안됐다는 듯 말했다.
“와룡장과 친분이 있었나 보구먼.”
“전혀요.”
바로 부정하는 소년의 말에 이춘은 그러려니 했다.
솔직히 요즘 와룡장과의 친분은 자랑이 아니라 흠이니 당연하다.
연무룡의 뼈가 똥통에 처박힌 뒤로 무림인들은 와룡장을 수치스러워 했다.
“그런데 혹시 자네도 한자리 끼기 위해 여기 온 건가?”
“아니요. 그냥 지나가던 길입니다.”
주변 눈치를 살피던 이춘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보게. 시간 되면 청운관에 숟가락 얹는 것도 괜찮을 걸세. 그쪽이 우세하거든. 대우도 좋고.”
대우가 좋다는 말을 들으니 문득 추공이 떠올랐다. 남양상방에서 열흘에 은자 한 냥을 준다던가.
“얼마나 주는데요?”
“무조건 남양상방보다 오백 문 더 얹어 주는 걸로 알고 있네. 지금 남양상방이 은자 한 냥이니까, 한 냥 하고 오백 문 더 받는 거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연적하는 붉은 점의 남자에게 눈인사를 하고 계산대 앞으로 돌아갔다.
눈치를 보던 심양각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결국 월하선자가 와룡장을 건드렸군요.”
“그러게. 오랫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소문에 남궁세가 다음은 와룡장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됐다.
어느 정도 예견하던 일이지만 막상 실제로 벌어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 점소이가 다가왔다.
“손님들, 빈자리가 나왔습니다요. 이리 오시지요.”
연적하와 심양각은 점소이가 안내해 주는 자리에 앉아 간단한 요리를 주문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오자 두 사람은 조용히 먹었다.
심양각은 먹으면서 연신 연적하의 얼굴을 살폈다.
와룡장 소식을 들어서인지 먹는 게 시원치 않았다.
그도 연적하가 와룡장에 어떤 감정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폐인 생활을 할 때 오봉십걸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어서다.
결국 보다 못한 그는 넌지시 운을 뗐다.
“공자님, 마음이 불편하시면 청운관을 도와주고 가는 건 어떻습니까?”
“홍방에 물을 먹이자는 거야?”
“그렇게라도 기분을 풀고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됐어. 홍방이 나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연적하의 대인배스러운 모습에 심양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만강홍에는 여러 부류의 낭인들이 모여 있다.
이춘과 왕진청처럼 청운관에 가려는 사람도 있지만 남양상방을 도우려는 사람도 있었다. 서갑과 홍문관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연적하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유심히 바라보던 서갑이 동료에게 속삭였다.
“홍 형, 저 검 집 말야.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서갑의 말에 홍문관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자리에 앉은 소년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고풍스러운 검이 보였다.
확실히 검 집에 새겨진 용 문양이 낯설지 않다.
‘응? 저건…….’
낙양에서 온 서갑과 홍문관은 남양상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낙양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청운관으로 기운 걸 생각하면 의외의 선택이다.
사실 그들도 최근 서갑이 얻은 정보가 아니었다면 청운관으로 갔을 것이다.
홍문관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낙양에서 상방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와룡장 무사들과 만난 적이 있다.
저건 분명 와룡장의 연씨들이 들고 다니던 검이다.
그는 이미 남양상방으로 뜻을 정한 터라 피아(彼我)의 구분이 분명했다.
“흐흐, 서 형. 어디서 봤는지 잘 생각해 봐. 주제도 모르고 용 문양을 쓰는 무가야 뻔하잖아.”
조롱 섞인 그의 말에 잠시 뭔가 생각하던 서갑이 탁자를 가볍게 쳤다.
“아하! 와룡장! 대가리 수 믿고 나대다가 월하선자를 보자마자 내뺐다는 그 얼뜨기들?”
서갑의 목소리가 조금 높았기에 주변이 잠잠해졌다.
낭인이 몸값을 올리는 것은 간단하다.
공을 세우거나 유명해지면 된다.
남양상방에서 약속한 열흘에 은자 한 냥은 최소한 그렇다는 뜻이다.
실제로 받는 돈은 낭인의 명성에 비례해 차등 적용된다.
무명인 서갑과 홍문관의 경우 가장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와룡장 출신을 보았으니 이것도 기회라면 기회다.
유명교에 적대적인 세력은 정의맹과 남궁세가, 와룡장이다. 그중 와룡장은 본거지를 뺏기고 제자도 흩어져 먹잇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갑은 노골적으로 소년과 노인을 훑어보았다.
와룡장 일대제자들이 사용하는 검을 가진 소년과 도를 지닌 노인.
‘저 어린놈은 와룡장에서 달아난 연씨가 분명해.’
와룡장의 제자가 남양에 온 것은 청운관을 돕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 생각은 서갑과 홍문관만 한 건 아닌 것 같다.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던 몇몇 낭인들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의기양양해진 서갑이 계속해서 말했다.
“월하선자가 무덤에서 연무룡의 뼈를 파내 똥통에 처넣었다지? 그런 거 보면 연씨들도 참 뻔뻔해. 참월검객이라는 허명을 앞세워 그동안 얼마나 해 처먹었어? 와룡장 출신들은 쪽팔려서 구천검을 쓰지 못할……. 악!”
그는 말하다 말고 제 입을 움켜잡았다.
이윽고 다시 손을 뗐을 때, 그의 손바닥에는 돼지 뼈 한 조각과 부러진 이빨이 붙어 있었다.
입으로 피를 줄줄 흘리던 서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어느 육시랄 놈이냐!”
연적하가 가볍게 손을 들어 점소이를 불렀다.
“여기 돼지갈비[糖醋排骨] 하나 더 줘. 아주 맛있어. 마음에 들어.”
“예, 예…….”
살벌한 분위기에 점소이는 주문을 받자마자 후다닥 달아났다.
돼지갈비 운운하는 소리에 서갑은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저건!
탁자 위 접시에 자신의 이빨을 부순 것과 같은 뼈들이 보였다.
“너 이 개놈의…….”
순간 연적하가 뼈다귀 하나를 집어 가볍게 던졌다.
‘악!’ 소리와 함께 서갑이 두 손으로 입을 움켜잡고 주저앉았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홍문관이 벌떡 일어나 박도를 뽑아 들었다.
귀찮다는 듯 연적하가 다시 뼈를 던졌다.
빡. 콰당.
돼지 뼈에 이마를 강타당한 홍문관은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연이은 뼈 공격에 서갑의 투기는 사그라졌다.
그는 소년의 무위가 뛰어나다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홍문관에게 다가갔다. 그를 데리고 얼른 이곳에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바람일 뿐이다.
“어이, 와 봐.”
소년의 음성에 서갑은 맥없이 돌아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낭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에 열중하고 있다.
‘개 같은 놈들. 남이 차린 상에 숟가락 얹으려고 기회를 노리더니만.’
서갑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소년의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부러진 이빨을 혀끝으로 더듬고 있는데 소년이 물었다.
“월하선자가 와룡장에서 뭘 어떻게 했다고?”
“그, 그쪽은 와룡장의 제자가 아니십니까?”
서갑이 의아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와룡장 일을 더 잘 알 텐데 그걸 왜 묻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응, 아니야. 그러니까 대답이나 잘 해.”
“그 검은…….”
“두드려 패고 뺏은 거야.”
소년도 와룡장의 적이라고 생각한 서갑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답했다.
“월하선자가 부관참시를 한다고 연무룡의 무덤을 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뼈밖에 안 나오니까, 그걸 죄다 뒷간에 던져 넣었답니다.”
“…….”
연적하는 일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사내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아버지에 대한 정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을 먹다가 얹힌 것처럼 명치끝이 답답했다.
한참 눈치를 보던 서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소협.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예의 없는 사람이네. 실컷 욕하고 그냥 가겠다고?”
“용서해 주십쇼!”
서갑은 황급히 허리를 접었다.
잠시 그의 머리꼭지를 보던 연적하가 기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욕을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러 더는 못 먹겠어. 아까운 음식 버리게 됐으니까 은자 한 냥 놓고 가.”
“예? 예, 예. 감사합니다.”
서갑은 소년의 마음이 변할까 봐 은자 한 냥을 내놓고 재빨리 돌아섰다.
낭인이 고수에게 시비를 건 대가로 은자 한 냥이면 싸게 먹힌 거다.
만약 자신이 저 소년이라면 팔 하나는 잘랐을 것이다.
서갑은 기절한 홍문관을 들쳐 업고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일각(약 15분)쯤 지나 점소이가 추가로 주문한 돼지갈비를 가져왔다.
연적하는 정말 입맛을 잃은 듯 젓가락으로 깨작거리기만 했다.
보다 못한 심양각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제가 당장 월하선자 그 할망구의 모가지를…….”
“그만해.”
“……예.”
“가서 청운관이 어디에 모이는지 알아봐. 노느니 뭐해, 돈이나 좀 벌어 보자고.”
“흐흐. 예.”
심양각은 대답과 함께 벌떡 일어나 붉은 점과 텁석부리에게로 다가갔다.
“청운관이 어디에 모이는지 아느냐?”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던 이춘이 재빨리 답했다.
“그들은 양일객점에 모여 있습니다.”
“너희는 운이 좋은 놈들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줄을 잘 서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