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82
882회. 이것도 사숙님의 뜻입니까?
하남성.
정주.
칠리하촌.
멀리 호천맹이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하얀 구름 한 덩어리가 내려앉았다.
이윽고 구름 속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연적하와 화산파 장로 도산 진인이다.
감회 어린 눈으로 호천맹을 내려다보던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야! 천지맹 시절 그대로네.”
“겉보기만 그대로지 상주 인원은 그때의 일 할(10퍼센트)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왜요? 사파만 빠져나간 거잖아요?”
“삼년지약으로 칠파일문의 제자들까지 빠져나가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일 할은 너무했다. 그 숫자로 하남성 관리나 하겠어요?”
“지금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마을 규모도 많이 줄어들었지요. 호천맹을 드나드는 사람이 없다 보니…….”
“무림대회를 열기에는 좋은 환경이네요. 빈 전각이 많을 테니.”
“그렇기는 합니다만 호응이 예전 같을지 의문입니다. 그간 강호의 일을 너무 나 몰라라 해서……. 하아! 모두가 자업자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산 진인은 남맹의 무림대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구름을 타고 오면서 남맹이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천 연적하의 무위를 본 것은 아니지만 운종술만 해도 이미 천외천이었다.
일천이백 리를 단 사흘 만에 왔다.
그럼에도 연적하는 전혀 힘들어 하지 않았다.
구름을 타고 이동하는 것에 적응되지 않아 힘든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가 없었다면 그보다 빨랐을지도…….’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하는 도산 진인의 귓가로 연적하의 음성이 들려 왔다.
“맹주님에게서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죠?”
“다른 점이라고 하심은?”
“말이나 행동이 평소와 달라진 게 있냐는 거죠.”
“혹, 맹주가 미혼술 같은 것에 당하셨을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
“나도 한번 당할 뻔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허! 연 대협과 같은 분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실로 믿어지지 않는군요.”
도산 진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적하와 같은 신인(神人)도 그랬다면 모두가 당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만약 그들이 죽이려고 했으면 맹주님은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살아 돌아왔다니까.”
“연 대협께서는 천외이선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그 둘 중에 하나를 만난 적이 있어요. 어쩌면 둘 다 만났을지도 모르고요.”
“…….”
도산 진인은 그게 무슨 소린지 궁금했지만 감히 묻지 않았다.
곰곰 생각하던 그가 말했다.
“달라진 점이라면 천외이선과 유명교를 두려워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요즘은 유명교와 다시 상호불가침의 약속을 맺어야 한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연적하는 어떤 분위기인지 대충 감을 잡았다.
싸움에 앞장서야 할 맹주가 대결보다 타협을 주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스스로 겁먹은 것이든, 천외이선의 수작이든 둘 중 하나이리라.
‘만나 보면 알겠지.’
***
칠리하촌.
호천맹.
도산 진인은 연적하와 함께 맹주의 집무실인 상승각으로 향했다.
오가는 길에 마주친 호천맹 무인들이 연신 연적하를 힐끔거렸다.
그들에게 연적하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중양절 무림대회의 성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자, 든든한 아군이 될지도 모를 사람인 까닭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만큼 대협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 그러는 거니까요.”
도산 진인의 말에 연적하는 답하지 않았다.
소격각에서 뒷간을 청소하며 지낼 때에 비하면 저 정도 시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승각.
호천맹 맹주인 무극상인이 환하게 웃으며 연적하와 도산 진인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남천 대협. 오랜만에 만나는군요. 사숙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극상인은 연적하가 호천맹과 남맹의 동맹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온 줄로 알았다.
도산 진인과 연적하는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총사 공손일랑 공손기까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뒤이어 시비들이 다과상을 내왔다.
네 사람은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었다.
대화의 소재는 천지맹 시절의 무용담이 주를 이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나저제나 기회를 엿보던 공손기가 슬쩍 운을 떼었다.
“마교가 사천성을 지나 드디어 호광성에 이르렀습니다. 저들의 다음 목표는 하남성, 그다음은 남직례성일 겁니다. 호광성 동도들은 현재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의견이라고 했소?”
그간 호천맹을 떠나 있던 도산 진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천성처럼 마교의 말에 따를 줄 알았는데 다른 의견이 있었던 것일까?
“예, ‘마교의 말에 따르자’는 문파도 있지만, ‘호천맹의 무림대회에 참석하자’는 문파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중양절의 무림대회에 참가하려면 이제부터 슬슬 움직여야 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당면한 화를 피하고, 생각할 시간까지도 벌 수 있으니까요.”
“일단 마교의 손에서 벗어나겠다는 거구려.”
“그렇습니다. 호천맹에 와서 양측의 세와 투지를 확인하겠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천맹과 함께 마교에 맞서 싸우겠다’가 아니라 ‘확인’이라는 것이오?”
“정파가 호천맹과 남맹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윽고 공손기는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때 호천맹과 남맹의 동맹은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될 것입니다.”
도산 진인이 씁쓰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빈도가 말씀 드리도록 하겠소. 남맹은 동맹을 거절했소. 빈도가 남천 대협을 모신 것은 동맹에 대해 논의하기 위함이 아니오.”
“그렇다면 혹, 남천 대협께서 단독으로 호천맹에 도움을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공손기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사실 그게 아니라면 연적하가 굳이 호천맹까지 찾아올 이유도 없었다.
“아니외다. 빈도가 남천 대협을 모시고 온 것은 맹주를 위해서요.”
“맹주님요?”
“그렇소. 정확히는 투기가 꺾인 우리 맹주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총사와 맹주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알게요.”
순간 무극상인의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변했고, 공손기는 못 들은 척 딴청을 했다.
끝내 화를 참지 못한 무극상인이 입을 열었다.
“사숙. 이곳은 화산파가 아니라 호천맹입니다. 아무리 사숙이라도 말씀을 가려서 해 주십시오.”
“이곳이 호천맹이라서 하는 말이다. 너 하나로 끝나지 않고 정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 강호에서 호천맹을 가리켜 유명무실한 단체라고 말한다. 왜 그런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강적 앞에서 신중한 것이 그리 큰 문제입니까?”
“신중하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 너는 싸울 의지조차 없지 않느냐?”
“무림대회를 여는 것은 마교와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싸울 의지가 없다니요?”
“나는 유명교를 두고 하는 말이다.”
“…….”
도산 진인이 유명교를 거론하자 무극상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묘한 침묵이 상승각을 감돌았다.
공손기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무극상인과 도산 진인을 번갈아 보았다.
호천맹 내에서 무극상인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도산 진인밖에 없었다.
저 노골적인 지적에 무극상인은 뭐라고 답할까?
한참 만에 무극상인이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천외이선은 신적인 능력을 가진 고수들입니다. 이말씀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해야겠군요. 천하십대고수인 저조차 그들의 일초지적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숙께서 모시고 온 남천 대협이라고 다를 줄 아십니까? 천외이선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싸움을 피하자는 것입니다. 유명교와 협정을 맺지 않으면 우리는 멸망하고 말 겁니다.”
공손기는 무덤덤한 얼굴로 도산 진인과 연적하를 보았다.
‘자아. 무극상인의 말에 당신들의 대답은?’
도산 진인이 버럭 소리쳤다.
“언제부터 정파가 이기는 싸움만 했다고 그따위 소리냐! 과거 정의맹 시절에도 우리는 마교와 유명교를 상대로 무수히 많은 피를 흘렸다! 천외이선이 강하니까 악을 행하는 걸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하자는 것이냐? 유명교와 화친하자는 말이 네 입에서 나오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나! 유명교에 살해당한 수도자들을 잊었느냐?”
“잊은 게 아닙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 없기에 그러는 겁니다. 사숙은 지금 제 손으로 칠파일문을 멸문시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두 사람의 주장이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돌자 보다 못해 공손기가 나섰다.
“맹주님, 그리고 도산 진인, 고정하시지요. 손님을 모셔 두고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금껏 말없이 듣고 있던 연적하가 한마디 했다.
“아닌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예?”
공손기는 갑자기 연적하가 끼어들자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게 다 맹주님이 천외이선 따위에게 쫄아서 생긴 일이잖아요. 아니에요?”
“…….”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공손기의 시선이 무극상인에게로 향했다.
역시나 무극상인의 얼굴은 폭발 직전이었다.
“지금 내가 천외이선에게 쫄았다고 했나?”
“아뇨. 천외이선 따위에게 쫄았다고 했는데요?”
연적하는 시비 걸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무극상인 역시 그걸 느꼈는지 잠잠하던 눈에서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요즘 들려오는 소리가 천하십대고수 중에서 남천이 으뜸이라고 하더군. 그래 봐야 그 모두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한 것을.”
“개구리 눈에는 개구리만 보인다고 하던데. 개구리 맞으신가 보네. 천외이선에게 처맞고 잔뜩 겁먹은 개구리.”
연적하가 도발하듯 무극상인을 빤히 보았다.
무극상인의 입가에 냉소가 어렸다.
“이제 보니 너는 본 맹주에게 싸움을 걸기 위해 왔구나? 이것도 사숙님의 뜻입니까?”
무극상인이 도산 진인을 쏘아보았다.
도산 진인은 자신이 바라던 바는 아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부인하지 않았다.
“나는 연 대협에게 너의 투기를 되살려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다.”
“그래 봐야 개구리들의 다툼에 불과할 뿐입니다만, 사숙님께서 원하시니 어울려 드리지요.”
“나도 궁금하구나. 연 대협이 너와 같은 개구리인지 창천 하늘인지.”
도산 진인이 복잡한 눈으로 연적하와 무극상인을 보았다.
이런 전개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입맛이 썼다.
마음을 정한 무극상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가 협소하니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어떠하냐?”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는데, 나가야 실력 발휘를 다할 수 있다면 나가 드리죠.”
사실 진경(眞境)의 공법을 사용할 줄 아는 그에게 공간은 별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무극상인과 공손기는 그걸 계산된 도발로 받아들였다.
공손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같은 천하십대고수이니 예를 갖추지…….’
과연 녹림의 태상호법답다.
어떻게든 이겨 보겠다는 그 승부욕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한편으로 조잡해 보였다.
그가 아는 한 천하십대고수들 간의 경지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그 미세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계속 도발을 날린다고 생각하니 한 편으로 짠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맹주를 이겨 봐야 아무 소용 없을 텐데…….’
맹주의 말을 뒤집으려면 그가 ‘우물 밖의 하늘’임을 증명해야 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