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81
881회. 너는 그냥 평소처럼만 하면 된다
도산 진인은 슬쩍 검왕 남궁벽의 얼굴을 보았다.
남맹의 맹주인 검왕에게만큼은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 외에 달리 의논할 상대가 없었다.
“실은 두 달쯤 전 맹주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겠다며 은밀하게 잠행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천외이선이 금군을 제압했다는 것 말입니다. 맹주는 평소 천외이선의 위험성이 과대 포장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몇몇 의천문 제자들의 진술이 전부였으니까요.”
“저런. 쯧쯧!”
남궁벽은 바로 혀를 찼다.
천외이선의 실체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연적하와 남궁연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과장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맹주는 사제인 백호대 대주와 잠행에 나갔다가……. 중상을 입고 홀로 돌아왔습니다.”
“…….”
남궁벽은 살아 돌아온 게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는 현세보다 상위 차원에서 신좌(神座)에 오른 존재들인 까닭이다.
“현재 맹주는 치료 중이나 완전히 전의(戰意)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아시겠지만 호천맹에는 두 개의 무력 집단이 있습니다. 청룡대와 백호대지요. 청룡대는 호천맹이 자리한 하남성 일대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 밖의 지역은 백호대가 맡고 있는데, 아직 후임 대주조차 임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부끄럽지만 그러한 내부 사정으로 사천성에는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맹주는 천외이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사람이 상대할 수 없는 천외천의 존재라고 했습니다. 덧붙여 이후로 유명교는 피하라고 하더군요. 유명교를 건드리면 호천맹이 멸망한다고…….”
“맹주가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무림대회도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실상 호천맹의 무림대회는 마교를 견제하기 위함입니다. 마교가 하남성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을 생각입니다.”
“호천맹의 전력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남맹과 동맹을 맺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교가 남천 대협을 적대시하고 있으니, 남맹과 손을 잡아야겠다 싶어서…….”
“우리 남맹은 아시다시피 의창과 합비에서 유명교의 신당을 깨부쉈습니다. 호천맹은 이런 남맹과 함께 유명교를 상대로 싸울 수 있습니까?”
남궁벽은 서가장과 무산소축의 파괴를 남맹이 벌인 것처럼 말했다. 연적하와 남궁연이 남맹의 일원이니 남맹의 일로 받아들인 것이다.
도산 진인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전의를 상실한 맹주가 유명교와의 싸움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도산 진인은 절충안을 내놓았다.
“검왕 대협. 마교를 상대로 한시적인 동맹은 안 되겠습니까? 마교와 같이 사악한 이민족의 침입은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유명교는 같은 동포니까 인신 공양을 해도 봐주고, 마교는 이민족이니 힘을 합쳐 막자는 겁니까?”
“동포니까 봐주고, 이민족이니 막자라기보다는……. 두 개의 적 중에 하나만이라도 힘을 합쳐 막아 보자는 취지에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호천맹이 유명교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하면 다시 고려해 볼 의향은 있습니다. 동맹을 제안하기 전에 먼저 전의부터 가다듬기를 바랍니다. 적에 맞서 싸울 용기도 없으면서 동맹의 제안이라니요. 나는 호천맹이 이렇게까지 엉망인 줄은 몰랐습니다.”
“하아!”
도산 진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검왕이라 해도 호천맹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유명교는 피하고 마교와만 싸우겠다니.
호천맹이 남맹에 신뢰를 주기 전까지 동맹은 어려워 보였다.
“저어, 검왕 대협. 검왕 대협이나 남천 대협이 우리 맹주와 만나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무극상인을 만나 달라는 겁니까?”
“맹주는 천외이선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마교와의 싸움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나와 남천이 맹주를 만난다고 달라지겠습니까?”
“천하에서 무극 상인이 인정하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제 말도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습니다. 사숙인 저도 그럴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현재 무극상인은 다른 사람들의 말은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흘려버린달까요.”
“그러니 맹주를 설득해서 유명교와도 싸우게 만들어 달라는 겁니까?”
“호천맹과 남맹의 동맹을 위해서…….”
“말씀드렸지만 우리 남맹은 호천맹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남궁벽의 거절에도 도산 진인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호천맹은 정파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맹주가 유명교를 두려워하는 것은 정파의 수치이기도 합니다. 검왕 대협. 정파를 위해서라도, 무극상인이 이전처럼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게 해 주십시오.”
“허…….”
남궁벽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도산 진인을 보았다.
괜히 호천맹의 사자를 추궁했다가 귀찮은 짐을 떠안게 생겼다.
무인에게 있어 한번 꺾인 전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신적인 존재를 만나 그렇게 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산 진인은 더욱 간곡히 청했다.
“과거 정의맹과 천지맹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명교에 맞서 싸웠습니다. 허나 지금 호천맹은 맹주가 적을 두려워하여 피하는 형국입니다. 맹주가 그러니 누구도 앞장서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다 호천맹이 강호 도의에서 멀어지면 그 피해가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호천맹이 아니라 정파와 천하인들을 위해서, 의기소침해 있는 저희 맹주를 만나 주십시오.”
잠시 생각하던 남궁벽이 말했다.
“솔직히 그런 문제라면 나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무극상인처럼 나 역시도 천외이선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도산 진인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하기야 맹주는 ‘천하십대고수 전체가 덤벼도 천외이선을 상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같은 천하십대고수들의 말이 통할까?
어쩌면 오히려 검왕과 남천을 설득하려 들지도 모른다.
천하십대고수들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며, 우물 밖 하늘은 천외이선이라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남궁벽의 말에 도산 진인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하지만 남천이라면 무극상인을 일깨워 줄 겁니다. 남천에게 말을 해 보겠습니다. 호천맹에 다녀와 줄지 어쩔지를 말입니다.”
도산 진인이 놀란 눈으로 검왕을 보았다.
남천 연적하에게 말해 준다니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다.
‘검왕은 정말 남천이 천외이선을 이긴다고 믿는 건가?’
그건 달리 말해 남천이 천하십대고수들 전체보다 강하다는 뜻이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어쨌거나 남천이 무극상인을 만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
남궁세가.
천람소축.
“……그래서 나는 너를 추천했다. 도산 진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호천맹은 그저 하나의 단체가 아닌 정파의 상징과도 같다. 맹주가 그렇게 겁을 집어먹은 상태라면, 마교에도 굽힐 가능성이 있다. 만약 맹주가 마교 교주에게도 굽힌다면 작게는 호천맹, 크게는 정파 전체가 천하인들에게 손가락질받게 될 게다.”
남궁벽의 말에 연적하가 반문했다.
“남맹도 정파인데 왜 정파가 욕을 먹어요?”
“남맹이 정파로 분류되지만 이익 집단이라 강호 도의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남맹이 사천성에 뛰어들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호천맹과 남맹의 본질적인 차이이기도 했다.
“남맹이 이익 집단이라고요? 하지만 호천맹도 이권에 따라 움직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요?”
“호천맹이 이권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호천맹의 전신인 정의맹과 천지맹이 유명교와 싸운 것이 그 예다.”
“아하.”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보면 호천맹이 천하의 문파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 온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은 잔뜩 움츠러들어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지만 말이다.
“제가 무극상인을 만나서 투지를 일깨워 주면 되나요?”
“그래, 너라는 존재가 남맹에 있음을 알면 무극상인도 용기를 얻게 될 게다.”
남궁벽은 무극상인이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에 좌절한 것이라 믿었다.
‘신적 존재에 맞설 인간이 있다’는 걸 알면 그도 달라질 터였다.
“숙부님, 아니 장인어른, 그의 투지를 일깨워 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냥 가서 맹주를 만나고 오면 될 게다.”
“제가 특별히 해 줘야 하는 건 없고요?”
“너는 평소처럼만 하면 된다.”
“평소처럼요? 정말 그러면 돼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평소처럼만 하거라. 그럼 무극상인도 달라질 게다.”
“옙! 다녀오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연적하가 아기를 안고 있던 남궁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기와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말했다.
“지안아, 아빠가 금방 갔다 올게. 엄마랑 놀고 있어. 알았지?”
“꺄아아-.”
아기가 웃으며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연적하의 얼굴을 잡으려 했다.
연적하가 모르는 척 얼굴을 들이밀자 남궁연이 아기를 뒤로 뺐다…
“씻지 않은 얼굴 들이밀지 말라고 했지?”
“누님. 아침에 세수했거든요?”
“지금은 미시 말(오후 3시)이라고.”
“누님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내 피부는 먼지나 땀을 밀어낸다고요. 사실 씻으나 안 씻으나 똑같아요.”
“지난번에 한지로 얼굴 닦으니까 기름이 번지르르하게 묻어 나온 건 잊었나 봐?”
“와아! 누가 들으면 내가 완전히 더러운 줄 알겠네. 그 정도 기름은 누구에게나 나와요.”
“나는 지안이 손에 네 얼굴 기름 묻히고 싶지 않으니까 씻고 와.”
“갔다 와서 씻을게요.”
결국 연적하는 딸의 손에 얼굴을 비비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연적하가 대연각으로 향하자 남궁세가 제자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
대연각.
도산 진인은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남궁세가 사람들 수십 명 사이에 연적하가 뻘쭘한 얼굴로 서 있었다.
도산 진인과 눈이 마주치자 연적하가 손을 흔들며 알은체를 했다.
“도사님! 여깁니다!”
도산 진인이 웃으며 연적하를 향해 다가갔다.
과거 천지맹 시절 칠리하촌에서 본 적이 있지만 개인적인 만남은 처음이었다.
“화산파의 도산 진인입니다.”
“예, 정주의 칠리하촌으로 가면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어려운 청을 승낙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가시는 길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래도 혹 필요한 게 있으시면 빈도가…….”
연적하가 쓸데없이 길어지려는 그의 말을 끊었다.
“아니에요. 내가 모시고 갈 테니까 불편해도 참으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자 도산 진인이 손사래를 쳤다.
“어이쿠!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호천맹의 손님이니 마땅히 제가 모시고 가야지요.”
합비에서 정주까지의 거리는 일천 이백 리(약 440킬로미터)나 된다. 그 먼 거리를 말을 타고 오가려면 들어가는 경비가 적지 않다.
그는 연적하의 말과 음식은 물론 숙박료 일체를 계산해 줄 요량이었다.
순간 주변에 모여 있던 남궁세가 사람들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허어! 이건 또 무슨?’
당황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는 도산 진인에게 청운검 남궁천이 말했다.
“진인께서는 눈만 크게 뜨고 계십시오. 아! 길은 잘 알려 주셔야 할 겁니다. 적하가 길눈이 조금 어둡거든요.”
남궁천의 설명에 도산 진인은 억지 웃음을 띠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건 설마 후기지수들의 말장난 같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