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80
880회. 지안(至安), 편안함에 이르라
남직례성.
합비.
남궁세가.
창궁각.
마교가 호광성에 진입하던 날, 검왕 남궁벽은 남궁세가와 석경장 사람들을 창궁각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연적하에게 서찰 하나를 내어 주며 말했다.
“지안(至安)이다. 편안함에 이르라는 뜻이지.”
연적하가 서찰을 펼쳐 ‘지안’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후 남궁연에게 건넸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남궁세가 사람들과 석경장 사람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기의 이름이 나오기까지 한 달이나 걸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기간 동안 남궁벽은 남궁세가는 물론 남맹의 일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아기에게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는 창궁각만 봐도 알 수 있다.
남궁벽이 남궁세가와 석경장 사람들을 부른 것은 격변하는 강호사를 의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녀의 이름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창천대 대주 척사검 남궁진이 연적하와 남궁연에게 다가가 축하의 인사를 건넨 후 남궁벽을 향해 말했다.
“숙부님, 큰일을 끝내셨으니 이제 남맹의 일도 좀 돌아보셔야지요?”
“남맹에 무슨 일이 있느냐?”
“중양절의 무림대회도 문제지만, 호천맹에서 계속 동맹을 제의해 오고 있습니다.”
“너는 오늘처럼 뜻깊은 날 꼭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느냐?”
“저라고 그러고 싶겠습니까. 오늘도 호천맹의 사자가 남맹에 와 있어서 그럽니다.”
“…….”
남궁벽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동안 호천맹에서는 툭하면 사자를 보내 여러 가지 제안을 해 왔다.
중양절의 무림대회부터 호천맹과 남맹의 동맹까지.
마교가 호광성으로 접근할수록 불안한지 더 자주 사자를 보냈다.
“사자라……. 누가 왔느냐?”
“화산파의 도산 진인께서 오셨습니다.”
“도산 진인? 도 자 배면 맹주인 무극상인보다 윗분이 아니냐?”
“무극상인의 사숙이라 합니다.”
“흠. 알겠다. 가서 전하거라. 내 곧 만나러 갈 터이니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맹주님께서 직접 만나시려고요?”
남궁진은 남궁벽이 남맹의 일을 보겠다고 하자 바로 호칭부터 바꿨다.
“호천맹 맹주의 사숙이 왔는데 이쪽에서도 그 정도 성의는 보여 줘야지. 그런 게 인지상정이라는 게다. 뭐, 내가 따로 알아볼 일도 있고.”
“맹주님께서 궁금한 것도 있으셨습니까?”
남궁진이 의외라는 얼굴로 남궁벽을 보았다.
그동안 남맹의 일에 손을 대지 않아 관심이 사라졌나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너는 내가 하루 종일 작명에만 매달린 줄 아느냐?”
“거의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조카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남궁벽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잔소리 말고 가서 도산 진인이나 모시거라. 내 곧 따라갈 터이니.”
“예.”
남궁진은 진지한 얼굴로 물러섰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맹주가 도산 진인에게 볼일이 있음을 깨달은 탓이다.
***
그로부터 한 식경 뒤.
대연각.
도산 진인과 차를 마시던 남궁진은 맹주가 오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주님께서 오셨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남궁진은 두 사람을 위해 자리까지 피해 주었다.
도산 진인은 남맹의 맹주인 검왕이 오자 감격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빈도(貧道)는 화산파의 도산 진인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청천대 대주를 통해 말씀 들었습니다. 무극상인의 사숙이시라고요?”
“허허, 그렇습니다. 무극상인의 시승이 저의 사제입니다.”
“귀한 분을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사죄의 뜻으로 한잔 올리겠습니다.”
남궁벽은 마치 술이라도 따르듯 도산 진인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어이쿠!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검왕이 사죄하겠다’고 하자 도산 진인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남맹의 맹주가 이렇듯 자신을 존중하니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찻잔을 집어 들어 차의 향기를 음미하던 도산 진인이 지나가듯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것을 보니 오늘 남맹에 무슨 행사가 있는 모양입니다?”
“남맹은 아니고 남궁세가에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혹 빈도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저에게 늦게 얻은 손녀가 하나 있음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인한 딸과 사위가 손녀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는데, 오늘에야 정할 수 있었습니다.”
“아! 허면 일이라는 것이 영손(令孫)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도산 진인께서 계신 줄 알았으면 초대했을 텐데, 아쉽군요.”
남궁벽이 진지하게 말하자 도산 진인은 고마우면서도 내심 이해하기 어려웠다.
‘거참! 기이한 일이로군.’
고작 손녀의 이름 하나를 두고 남궁세가가 이렇듯 요란을 떨 줄은 몰랐다.
“그래서 영손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편안하게 살라고 ‘지안’이라 지었습니다. 그 이름을 짓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으니, 제 할아비의 노고를 알고 꼭 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허! 허! 허!”
도산 진인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호천맹의 사자들이 매번 헛걸음한 이유를 알게 된 때문이다.
이윽고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고 생각한 도산 진인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맹주님. 현재 강호는 마교와 유명교로 인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입니다. 사천무림맹은 화를 피한다고 거악(巨惡)을 외면했지만, 호천맹과 남맹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호천맹은 마교와 유명교를 상대로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남맹은 어떻습니까?”
“그야 당연히 남맹도 싸워야지요.”
검왕의 대답에 고무된 도산 진인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마교와 유명교는 공동의 적입니다. 그것도 아주 막강한 적이지요. 호천맹과 남맹이 손을 잡지 않으면 이 파고(波高)를 헤쳐 나가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동맹에 대한 말씀이라면 이미 남맹의 입장을 충분히 전했다고 생각합니다만.”
뜨겁게 달아올랐던 도산 진인의 얼굴이 대번에 가라앉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허탈한 얼굴로 침묵하던 도산 진인이 물었다.
“왜 호천맹과의 동맹을 피하는 겁니까? 우리 호천맹이 다른 저의를 가지고 있을까 봐 그러는 거라면…….”
“그런 것 때문이 아닙니다.”
남궁벽은 도산 진인의 말을 끊었다.
호천맹에서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들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허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그 이유를 속 시원히 알려 주십시오.”
“그 이유는 이미 호천맹의 사자들에게 몇 번이나 말씀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맹의 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맞습니까?”
“정확히 알고 계시군요. 그래서 굳이 호천맹과의 동맹이 필요 없다고 한 것입니다.”
“허허! 마교와 유명교를 남맹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으시다고요?”
도산 진인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무림사에 다시없을 저 천산의 마교는 차치하고, 당장 유명교만 해도 정사파가 막지 못했다.
그래서 나온 게 삼년지약이 아니던가.
만약 유명교주가 무림의 패권에 관심이 있었다면 삼년지약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정사파가 유명교에 밟힌 게 고작 삼 년 전의 일인데, 남맹의 힘만으로 막을 수 있다니?
남궁벽은 무덤덤한 얼굴로 도산 진인을 보았다.
저런 반응이 정상이다.
연적하의 무위를 모른다면 저렇게 기막혀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뒤늦게 남궁벽의 담담한 태도를 본 도산 진인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진심이시군요.”
“그렇습니다.”
“…….”
도산 진인은 한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맹에서 어떤 이권을 얻어내기 위해 버티는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뭐지? 설마하니 정말 연적하와 남궁연을 내세워 해결하겠다는 것인가?’
그가 한창 남맹의 숨겨진 힘에 대해 생각할 때 남궁벽이 물었다.
“도산 진인. 나도 남맹의 맹주이자, 한때 정의맹과 천지맹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람으로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빈도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마교가 사천성을 휘젓고 다닐 때, 왜 호천맹은 구경만 했는지 궁금해서요.”
“…….”
뜻밖의 질문에 도산 진인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그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건 남맹도 마찬가지겠지만 아직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입니다. 천지맹이 해체된 이후에 호천맹에는 몇 사람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중양절의 무림대회는 함께 싸울 동도들을 모으기 위함이지요. 남맹의 사정도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도산 진인은 은근히 화살을 남맹으로 돌렸다.
남맹 역시 마교를 치기 위해 사천성으로 달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오해가 있으시군요. 남맹은 남직례성 문파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천하를 대상으로 하는 호천맹과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아, 그렇군요. 그래도 마교를 상대로 하는 일은 지역을 초월한 정파 모두의 일이라 생각되는데…….”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남맹의 문주들과 회의를 해 보도록 하지요. 저희 남맹은 말씀드린 대로 남직례성의 일이 아니라 지켜보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천맹은 왜 사천성을 수수방관한 것입니까?”
“그건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호천맹에 인원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유명교가 발호하였을 때 정의맹은 따로 무림대회를 열지 않고도 잘 대응했습니다. 정의맹 산하의 문파들이 제자들을 동원해 싸웠지요. 나도 그 싸움에 동참했기에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사천성으로 달려간 호천맹의 문파는 없었습니다.”
“…….”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도산 진인도 변명하지 않았다.
호천맹 산하의 문파들이 사천성에 가지 않은 건 사실인 까닭이다.
“설마 호천맹도 마교의 강호 활동을 눈감아 주기로 한 겁니까?”
“그럴 리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남맹에 동맹의 제의를 하겠습니까?”
도산 진인은 펄쩍 뛰며 부인했다.
하지만 남궁벽의 날카로운 추궁은 계속됐다.
“그럼 왜 단 하나의 문파도 사천성으로 달려가지 않은 겁니까? 조금 전에 마교는 지역을 초월한 강호 전체의 문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끙!”
도산 진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호천맹에서 사천성을 휘젓고 다니는 마교를 구경만 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호천맹 산하의 문파들이 마교의 상대가 되건 안 되건 맞서 싸워야 했다.
“그 부분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면, 나는 호천맹이 마교와 결탁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남맹이 호천맹과 동맹을 맺으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군요.”
“…….”
도산 진인의 얼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실 강호에서 동료를 배신하는 일은 비일비재한 터라 남궁벽의 의심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검왕 대협. 호천맹은 마교와 결탁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빈도의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믿어 드리겠습니다.”
“하아!”
도산 진인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감추고 싶었지만 저 경험 많은 검왕을 속이기는 힘들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