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79
879회. 아생후살타(我生後殺他)
사천무림 회합 하루 전.
사천성.
청성파.
상청궁.
해거름 무렵, 장문인의 집무실에 세 노도사가 마주 앉았다.
청성파 장문인 원양 진인과 그의 사형이자 호법인 덕양존자, 그리고 장로인 사제 금양 진인이다.
원양 진인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일 천룡문에서 사천무림의 문주들이 모이기로 했습니다. 천룡문의 황 문주와 당가의 새 가주는 마교의 요구를 들어주자고 하더군요.”
덕양존자와 금양 진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호천맹이 유명무실한 지금 마교에 맞설 단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양 진인의 말이 이어졌다.
“청성파에서 이번 회합의 분위기를 이끌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덕양존자가 눈을 찌푸렸다.
마지못해 하는 것과 능동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마교의 뜻대로 되면 좋겠지만, 그 반대 상황이 되면 청성파는 배도(背道)의 무리가 되고 말 터였다.
“장문인, 그 문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소. 우리가 연적하와 척을 진 것은 피치 못할 상황이라 그런 것이었소. 사천무림의 문주들도 다 그렇게 알고 있고. 그런데 우리가 연적하를 배척하는 일에 앞장선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본뜻이라고 믿지 않겠소?”
“사형은 우리가 사천무림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소. 연적하와 척을 지는 게 옳은 일인지 아직 확신이 서질 않소.”
그러자 금양 진인이 끼어들었다.
“덕양 사형. 옳고 그름을 떠나, 이미 우리 청성파는 연적하와 척을 지었습니다. 석경장 사람들을 별궁에서 내보내던 날 그와 우리의 관계는 끝난 겁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마교의 치하에서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 할 겁니다.”
덕양존자가 금양 진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금양 사제는 마교가 얼마나 갈 것 같은가? 일 년? 십 년? 무림사에 지금까지 마교가 강호의 주인이 된 적이 없네. 그들은 태풍처럼 한바탕 강호를 뒤집어 놓았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했지. 그러니 마교 치하보다는 마교가 떠나간 이후를 생각해야 하네. 우리가 대의(大意)를 따라야 하는 것도 그래서고. 옳고 그름은 대의에 관한 문제일세.”
“옳고 그름, 대의, 좋지요. 연적하가 누굽니까? 무당파의 속가제자라고 하지만 그 뿌리는 녹림의 도적입니다. 강호에서는 그를 대악마라고 부릅니다. 그가 기연으로 도력을 얻어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있지만, 천도(天道)를 따르는 협객은 아니지요. 녹림의 총채주가 소림사 출신이지만 그도 마두잖습니까? 마두와 척을 지는 일이 왜 대의에 어긋납니까?”
사실 파천마군 석무해는 소림사 잡부였지만 금양 진인은 소림사 출신으로 뭉뚱그렸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보다 현재를 봐야 한다’였다.
덕양존자는 반박하지 않았다.
사제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괜히 반박하다 청성파의 잘못이 드러날까 싶어서다.
애초에 석경장을 별궁에서 내보낸 것은 황실의 눈치가 보여서였다. 오랜 세월 청명을 자랑하던 청성파로 서는 두고두고 부끄러울 일이다.
사형제 간에 대화가 달아오르자 원양 진인이 나섰다.
“두 분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청성파가 대의를 좇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또한 연적하가 녹림의 태상호법으로 대악마 소리를 듣는 것도 사실입니다.”
원양 진인은 연적하가 녹림에 속해 있음을 에둘러 말했다.
중립적인 듯하지만 금양 진인의 주장에 조금 더 힘을 실어준 셈이다.
덕양존자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장문인을 보았다.
“그래서 장문인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우리는 본의 아니게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입니다. 호천맹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당장 마교의 손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지요.”
“지금은 사천무림이 마교의 뜻에 따른다 칩시다. 나중에 호천맹과 남맹이 마교와의 전쟁을 선포한다면 어쩌실 생각이오?”
“덕양 사형. 아직 오지 않은 일을 고민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훗날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흐름에 맞는 답이 있을 겁니다.”
금양 진인도 장문인을 거들고 나섰다.
“장문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 청성파나 사천무림은 마교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마교를 적대시하는 순간 도륙을 당할 겁니다. 그렇다고 마교와 싸우겠다는 곳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호천맹과 남맹의 무림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사천 무림이 몰살을 당할 판입니다.”
“금양 사제의 말대롭니다. 우선은 내가 살고 난 이후에 적을 죽여야 한다[我生後殺他]고 하지 않습니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마교의 행보가 과거와 다르다는 점입니다. 마교 교주는 연적하의 죽음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후의 행보도 과거와 같지는 않을 겁니다.”
“어쩌면 천산으로 돌아갈지도 모르지요.”
금양 진인은 자신이 말하고도 이상한지 뻘쭘한 얼굴을 했다.
그거야말로 동화(童話) 속에서나 가능한 일인 까닭이다.
사제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덕양 존자가 입을 열었다.
“장문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미 뜻을 정한 것 같구려. 나도 반대는 하지 않으리다. 다만 바라기는 사천 무림을 앞세우고 청성파가 뒤를 따라갔으면 하오.”
그래야 일이 잘못돼도 청성파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양 진인은 사형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내일의 회합까지만 분위기를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청성파가 나갈 방향이 정해졌다.
회의를 마친 세 사람은 미지근하게 식은 차로 메마른 입을 축였다.
***
그리고 현재.
천룡문.
“논의에 앞서 잠시 청성파 장문인의 말씀을 들어 보도록 합시다.”
천룡문 문주 천룡금검 황의식의 청에 청성파 장문인 원양 진인이 앞으로 나섰다.
“반갑습니다. 빈도는 청성파의 원양 진인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아생후살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선은 내가 살고 난 뒤에 적을 죽이라는 뜻이지요. 마교가 원하는 것은 연적하입니다. 그는 무당파의 속가제자이자 남궁세가의 사위입니다. 또한 녹림의 태상호법으로 강호에서 악명이 자자한 대마두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원양 진인은 잠시 문주들과 눈을 맞추었다.
과감하게 ‘대마두’라고 했지만 거부감을 표하는 문주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마교에 연적하를 팔아넘기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게 된다는 것을.
“혹자는 ‘왜 마교와 싸우지 않고 자중지란을 일으키느냐?’고 따질지 모르겠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사천무림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마교 교주의 친위대인 흑룡대조차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마교는 묘법구경문(妙法究竟門), 독행무주문(獨行無住門), 무사무생문(無死無生門)의 마교 삼문(三門)에, 흑룡대와 적룡대까지 그 숫자가 무려 삼백을 넘습니다. 그냥 삼백이 아니라……. 전대(前代)의 거마(巨魔) 삼백 명입니다. 호천맹과 남맹이 달라붙어도 상대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전력이지요.”
“…….”
사천무림의 문주들은 공개된 마교의 힘 앞에 숨도 쉬지 못했다.
“지금은 아생(我生), 즉 내가 살아야 할 때입니다. 호천맹이든 남맹이든 저 멀리서 들고일어나 줘야 후살타(後殺他)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옳소!”
“맞습니다!”
“호천맹과 남맹이 구경만 하는데 왜 우리가 죽어야 합니까!”
사천무림의 문주들이 한마디씩 외쳤다.
그들의 호응에 고무된 원양 진인이 손을 번쩍 쳐들고 소리쳤다.
“누군가 대의에 대해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아생후살타’가 대의라고! 그래서 지금은 강호의 대마 두 연적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청성파 장문인께서 시원하게 말씀 잘 해 주셨습니다!”
“원양 진인님의 말씀을 들으니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여러분! 우리도 사천무림, 사천무림, 말만 하지 말고 이참에 뭉칩시다! 남맹도 호천맹이 못 미더워서 떨어져 나간 게 아닙니까! 우리 사천무림도 이참에 정식으로 뭉칩시다! 원양 진인을 맹주로 모시고, 이 난국을 헤쳐 갑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곳곳에서 화답했다.
“찬성이오! 사천무림의 운명은 우리 사천무림의 무인들이 결정해야 하오!”
“원양 진인을 맹주로 모십시다!”
“원양 진인! 사천무림을 이끌어 주십시오!”
문주들의 소란에 원양 진인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천룡문주 황의식을 보았다.
분위기만 띄우고 빠지려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자 황의식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사천무림이 따로 뭉쳐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일장 연설을 마친 원양 진인은 황당한 얼굴로 물러났다.
뒤이어 나온 황의식이 문주들에게 ‘사천무림맹의 결성’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당연히 모두가 찬성했다.
그 자리에서 ‘사천무림맹’이 결성됐고, 초대 맹주로 원양 진인이 추대됐다.
회의가 얼추 끝나 가자 황의식은 원양 진인에게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누가 뭐래도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사람들인데……. 맹주님의 연설에 크게 감동을 받은 모양입니다. 사천무림의 동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지요.”
“…….”
순간 원양 진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남들 눈에야 영광스러운 자리로 보일지 몰라고 그에게는 아니었다.
‘어허! 분위기만 띄우고 뒤로 물러나 남들을 따라갈 생각이었는데…….’
도리어 가장 주목을 받게 생겼다.
사천무림맹의 맹주는 잘해도 욕을 먹고, 못하면 청성파까지 박살 날 그런 자리였다.
***
사천무림이 호천에서 갈라져 나갔다.
사천무림맹의 결성은 호천맹의 지위와 그들의 결속을 더욱 약화시켰다.
강호는 친마교 성향의 사천무림맹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호천맹, 그리고 반마교의 행보가 예상되는 남맹으로 분열됐다.
유명교와 마교라는 전대미문의 강적들 앞에서 정파가 사분오열한 셈이다.
수많은 협객들이 사천무림맹과 청성파를 비난했다.
“정파의 문파들이 마교와 손을 잡다니 선대 보기가 부끄럽지 않은가!”
“강적을 앞에 두고 뭉쳐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히려 적전분열이라니! 철회하라!”
“모두가 청성파의 잘못이다. 그들은 호천맹에서 무리수를 두다가 밀려나니 사천무림맹을 만들어 갈라져 나갔다. 청성파는 언제까지 잘못된 길을 가려는가!”
“원양 진인은 정신 차려라! 마교와 유명교가 천년만년 갈 것 같은가! 그들이 사라지면 얼굴을 어찌 들려고 그러는가!”
들끓는 협객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천무림맹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원양 진인의 연설로 되받아쳤다.
원양 진인의 ‘아생후살타’는 그의 마음과 관계없이 천하로 퍼져 나갔다.
그 연설로 인해 원양 진인을 ‘아생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마저 생계났다.
팔월에 접어들자 천하에서 ‘아생진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원양 진인보다 ‘아생진인’이라고 해야 알아들을 정도였다.
원양 진인과 청성파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결과를 맞이하게 된 셈이다.
명예를 버린 대신 사천무림맹은 실속을 챙겼다.
마교는 거짓말처럼 사천 지방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들은 사천을 자신들의 근거지인 천산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청성산을 떠난 마교는 동쪽으로 움직여 달주(達州)에 이르렀다.
누가 봐도 그들의 다음 목적지는 호광성이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사천무림을 보던 호광성 문파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누군가는 호천맹이 막아 주길 바랐고, 또 다른 이는 남맹을 찾았다.
하지만 호천맹과 남맹의 무림대회는 중양절(음력 구월 구일).
그때까지 호광성에 있는 문파가 마교 고수들을 상대해야 함은 물론이다.
천하인들의 이목이 호광성으로 쏠렸다.
사람들은 호광성도 ‘아생후살타’의 대열에 합류할지, 맞서 싸울지를 궁금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