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16
916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가장 먼저 검존 모용삭의 검이 움직였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가장 선두의 검형을 바깥으로 쳐 냈다.
쨍-!
가까스로 검형의 방향을 돌리는 데 성공했으나 그만 검이 반토막 나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파편이 혼천검 모용수에게 튀었다.
모용수로서는 날벼락을 만난 셈이다.
검편(劍片)은 모용삭을 돕기 위해 뛰어들었던 모용수의 어깨에 박혔다.
그나마 얼굴이나 심장에 꽂히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
“윽!”
외마디 소리와 함께 모용수의 신형이 흔들렸다.
모용삭은 잠깐 모용수를 보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할 틈도 없었다.
코앞까지 도달한 검형에 최후를 직감한 그는 선천지기까지 일깨웠다.
우우웅-.
반토막 난 검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걸 본 모용삭의 얼굴에 허허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야말로 마른 수건을 쥐어짠 것과 같은 형국이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다.
‘죽겠군.’
왜 유명교주와 천외이선의 상대가 남천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걸 대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런 고수에게 ‘방자하게 행동할 자격이 있는지 보이라’고 했다니…….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그는 반토막 난 검을 앞으로 뻗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십여 개의 검형들이 반토막 난 검을 비끼듯 지나쳐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그 순간만큼은 그도 눈을 감았다.
자신의 늙은 육체를 조각 낼 검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지 않아서다.
무인이 끝까지 상대의 병기를 지켜보는 것은 막거나 피하기 위해서다.
지금처럼 죽음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면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콰창-!
소리만 들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일월검 모용완의 검이 부러진 것이리라.
문득 자신을 수행하겠다며 따라나선 모용수와 모용완에게 미안했다.
‘내세에서 다시 만나면 그때는 내가 너희들을 섬기도록 하마.’
그런데 기다려도 몸에 느낌이 없다?
자신이 이미 죽었을 리는 없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한 자(약 30센티미터) 앞에 검형이 둥둥 떠 있었다.
남천이 마지막 순간에 공격을 멈춘 것이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온몸에서 맥이 쑥 빠졌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에게 패했음에도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자신의 앞에 둥둥 떠 있는-검형이었다.
싸워 봐서 안다.
무슨 원리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저건 허상이 아닌 실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반 토막난 검으로 검형을 툭 건드렸다.
챙-!
검형과 자신의 반토막 난 검이 부딪치자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모용삭은 황망한 눈으로 검형을 보았다.
실체라는 걸 알았지만 정말 쇳소리가 나자 머릿속이 뒤죽박죽되고 말았다.
그때 연적하가 손을 휘저었다.
모용삭, 모용수, 모용완의 앞에 떠 있던 천둔검들이 거짓말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뒤늦게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모용삭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궁금하다고 목숨까지 살려 준 상대의 검에 손을 대다니?
그건 검존 소리를 듣는 무림의 원로가 할 짓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연적하를 향해 읍을 해보였다.
“변명의 여지 없이 패했소이다. 귀하의 행동은 귀하의 무위에 걸맞음을 인정하오. 모용가에 베풀어 준 은혜는 잊지 않겠소. 그럼 이만.”
미련 없이 돌아선 모용삭은 두 사람을 데리고 즉시 금와상방을 떠났다.
연적하가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는 공손찬과 백익을 향해 말했다.
“가서 똑똑히 전해. 나 한 입 가지고 두말 안 한다.”
“예.”
공손찬과 백익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검존 일행을 한 수에 제압해 버린 그에게 ‘싫다’고 말할 용자(勇者)는 없었다.
***
다음 날.
구름을 타고 석경장으로 돌아가던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합비에 접어들었을 때 익숙한 기감이 느껴져서다.
“왜 그러십니까?”
“마기가 있네?”
“마기요? 마교의 잔당들이 아직 남아 있는 걸까요?”
“그쪽 마기와 약간 달라. 그보다는 마천의 마기에 가까운데?”
“마천요? 설마 ‘범천욕계왕재천(梵天欲界王在天)’의 그 마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천외이선이 황궁에서 나왔나 보죠.”
심통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연적하가 그를 빤히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살 만큼 살았다 이거야? 이젠 만사가 귀찮아?”
“제가요?”
“심 노인이 생각이란 걸 안 하고 사는 것 같아서 그래.”
“흐흐. 그럴 리가 있습니까?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을 모르시나 본데…….”
연적하가 심통의 말을 끊었다.
“마천의 마기라면 다 천자마인 줄 알아?”
“아! 천자마의 마기는 또 다릅니까?”
심통은 머리를 긁적였다.
마천의 마기라기에 천자마가 움직이나 보다 했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천자마의 마기는 마물의 마기와 달라. 무려 신좌에 오른 존재라고.”
“현세에 마천의 마물이 있다는……. 아! 유명교주를 따라다니던 그 마물입니까?”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
“천외이선만 생각하다 보니 제가 좀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황궁에 처박혀 있어야 할 마물이 합비까지 왜 나왔을까요?”
“그러게. 왜 나왔지? 가서 물어보자고.”
석경장으로 향하던 구름이 방향을 틀어 합비 외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
남직례성.
합비.
소호(巢湖) 동편.
정오 무렵.
화기대(火器隊, 조총부대)의 선두가 멈추자 뒤따르던 사례병필태감(司禮秉筆太監) 이승도 말고삐를 살짝 당겨 말을 세웠다.
이윽고 화기대의 대장인 천호 척운기가 말을 달려왔다.
“대인. 날이 추우니 잠시 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이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척운기가 주변에 있던 군졸들에게 턱짓을 했다.
군졸들이 재빨리 이승에게 달라붙어 그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다른 이들은 마른 나무를 주워다가 불을 피웠다.
빠릿빠릿한 동작이 역시나 일반 위소(衛所)의 부대와는 달랐다.
이승은 만족한 눈으로 화기대가 하는 일을 지켜보기만 했다.
‘화기대가 백번 낫지.’
그는 눈치만 발달한 다른 태감들과 달리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그래서 유명교주의 명이 떨어졌을 때 화기대를 끌어들였다.
무림 고수와 싸울 때는 일천 명의 일반병보다 백 명의 조총수가 낫다고 생각해서다.
겉으로는 훈련이라 했지만 조총 부대 지휘관이 자신의 사람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잠시 후 불을 쬐던 이승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유명교주의 오른팔인 이리과사(伊利戈斯, 흑기사 헬리고스)가 눈에 들어왔다.
혹한의 추위를 느끼지 않는지 불 옆으로 단 한 번도 가까이 온 적이 없다.
이리과사를 보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문득 화기대와 이리과사가 싸우면 어느 편이 이길지 궁금했다.
‘이리과사가 이기겠지?’
북방 이민족들과의 전쟁에서 이리과사가 화승총에 맞고도 건재했다 들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는 다시 불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하필 그때 불어온 광풍에 모닥불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불씨가 얼굴로 튀자 깜짝 놀란 이승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어이쿠! 씨벌!”
그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때 머리 위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랏일 하는 사람이 대낮에 왜 마물을 끌고 다니지? 누가 시켰어? 황제야? 유명교주야?”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리던 이승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전설에 나오는 신선처럼 구름 위에 청년과 염소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애써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분은 혹 남천 연적하 대협이 아니십니까?”
대답 대신 구름이 부드럽게 땅 위에 내려앉았다.
이윽고 구름 밖으로 나온 연적하가 묘한 눈으로 관인과 그 뒤의 흑기사를 보았다.
“맞아. 내가 남천이야. 누가 시켰냐니까?”
연적하는 상대의 정체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황제와 유명교주 중에 누가 저런 황당한 짓거리를 시켰는지 알고 싶었다.
이승이 짐짓 근엄한 얼굴로 답했다.
“이리과사는 유명교주의 수호신인데 누가 시켰겠소? 이리과사! 남천을 죽여라!”
순간 이리과사의 눈에서 시뻘건 화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리과사를 태운 흑마가 가볍게 도약해-이승과 모닥불을 뛰어넘어-연적하 앞에 섰다.
푸르륵-.
흑마가 투레질을 하자 용암처럼 시뻘건 침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중 몇 방울이 가까이서 구경하던 화기대 군사 셋의 몸에 닿았다.
순간 군사들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앗! 뜨거워!”
“불이다!”
“살려 줘!”
불길에 휩싸인 셋이 비명을 지르며 얼어붙은 땅 위를 굴러다녔다.
그러나 다른 화기대 군사들은 행여나 그 불이 자신에게 옮을까 봐 오히려 거리를 벌렸다.
세 명의 군사는 눈 깜빡할 사이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 가공할 위력을 본 화기대 군사들은 척운기 천호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뒤로 빠졌다.
본래 말을 하지 못했던 이리과사는 곧바로 연적하를 향해 달려갔다.
그 틈에 이승이 척운기 천호에게 말했다.
“척운기! 이리과사와 남천이 싸울 때를 노려 조총을 쏴라!”
척운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를 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야 당연히 남천이지! 이리과사를 쏘게 할 거면 뭐하러 이곳까지 왔겠느냐!”
“헉!”
척운기 천호의 아래턱이 툭 떨어졌다.
천하제일인으로 소문난 남천에게 총을 쏘라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지 모르겠다.
“쏴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그때 까마득한 하늘에서 달려가는 이리과사 위로 거대한 검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크기를 키운 천둔검에 직격당한 이리과사의 몸이 땅 밑으로 푹 꺼졌다.
“…….”
이승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눈만 끔뻑였다.
이리과사가 있던 자리에 어지간한 전각보다 큰 거대한 검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곧이어 움푹 꺼졌던 땅에서 시뻘건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다 죽어 가던 이승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는 이리과사가 불사조처럼 튀어 올라 연적하를 몰아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끓어오르던 용암은 이내 굳는가 싶더니, 시커먼 재가 되어 흩날렸다.
죽어 버린 게 틀림 없었다.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승의 앞에 유령처럼 나타났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냐?”
이승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며 외쳤다.
“남천 대협! 소관은 저 간악한 유명교주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따랐을 뿐, 마음으로는 남천 대협의 협행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협박당한 사람치고는 아주 적극적이던데?”
“그것은…….”
“개소리 말고. 기회를 줄 테니까 달아나 봐.”
“다, 달아나라고요?”
“어, 하늘이 당신에게 갱생의 기회를 주는지 아닌지 나도 궁금하다. 가.”
이승은 이마에서 피가 나도록 머리를 땅에 찧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연이어 연적하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쏴.”
척운기 천호는 ‘정말 쏘냐?’고 물을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총원 발포 준비!”
총군(銃軍)들의 발포 준비가 끝날 즈음 이승은 오십 보쯤 밖을 달리고 있었다.
“발포!”
타타타타타탕-!
열 명이면 모를까?
백 명이나 되는 종군들의 집중사격에 이승은 몇 걸음 더 가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
“쯧쯧! 하늘이 갱생의 기회를 안 주네.”
연적하가 안타깝다는 듯 말하자 척운기 천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당신이 쏘라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