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46
946회. 능력껏 해 보시구려
연적하는 귀가 얇다.
그런 반면 결단력이 뛰어나다.
남의 말에 잘 휘둘리는데 결단력까지 뛰어난 사람의 인생은……. 미친년 널뛰듯 하기 마련이다.
지금도 그렇다.
남맹과 호천맹 간에 싸움이 예고된 순간, 돌연 무림에서 손을 떼겠다고 했다.
그건 남경을 호천맹에 내어 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맹의 사자 격으로 찾아온 남궁천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번 무극문의 일이 정리된 뒤에 손을 떼도 되잖아? 연아야, 네 생각은 어떠냐?”
남궁천은 슬쩍 남궁연을 끌어들였다.
아무리 의절을 당했다 해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던가.
“오라버니 말처럼 무림에서 손을 떼는 데 정해진 날이 있는 건 아니에요. 아무 때 해도 상관은 없어요. 하지만 무극문의 일은 성격이 달라요. 오라버니는 무극문의 소문주가 와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가 뭐라고 했느냐?”
“이 일은 무극문과 선우세가의 일이라고 했어요. 그는 남맹이나 호천맹 같은 외부 세력이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어요. 적하도 같은 생각일 거예요.”
“하지만 선우세가는 무극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건 불공정한 싸움이야. 남맹은 그런 불공정한 싸움에 휘말린 방파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거고. 남맹이 선우세가를 돕는 건 옳은 일이다.”
“그런 논리라면 호천맹이 무극문을 돕는 것도 옳은 일이에요.”
“그래. 이곳이 남직례성만 아니라면 옳은 일이지. 잊었느냐? 남맹에 남직례성만으로 만족하라고 선을 그은 사람이 적하다. 그래서 남맹은 다른 지역의 지부들을 철수시켰다. 그런데 호천맹이 남직례성에 들어오는 것은 묵인하겠다는 것이냐?”
“묵인이 아니라 더 이상 그런 무림의 시비에 왈가왈부하지 않겠다는 거잖아요. 당장 무극문과 오라버니를 보세요.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적하에게 찾아와 서로 내 편을 들어 달라고 하잖아요. 적하는 그런 게 싫은 거예요.”
“안다. 나도 적하가 얼마나 귀찮고 피곤할지 안다. 그러니 이번 일을 끝내고 나서 그렇게 하라는 거다. 아닌 말로 손을 떼는 데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지 않느냐?”
남궁천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적하가 물러나면 남맹과 부친만 우스운 꼴이 되기 때문이다.
“오라버니도 지금 무극문의 상황이 과거 남맹과 다르다는 거 아시잖아요.”
“남맹과 호천맹의 충돌로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그의 말에 남궁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도 맞다.
선우세가와 무극문이 아니라 남맹과 호천맹의 충돌로 보면 과거와 비슷하다.
무극문의 소문주가 외세의 간섭을 배제해 달라고 한 것도 그래서다.
과거와 차별하여 남맹이 끼어들 여지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선우세가를 돕겠다는 남맹이나, 외세의 간섭이 없기를 바라는 무극문 모두 틀린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의 팽팽한 대화를 지켜보던 진설하가 한마디 했다.
“두 분 쉬엄쉬엄 하세요. 그래도 가족인데.”
그 말에 남궁천과 남궁연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모두 진설하 보기가 민망해 참은 것이다.
그때 연적하가 말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형님은 내가 끼어드는 게 남맹에 유리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
남궁천은 쉽게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다소 엉뚱한 질문이었지만 남맹에 유리할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다.
그와 남맹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진설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닌가요?”
“나는요. 순서가 좀 틀렸다고 생각해요. 형님이 나에게 ‘무림에서 손 떼는 걸 조금만 늦춰 달라’고 말하기 전에, 선우세가와 무극문의 싸움에 대한 내 생각을 먼저 확인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남맹에 불리한 결정을 내리면 어쩌려고요? 안 그래요?”
“어머, 그렇네요. 마음이 급해서 그랬나 봐요. 연 대협은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설하가 당황한 남궁천을 대신해 나섰다.
“나는 모두가 맞다고 생각해요. 유명교가 사라졌으니까 이제 자기들 권리를 되찾겠다는 무극문이나, 그 꼴 못 보겠다는 선우세가나.”
“그래도 남경은 남직례성의 심장부잖아요. 호천맹에 남경을 내주면 남맹의 모양새가 좀 우습게 되지 않을까요?”
“나는요, 기본적으로 능력이 되는 쪽에서 취하는 게 맞다고 봐요. 그게 순리라고 생각하고요.”
묵묵히 듣고 있던 남궁천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너는 남맹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다른 지역에 진출한 것을 철수하게 만들지 않았느냐? 그때는 순리를 거슬러 남맹을 주저앉히고, 지금은 순리대로 하자는 것이냐?”
“그래서 아까 ‘장인어른께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잖아요. 그때 나서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 믿었어요.”
“그렇다면 지금 내린 결정을 훗날 다시 미안하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
“…….”
뼈를 때리는 남궁천의 말에 연적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훗날 오늘의 결정을 후회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궁천이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내린 잘못된 결정으로 남맹은 수십만 냥의 손해를 입었다. 이번에 네가 말한 순리를 따르면 선우세가와 남맹이 또 엄청난 손해를 볼 게다. 과거 남맹이 입은 손해를 생각해서라도 이번에는 남맹의 손을 들어주면 좋겠다.”
순간 연적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하의 안위를 위해 노력한 자신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다니?
기껏 강에 빠진 사람 건져 줬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것과 뭐가 다르냐 말이다.
남맹의 답답한 상황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건 하지 말아야 할 소리였다.
연적하의 기도가 돌변하자 남궁연이 나섰다.
“오라버니. 적하가 아니었다면 남맹과 호천맹은 지금도 유명교 치하에서 눈치만 보며 살았을 거예요. 적하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십만 냥의 손해를 입었다고요? 남맹과 호천맹이 지금과 같은 영화를 누리는 게 누구 덕분인데요?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적하에게 몹쓸 소리를 하다니, 오라버니에게 실망이 크네요.”
진설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건 남궁 소저 말이 맞아요. 남천 대협 덕분에 천하가 살아났는데 손해라니요? 오라버니, 흥분해서 말이 잘못 나왔다고 하세요.”
그제야 남궁천은 자신이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그가 막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려는데, 한발 먼저 연적하가 말했다.
“형님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나 때문에 남맹이 손해를 보았다니 유감입니다. 하지만 남맹이 손해를 봤다고 남맹의 손을 들어 줄 수는 없겠습니다. 그럼 내가 호천맹에 빚을 지는 거니까요. 평생 남맹과 호천맹을 오가며 빚을 질 수는 없잖아요? 형님의 말을 들으니 내가 이번에 손을 떼야 할 것 같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나는…….”
남궁천은 예상치 못한 최악의 결과 앞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한순간의 말실수로 지금까지 좋았던 관계마저도 깨지게 될 판이다.
“미안하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나도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다. 지난번의 결정으로 남맹이 손해를 본 건 사실이니까, 이번에는 남맹에 유리한 결정을 내려 줬으면 했다. 결코 너를 탓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형님.”
“어?”
“손해를 봤다는 말 좀 그만하세요. 내 욕심을 채우려고 그렇게 한 것도 아니잖아요.”
“네 말이 맞다.”
“남맹에 전해 주세요. 오늘 이후로 나는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순리대로 흘러가게 둘 거라고.”
“……그래.”
남궁천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제는 더 이상 연적하를 회유할 자신이 없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는데 자신은 그 반대로 행동하고 말았다.
남궁천과 진설하는 차 한 잔을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소 요란했던 방문과 달리 두 사람이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
연적하가 남맹에 전하라는 말은 이내 무림에 퍼졌다.
호천맹과 남맹 모두 상대 진영에 자기 사람을 심어 두었는데 그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남천이 무림에서 손을 뗐다!”
“선우세가와 무극문이 남경의 패권을 두고 싸운다.”
“남맹이 공식적으로 선우세가의 지원을 선언했다.”
“호천맹도 ‘남맹이 끼어든다면 무극문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유명교가 사라진 뒤로 호수처럼 잠잠하던 무림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대체로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였다.
남천이 아니었다면 남맹과 호천맹은 진즉에 붙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하남성.
정주.
호천맹.
통천각.
정오 무렵, 대회의실에 모인 칠파이문의 대표들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남맹의 사자로 온 백익이 담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호천맹 총사인 공손일랑 공손기가 그에게 말하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백익은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호천맹의 여러 고인들을 뵈니 반갑습니다. 저는 남맹 총사부의 백익이라 합니다. 오늘 저는 남경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전진파의 일월검 무무 진인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논의할 게 뭐가 있다고 그 먼 길을 왔는가? 남천 대협이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할 때 이미 끝나지 않았나?”
점창파의 도천 진인이 거들고 나섰다.
“그러게 말입니다. 무극문 혼자만으로도 선우세가를 압도하고, 남맹도 호천맹의 힘에 미치지 못할 텐데. 논의할 게 있습니까? 항복을 하러 왔다면 모를까.”
칠파이문의 대표들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호천맹의 반응에 당황할 법도 한데 백익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저도 선우세가나 남맹이 무극문과 호천맹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논의할 게 있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몇 달 전에 철수했던 남맹 지부들의 재설치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 남맹이 다시 지부들을 세운다면 호천맹에도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아닙니까?”
그의 시선이 호천맹 총사 공손기를 향했다.
공손기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물었다.
“남천 대협이 반대해서 철수한 지부를 다시 세워도 문제가 없겠소?”
“아시다시피 남천 대협께서는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호천맹이 남경에 뛰어드는 것도 내버려 두셨는데, 남맹의 지부 설립을 반대하시겠습니까?”
웃고 떠들던 대회의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남맹이 남직례성 밖에 지부를 세우면 다시 천하의 주도권을 두고 싸워야 하는 까닭이다.
“설마 남맹의 지부 설립을 알리려고 찾아왔을 리는 없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했으면 해서요.”
“지금 타협이라고 했소?”
공손기가 황당한 눈으로 백익을 보았다.
절대적으로 무극문과 호천맹에 유리한 상황에 무슨 타협이란 말인가!
“우리 남맹도 선우세가와 남맹이 무극문이나 호천맹의 힘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경이 어딥니까? 우리 남맹의 심장과도 같은 곳입니다. 남맹은 남경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고 늘어질 거라는 말씀입니다.”
“물고 늘어지시겠다?”
“호천맹이라면 정주에 남맹의 지부가 확장하는 걸 구경만 하시겠습니까?”
“능력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않소?”
“말씀하신 대로 능력이 중요하기는 하지요. 허나 남경은 남맹의 안방이라 우리가 물고 늘어지면 호천맹도 곤란할 텐데요. 아닙니까?”
“물고 늘어지겠다는 게 타협이오?”
조롱 섞인 공손기의 반문에 칠파이문의 대표들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백익이 맹주인 무극상인을 보며 말했다.
“이문사방을 나누자 이겁니다. 선우세가가 이문, 무극문이 사방을 가져가는 건 어떻습니까? 그 대신 남맹은 향후 일 년간 남직례성 밖에 지부를 세우지 않겠습니다.”
제법 솔깃한 제안이지만 무극상인은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남천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그가 무림에서 손을 뗀다면 남맹의 위상도 이전과 달라질 터였다.
조개처럼 다물려 있던 호천맹주 무극상인의 입이 열렸다.
“우리 호천맹은 무극문이 이문사방을 되찾게 도울 것이오. 아울러 남맹이 어디에 지부를 세우건 관여하지 않을 테니 능력껏 해 보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