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77
977회. 제가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세요?
그날 밤.
남궁세가의 정문에 구름 한 덩어리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이윽고 구름에서 연적하가 내려왔다.
석경장 식솔들이 소호 인근에서 쉬는 동안 합비로 날아온 것이다.
담장을 넘어 안마당에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남궁세가와 그 정도 관계가 아닌지라 예를 차린 셈이다.
쿵. 쿵.
문을 두드리자 남궁세가의 호위무사가 문 안쪽에서 물었다.
“이 늦은 밤에 누구시오?”
“연적합니다. 가주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호위무사가 급히 문을 열고 연적하에게 허리를 조아렸다.
“남천 대협. 어서 오십시오!”
“예, 오랜만이네요. 가주님은 계시죠?”
“예, 창궁각으로 모시겠습니다.”
호위무사가 연적하를 안채로 안내했다.
이 역시 이전에는 없던 일이다.
과거 연적하와 남궁세가의 관계가 좋을 때 연적하는 누군가의 안내 없이 자유롭게 남궁세가를 돌아다녔다.
대문을 두드리고, 호위무사가 안내를 할 정도로 연적하와 남궁세가의 관계는 서먹했다.
창궁각.
자정에 가까운 시간,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남궁세가의 가주 검왕 남궁벽과 연적하다.
두 사람은 총관이 직접 다과상을 내올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총관은 다과상을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연적하는 자신이 부른 게 아닌지라 묵묵히 차를 마셨다.
복잡한 얼굴로 앉아 있던 남궁벽이 입을 열었다.
“그간 우리 사이에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지만……. 무룡의 아들인 네가 내 조카이자 사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선친의 이야기는 빼셔도 됩니다. 얼굴도 기억이 안 나고, 이야기도 나누어 본 적이 없거든요.”
굳이 선대의 인연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사실 연적하는 와룡장 시절의 이야기를 꺼려 했고, 그것은 그에게 금기나 다름이 없었다.
남궁벽은 연적하가 자신의 말에 토를 달자 눈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그걸 두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니 참은 것이다.
“그래, 좋은 기억이 아니니 그 이야기는 생략하지. 여하튼 남맹이야 네가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너는 남궁세가의 가족이다. 아니냐?”
“그걸 장인어르신께서 끊겠다고 하셨었지요.”
연적하의 말대꾸에 남궁벽이 ‘울컥’했다.
“그래서? 네가 우리 남궁세가와 무관하다는 말을 하러 온 것이냐?”
“그럴 리가요. 지난해에 의절하겠다고 하신 장인어른께서 이제는 또 가족이라고 말씀하시니 드린 말입니다.”
“끙! 의절은……. 좋다. 말 나온 김에 시원하게 해 보자. 너는 우리 남맹에 ‘남직례성에서만 활동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지역에 있는 백오십여 개의 방파들을 다 내보내고, 남직례성에 머물렀다. 그 바람에 나와는 의절까지 했지. 그런데 그 뒤에 너는 뭐라고 했느냐? 갑자기 무림의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했다. 그리고 호천맹이 남직례성에 진출하는 것까지 묵인했지. 네 그런 행동에 나와 우리 남궁세가가 얼마나 세상의 비웃음을 샀는지 아느냐?”
“그 부분은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맹의 활동을 남직례성으로 제한한 것은……. 호천맹과의 싸움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했음에도 세상의 다툼은 끊어지지 않더군요. 이러나저러나 싸움이 그치지 않는 걸 보고 손을 떼기로 했습니다. 저의 짧은 생각으로 장인어른과 형님이 피해를 입었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세상의 이치를 미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장인어른과 남궁세가를 무시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겠습니다.”
연적하는 그동안 남궁벽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장인의 행동과 별개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다.
그의 사과에 남궁벽의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늦은감이 있지만 네가 그렇게 말하니 사과를 받아 주마. 내가 너와 의절하겠다고 한 것은……. 그 당시 나와 남궁세가가 너무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 진심을 알았으니 나도 너와의 의절을 없던 것으로 하겠다.”
연적하는 장인의 말에 내심 안도했다.
또 장인이 배배 꼬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지 않으니 고마웠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의절은 풀었지만 이전으로 돌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궁벽과 연적하 모두 그사이에 상처를 받은 탓이다.
잠시 후 남궁벽이 입을 열었다.
“남경에 있는 방파들 대부분이 호천맹으로 넘어갔다. 남맹은 남직례성 외부의 방파를 정리했다만, 호천맹이 남경에 욕심을 내는구나.”
“제가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세요?”
“남맹은 남직례성을 관리하라는 게 너의 뜻이었다. 지난해 남맹이 남직례성 외의 방파들을 포기했던 것처럼, 호천맹도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호천맹에 남경에서 빠지라고 할게요. 이문사방은 남맹과 무극문이 알아서 처리하시는 거로. 그럼 되나요?”
연적하가 남궁벽을 보았다.
만약 남궁벽이 무극문까지 처리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 줄 마음은 있었다. 남경에 무극문을 남겨 두면 나중에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궁벽은 그것까지는 요구하지 않았다.
사실 무극문을 요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 까닭이다.
호천맹이 빠진 무극문은 남맹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무극문의 무상도제 장무덕과 해결할 일도 있었다.
“그래 주면 고맙겠다. 무극문의 처리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남맹에서 맡도록 하마.”
“그러세요. 그럼 저는 호천맹에 남경의 일에서 손을 떼라고 할게요.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없구나.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있느냐?”
“소호 인근요.”
“먼 길을 오게 해서 미안하구나. 내가 찾아가도 됐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너를 불렀다.”
“제가 움직이는 게 낫죠.”
“이해해 주니 고맙다. 혹 내가 석경장을 위해 해 줄 일이 있느냐?”
“있어요.”
순간 남궁벽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저 해 본 말인데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니 조금 뜻밖이었다.
“무엇이냐?”
“석경장에 자주 들러 주세요.”
“그게 전부냐?”
“네.”
뭔가 특별한 일을 기대하던 남궁벽은 조금 실망했지만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누님도 장인어른께서 먼저 다가가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연이는……. 내가 뭐라고 장담하기 어렵구나. 누가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서.”
“알아요. 그래도 장인어른께서 노력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연적하의 거듭된 청에 남궁벽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딸이지만 남궁연은 정말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나 한번 그녀의 눈 밖에 난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잘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노력하마.”
“잘될 겁니다.”
연적하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는 석경장을 위해서라도 남궁연이 남궁세가와의 관계를 좋은 쪽으로 풀어 갈 거라 믿었다.
“그럼 저는 일어나 보겠습니다.”
연적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족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다.
“그래, 고생했다.”
뒤따라 일어난 남궁벽이 마루까지 그를 배웅했다.
연적하가 마당을 가로질러 갈 때다.
총관 유정유검 남궁산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천이가 만나고 싶다는데……. 잠시 들러 주실 수 있겠는가?”
“예.”
연적하는 총관을 따라 남궁천의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남궁천의 숙소.
연적하가 옆으로 와서 앉자 누워서 천장을 응시하던 남궁천이 물었다.
“아버지와는 얘기가 잘 끝난 거냐?”
“예.”
잠시 침묵하던 남궁천이 불쑥 말했다.
“지난번에는 내가 미안했다.”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사과를 하세요. 그럴 수도 있지.”
“아니다. 그때는 내가 부상 직후라……. 마음이 정말 좋지 못했다. 약한 마음에 모든 걸 다 남의 탓으로 돌렸다. 네가 나를 위해 복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괜히 나 때문에 먹지 않아도 될 욕을 먹게 한 것 같아 내내 미안했다.”
“괜찮아요. 하루 이틀 욕먹는 것도 아니고.”
“후후. 나도 전에는 너처럼 낙천적이었는데…… 왜 이렇게 한심해졌는지 모르겠다.”
“몸이 약해지면 본래 그런 법이에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여하튼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부족한 나를 용서해라.”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가 형님이었으면 그보다 더 지랄했을 거예요. 내 성격 아시잖아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다. 하아! 너에게 사과를 하니 이제야 마음이 가볍구나. 정말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어째 느낌이 싸해진 연적하가 남궁천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왠지 다 내려놓은 그런 얼굴이다?
“형님.”
“왜 부르느냐?”
“혹시 이상한 마음 먹고 그러시는 거 아니죠?”
“이상한 마음?”
“음독 자결을 한다거나 하는 그런 거요.”
“그래 보이느냐?”
“아니요. 그냥 이상한 마음 먹지 말라고 한 소리예요.”
연적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자결하게 생긴 얼굴이라고 하면 더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다.
“…….”
남궁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두운 천장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거지반 죽어 있었다.
“형님. 혹시라도 다른 생각은 하지 마세요.”
“…….”
남궁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나쁜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형님의 끊어진 기경팔맥은 내가 다 이어 놨어요. 시간이 필요할 뿐, 형님의 몸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거예요.”
“위로하려고 애쓰는구나. 며칠 전 의원에게 내 기경팔맥이 끊어져 있다는 확인을 받았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남궁세가의 의원들은 하나같이 명의 소리를 듣고 있다. 더군다나 한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도 아니고.”
“와아! 미치겠네. 형님?”
연적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귀까지 먹은 건 아니니 큰소리치지 말거라.”
“우리 형님. 진짜 몸이 안 좋으신가 보네. 바보 같은 생각을 다 하시고.”
“너무 비웃지 마라. 난들 이러고 싶어서 이러겠느냐?”
남궁천의 핼쑥한 얼굴에 자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형님. 내가 언법(言法) 수련 중이라는 거 잊으셨어요?”
“…….”
“형님 위로한답시고 내가 거짓말이나 할 것 같아요? 나 거짓말 안 한 지 꽤 된다는 거 몰라요?”
“하지만…… 네가 뭐라 해도 내 기경팔맥이 끊어진 것은 사실이다.”
“형님. 범인의 눈으로 볼 때 그럴지 몰라도, 내가 말했잖아요. 내 영기로 기경팔맥을 이어 놓았다고. 형님, 내 영기는요 이 세상이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힘이에요. 이 세상을 주관하는 신이 누님과 심 노인의 영기를 폐한 것도 그래서고요.”
“그, 그럼…… 정말 내 기경팔맥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냐?”
남궁천의 음성이 떨렸다.
남직례성의 모든 명의가 포기한 기경팔맥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죽어 가던 심장이 다시 벌렁거렸다.
“그들은 아주 나중에야 형님의 기경팔맥이 회복됐다는 걸 알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결국 이전의 무위를 되찾게 될 거라고.”
“그게 정말이냐?”
“정말이라니까요.”
“너에게 미안한 말이다만, 구천현녀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느냐?”
“맹세할게요. 그러니 기운 차리고 정진하세요. 기경팔맥을 회복하는 건 형님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어요.”
“고맙다. 적하야. 정말 고맙다.”
남궁천의 눈이 다시금 희망으로 가득 찼다.
그런 남궁천에게 연적하가 당부의 말을 했다.
“형님. 이후로도 생각만큼 몸이 회복되지 않으면 의심이 생길 거예요. 의원들은 계속 아니라고 할 테고요. 그럴 때마다 오늘 나와의 대화를 떠올리세요. 누가 뭐래도 절대 흔들리지 말고요.”
“그때마다 네가 찾아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면 되지 않느냐? 나는 네가 자주 왔으면 한다.”
“여건이 허락되면 찾아뵐게요. 그럼, 이만 주무세요.”
말과 함께 연적하는 남궁천의 수혈을 짚고 밖으로 나갔다.
은은한 달빛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허전했다.
그동안 얽히고 꼬였던 관계를 정리했는데 왜 이런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