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98
998회. 내가 바라던 세상은 아니에요
구월 말.
마지막까지 남직례성에 남아 있던 호천맹 산하의 열두 개 방파가 남맹으로 소속을 바꾸었다.
그들 모두 칠파이문의 속가제자가 세운 방파였기에 무척이나 상징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남직례성의 주인이 남맹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더불어 호천맹이 남맹의 영역인 남작례성에 진출하지 못한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입증됐다.
호천맹에서 남맹의 다음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울 때 청천벽력 같은 소문이 뒤를 이었다.
“무극문이 남직례성을 떠난다.”
“칠파이문인 무극문조차 남맹의 견제에 무너졌다.”
“무극문이 절강성으로 문파를 이전한다고 한다. 무극문은 절강성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를 잡을 것인가! 다시 세를 키워 권토중래(捲土重來)할 것인가!”
무극문의 갑작스러운 이전 소식으로 칠파이문은 침몰하는 배처럼 가라앉고, 남맹이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떠올랐다.
호사가들은 남맹이 남직례성으로 만족하지 못할 거라고 떠들어 댔다.
남맹의 과거를 보면 억측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호천맹이 유명무실할 때 남직례성 밖에 백오십 개가 넘는 방파를 거느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야망가인 검왕과 고금제일인인 남천이 화해하였으니 남맹의 외부 진출은 시간문제였다.
합비.
석경장.
정오 무렵.
뜻밖의 손님이 석경장을 찾았다.
무극문의 천공도 장학 문주가 연적하를 만나러 온 것이다.
딸과 놀아 주던 연적하는 ‘손님이 왔다’는 심통의 말에 객청으로 나갔다.
“요즘은 술 마시러 안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연적하의 말에 심통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공자님이 지안이와 놀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설마 나랑 놀아 주기 위해 그런다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럼 제가 왜 두문불출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나야 당연히 술값이 떨어졌나 보다 생각했지.”
“아이고. 저 그렇게 술에 미친 놈 아닙니다.”
말하는 동안 객청에 도달했다.
심통은 객청까지만 안내하고 돌아서 나갔다.
연적하를 발견한 장학 문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읍을 했다.
“남천 대협.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그러네요.”
잠시 후 연적하와 장학 문주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장학 문주가 먼저 운을 뗐다.
“작별 인사차 들렀습니다.”
“작별 인사요?”
연적하가 뜨끔한 얼굴로 장학 문주를 보았다.
행여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자신의 일이 외부에 알려졌나 싶어 놀란 것이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무극문이 항주로 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경을 떠나기에 앞서 남천 대협께 인사를 드리려고요.”
“아! 저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말하다 말고 연적하는 애매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왠지 그 원인이 남맹에 있을 것 같아서다.
아니나 다를까?
장학 문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맹의 압박이 심해서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거래처가 다 막혀서 생필품을 구하기도 어려웠거든요.”
“…….”
연적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천하의 무극문이 살기 위해 남경을 떠나게 됐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본문은 운이 좋은 편입니다. 남직례성에 남아 있던 호천맹 산하의 열두 개 문파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혹시 아십니까?”
연적하는 고개를 저었다.
호천맹의 열두 개 문파가 남맹으로 넘어갔다는 소문만 들었지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했다.
“일곱 개 문파는 자발적으로 남맹으로 소속을 바꾸었습니다만……. 다섯 개 문파의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사문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문주들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비명횡사를 했거든요.”
“죽었다고요?”
“예, 정정하던 사람들이 한두 달 사이에 모두 죽었습니다. 남직례성에 남은 호천맹 문파들이라 저와는 따로 왕래하던 사람들이었지요.”
“…….”
“아마 본문과 비슷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상방을 통해서 거래를 막으면……. 버텨 낼 재간이 없지요.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고 버티다 변절자들에게 당했다 들었습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요?”
“비명횡사한 문주들의 가족이 은밀히 전한 소식이니 사실일 겁니다. 그들은 저에게 복수를 부탁했지만……. 본문도 생사의 기로에 선 터라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연적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남맹의 압박과 변절자들로 인한 변고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남천 대협을 원망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남천 대협께서 바라는 세상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찾아뵌 것입니다.”
묵묵히 듣던 연적하가 눈을 들어 장학 문주를 보았다.
“나도 하나 물어볼게요. 칠파이문이 다스리던 무림에는 억울한 죽음이 없었나요?”
“있었을 겁니다.”
“고인과 친한 사람들이 칠파이문에 찾아와서 ‘이게 당신들이 바라는 세상이냐?’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우리 칠파이문은 억울한 사정을 알고도 외면하지는 않았습니다. 정파라는 이름에 걸맞게 상대의 억울함을 풀어 주려 노력했습니다. 물론 때로 욕먹을 짓도 했습니다만.”
“그렇군요.”
장학 문주가 ‘때로 욕먹을 짓도 했다’고 고백해 연적하는 딴지를 걸지 않았다.
칠파이문이 종종 뒤 구린 짓도 했지만, 대체로 협의를 추구한 것은 사실인 까닭이다.
“이제 내가 답해 줄 차례인가요? 내가 바라던 세상은 아니에요. 하지만 칠파이문이 이렇게 된 건 자업자득(自業自得)인 면도 있어요. 원공 선사, 태허 진인, 무극상인, 무상도제, 의천검존이 검왕 맹주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분들도 다치지 않았겠죠. 그랬다면 남직례성의 열두 개 문파와 무극문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 거예요. 검왕 맹주님과 남맹이 호천맹의 눈치를 아주 안 보는 건 아니니까요.”
“…….”
장학 문주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아니라고 반박하지도 못했다.
칠파이문의 천하십대고수들이 건재했다면 남맹의 횡포도 지금보다는 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하늘이 남맹을 도왔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호천맹이 ‘조만간 연적하가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천하십대고수들의 합공은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잠시 후 장학 문주는 작별 인사와 함께 떠났다.
연적하는 장학 문주가 사라질 때까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된 무극문과 다섯 문파에서 일어난 참사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남천 대협을 원망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남천 대협께서 바라는 세상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찾아뵌 것입니다.
장학 문주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까는 지기 싫어서 ‘칠파이문은 어땠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의 지적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에 불과했다.
‘떠날 때가 됐구나.’
이제야 비로소 남궁연이 자신의 등을 떠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검왕을 향한 원망이 더 깊어지기 전에 가야겠다.
연적하는 행동력이 강한 사람이다.
안채로 돌아간 그는 즉시 석경장 식솔들을 불러 모았다.
월아와 금아가 눈치껏 지안을 데리고 마루로 나갔다.
연적하는 방에 모인 남궁연, 심통, 당운망에게 오늘 떠날 뜻을 밝혔다.
사람들은 일순 당황했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공자님. 잘 다녀오십쇼. 제가 따라가야 하는데…….”
“석경장은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천하십대고수들도 일곱 걸음 안에 녹일 수 있는 절독을 만들고 있습니다.”
연적하는 심통과 당운망의 말에 피식 웃었다.
어쩌면 저렇게 마지막까지 한결같은지 모르겠다.
이윽고 연적하가 애틋한 눈으로 남궁연을 보자 심통과 당운망이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침묵하던 남궁연이 지나가듯 물었다.
“장학 문주는 왜 왔대?”
“뭘 물어보더라고요.”
“뭘?”
잠시 머뭇거리던 연적하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이게 정말 내가 바라던 세상이냐고.”
“그랬구나. 장학 문주가 왔다기에 왠지 그럴 것 같았는데. 당돌한 면이 있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인과응보라고 했어요.”
연적하는 앞의 말을 뚝 떼 버리고 결론만 말했다.
떠나는 마당에 ―남맹의 일로― 남궁연을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그의 배려에 남궁연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니?”
“무당파에도 구천현녀의 사당이 있을까요?”
“규모가 큰 도관에는 거의 다 있으니까, 아마 있을 거야.”
“그럼, 무당파로 갈게요. 감사 인사도 하고, 간 김에 오룡궁에도 들러 보려고요.”
“그래, 장문인에게 고맙다는 인사 꼭 전해 줘.”
무당파가 아니었다면 검왕은 죽었을 테니 인사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럴게요.”
“참. 그리고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네 번째 하늘’에 가거든 말야.”
“네.”
“구천검령은 최후의 순간까지 아끼도록 해.”
“왜요?”
“구천검령의 소문이 돌면 천자마와 금사도 네가 왔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럼 너를 상대할 방법을 모색하겠지. 어쩌면 네가 찾지 못할 곳으로 숨어 버릴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너에게는 불리하니까,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쓰지 않는 게 좋아. 만약 구천검령을 꺼낼 상황이 되면 가급적 목격자를 남기지 마.”
“아!”
순간 연적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다.
천자마와 금사가 먼저 알고 대비하는 만큼 자신의 손해였다.
잠시 후 마루로 나간 연적하는 월아, 금아와 놀고 있던 지안을 번쩍 들어 올린 뒤 꽉 안았다.
지안이 버둥거리자 그제야 그는 팔에 힘을 풀었다.
“지안아, 아빠 어디 좀 갔다가 올게. 그동안 엄마 말 잘 듣고, 언니들이랑 재밌게 놀아. 알았지?”
“네에.”
연적하는 아쉬운 얼굴로 마지못해 지안을 내려놓았다.
눈치 빠른 월아와 금아가 한마디씩 했다.
“사조님, 잘 다녀오세요.”
“사고(師姑)는 저희가 잘 모실게요.”
“그래, 너희만 믿는다.”
한참 동안 지안을 보던 연적하가 마당으로 내려갔다.
구름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었다.
지안의 손을 잡고 서 있던 남궁연이 갑자기 소리쳤다.
“적하야!”
“네?”
“늦지 않게! 잘 다녀와!”
“그럴게요.”
연적하는 애써 담담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구름이 석경장 위로 높게 떠올랐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남궁연과 지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남궁연이 입 모양으로 가라고 한 뒤에야 구름은 바람에 밀리듯 서서히 석경장 상공을 벗어났다.
***
시월 초.
호광성.
무당산.
해거름 무렵.
무당파의 산문 근처에 구름 한 덩어리가 내려앉았다.
곧이어 구름 속에서 청년 하나가 걸어 나왔다.
사흘 전 합비를 떠난 연적하다.
천오백 리(약 600킬로미터)를 날아온 그는 꽤나 초췌해 보였다.
육체의 피로보다는 마음 상태가 편안하지 못한 때문이다.
사문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운종술을 거둔 그는 천천히 산문으로 걸어갔다.
산문에 다다르자 세 명의 젊은 도사가 앞길을 막아섰다.
한순간 도사들과 연적하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항렬이 낮은 도사들은 연적하를 알아보지 못했다.
“본문은 당분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향화객이시라면 다음에 다시 찾아 주십시오.”
멈칫하던 연적하가 읍을 하며 말했다.
“도사님, 나는 오룡궁의 제자로 남천이라 합니다. 들어가도 되겠죠?”
그의 소개에 황망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던 도사들이 허리를 꺾었다.
이윽고 도사들의 인솔자인 도영이 산문 안쪽을 가리켰다.
“남천 대협! 미처 몰라뵀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연적하가 성큼성큼 걸어가자 도영이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남천 대협. 허면 오늘은 오룡궁을 찾아오신 겁니까?”
“일단은요.”
그다음에는 장문인을 찾아볼 생각이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도사에게 그런 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시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청궁과 오룡궁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연적하가 오룡궁 방면으로 접어들자, 도영은 부리나케 상청궁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