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58
2.
회랑 끝 방에서 발길을 멈춘 무금은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단전에서 힘을 끌어올렸다.
흥분과 긴장으로 경직한 몸을 평정으로 다스리려 애썼다.
멈췄던 걸음을 내딛은 무금은 그를 봤다.
행낭을 걸머쥐고 있는 좌가경이다.
“무슨 일이냐? 물러가라.”
하녀로 여긴 것인지 힐긋 준 시선 한번으로 제일에만 열중인 좌가경, 행낭의 끝을 여미고 검을 잡던 그는 문득 다시 시선을 돌려 무금을 응시했다.
“못 보던 얼굴인데……”
나직하게 말끝을 흐리는 좌가경의 미간은 내천자를 그렸다.
무금의 얼굴이 낯설기도 하지만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핏 본 순간 남은 용모가 다시 눈을 돌리게 만들었지만, 다시 보니 역시 빼어난 용모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미간에 흉터가 있다. 칼자국이다.
하녀라면 저런 게 없을 터다.
더더군다나 이상한건 하녀와 상관없는, 등에 멘 검 한 자루다.
이제야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좌가경은 검병(劍柄)을 움켜쥐고 물었다.
“누구냐? 날 찾아 온 것이냐?”
무금은 전신이 활활 타버릴 것만 같았다.
치미는 이 분노를 어찌 다스려야 할지 정신이 다 아득했다.
지난세월 그토록 보고자 했던 원수 좌가경을 눈앞에 뒀다.
이 자를 죽이기 위한 일념으로 혹독한 수련을 했다.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무리한 연무로 팔이 빠져 퉁퉁 부었던 아홉 살의 그 봄날, 양아버지 무천룡은 밤새 한숨도 자지 않았다.
어린 양 딸의 몸에서 나는 신열과 잠꼬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간호를 하느라 밤을 새웠다.
혼몽했던 그 밤이 지나고 잠이 깨었을 때 무금은 울었다.
양아버지 무천룡의 품을 파고들어 울었다.
감사하고 미안해서다.
왜 하늘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양아버지 무천룡처럼 착하고 따듯하고 강직하며 정의로운 사람이 있다.
그런 반면 좌가경처럼 파렴치하고 추악하며, 가증스럽고 악한 사람도 있다.
모를 일이다.
세상사람 마음이 한가지라면 혼란이 없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
세상은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언제나 피를 흘린다.
스르릉 하고 검을 빼며 좌가경은 살기를 드러냈다.
“누구며, 어인 일이냐고 물었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무금은 등에 멘 검자루로 손을 뻗었다.
“령령을 기억하느냐?”
검을 뽑아내며 던진 무금의 한마디, 그것이 좌가경의 미간을 비틀리게 만들었다.
“령령?”
아는 얼굴이다, 확실히 그런 표정이다. 그래서 무금은 분노를 더욱 불살랐다.
“아는 구나. 모를 리가 없겠지. 네놈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신세를 망치고 끝내 죽임을 당한 여인인데 모를 수가 없겠지. 네놈이 죽인 여인이니까.”
검극을 세우며 살기를 뿜어내는 무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좌가경이 눈썹을 경련했다.
뭔가를 잡을 듯 말 듯 하던 시선은 끝내 기억을 붙잡았다.
“너는 설마…… 금이?”
천중으로 향했던 검을 내린 무금은 좌가경을 향해 겨누고 원한을 뿜었다.
“그래, 바로 나다. 널 죽이기 위해 왔다.”
성큼 걸음을 내딛은 무금은 거리를 좁히며 살기를 발산했다.
충격어린 눈으로 무금의 그 모습을 보던 좌가경은 주춤 물러서며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서안을 사이에 두고 선 자리에서 무금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늘이 날 살리셨다. 좌가경 네놈의 모가지를 잘라버리라는 사명이지.”
어금니를 악문 좌가경은 험악한 기운을 뿜어냈다.
“비루한 년들이 끝까지 내 앞길을 막으려고 하는 구나.”
무금의 눈동자에 불길이 터질 듯 곤두섰다.
“비루한 년들? 네 앞길을 막아? 더러운 개새끼야, 너는 언제나 네 욕심만으로 세상을 보는 구나. 어머니와 나는 네놈 말대로 비루한 처지였을지 모르나 너와 같은 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질 만큼 비굴하진 않았다. 어머니를 유혹해 장래를 약속한 것은 바로 네놈이었어. 그렇게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차지했지. 그리곤 실증이 나자 죽여 버리고 만 것이야.”
좌가경은 살기 도는 퍼런 눈알을 번질거렸다.
“맞아. 항주제일루의 가기였던 네년의 어미, 령령은 정말 품고 싶어 미칠 만큼 반반한 년이었지. 가기였던 탓에 그년을 함부로 품을 수가 없어 더욱 애가 탔었다. 여섯 살 먹은 딸 하나를 데리고 있는 년이었지만 어린 기녀들에 댈 것이 아니었지. 그년을 품자면 공을 들여야 했던 거야. 내가 가진 배경을 동원해서 정말로 노력했지. 결국 그년도 넘어왔다.”
폭발할 것 같은 무금의 분노를 조롱처럼 미소로 보며 좌가경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품기 위해서 한 말을 나보고 지키라고? 아비도 모를 딸년까지 데리고 있는 가기년을? 그건 아니지. 나에게 령령과 같은 년은 꺾기 위한 꽃이었을 뿐이야. 그런 년이 한둘이었어야지? 그래, 그렇지만 령령은 기억에 남았지. 그년이 데리고 다니던 작은 딸년도 기억에 남았고.”
왜 기억에 남았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무금을 보는 좌가경의 눈동자에 욕정의 빛이 어른거렸다.
언젠가 크면이란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그런 좌가경의 시선을 무금도 느끼고 있었다.
여섯 살 어린 나이로 그 시선의 의미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서웠다.
그래서 저 놈이 싫었다.
무금은 몸서리 칠만큼 커다란 분노를 누르고 또 눌렀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한순간 분노가 가슴속의 한곳으로 모였다.
몸과 마음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걷잡을 수 없던 분노가 단단한 공처럼 똘똘 뭉쳤다.
그것은 마치 분노를 모두 걷어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그것을 관조하고 마음으로 제어하는 것이 가능했다. 정말로 신비한 느낌이었다.
좌가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래서 네년들을 처리한 것인데, 그 낭인 놈들의 마무리가 결국 이런 날을 만들었구나. 반갑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시피 매우 화급한 상황이다. 이러한 때에 네가 나타나 그 옛날 네 어미처럼 길을 막으니 나는 짜증이 난다. 너와 같은 년들은 팔자가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부하고 싶구나. 그러한 고로 옛 추억의 마무리를 오늘 반드시 해야겠다.”
스윽 움직이는 좌가경을 향해 무금은 마지막 말을 던졌다.
“마무리, 그걸 하러 내가 왔다.”
좌가경의 검이 제천무류검하의 법식으로 섬광처럼 뻗어 나왔다.
무금은 좌가경을 향해 검을 던지며 튕겨나갔다.
진천경혼단 무사들을 쐐기처럼 가르고 들어간 목계백은 그를 봤다.
말을 달려오는 자, 진천경혼단주다. 그가 장검을 높이 쳐들고 질주해왔다.
벼락처럼 닥쳐온 진천경혼단주가 휘두르는 검 아래로 몸을 숙였다.
동시에 장도를 횡으로 후렸다.
다리가 갈라진 전마가 울부짖으며 고꾸라졌다.
그 등에서 튕겨나가 착지한 진천경혼단주는 되돌아 달려와 공격했다.
제천무류검하의 폭포수와 같은 연환공격.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검세의 파도 속에서 목계백은 시릿한 안광을 뿜으며 하나하나 공격을 받아쳤다.
그러다 한순간 검세의 한가운데로 장도를 쑤시듯이 찔러 넣었다.
파도처럼 연이어 나오던 제천무류검하의 공세가 한순간 파탄을 보였다.
정확하게 약점을 파고든 목계백의 장도가 진천경혼단주의 손목을 갈랐기 때문이다.
피 흘리는 손목을 부여잡은 그가 물러나자 목계백은 말했다.
“너희들의 검, 다시 한 번 잘 봤다. 이젠 더 볼 필요가 없구나.”
흉측한 얼굴로 뒷걸음질 하는 진천경혼단주를 향해 목계백은 분섬보로 다가갔다.
삽시간에 거리를 좁히는 그 움직임에 진천경혼단주가 경악한 표정을 지을 사이도 없이, 그의 검을 장도로 후려치고 용악철주를 후렸다.
목계백의 팔꿈치 공격을 받은 진천경혼단주의 턱이 부서져 올라가며 머리통이 흩어졌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적들을 베어 넘기던 오세명은 목계백의 움직임을 보고 감탄을 삼켰다.
진천경혼단주를 맞아 저토록 수월하게 공격을 받아내다가 한순간 파탄을 만들고는 역시 한순간에 끝장을 내버렸다.
정문 쪽을 향해 달려가는 목계백의 장도 주변에서 피가 튀고 뼈가 잘렸다. 죽음의 파도가 되어 몰아쳐 가는 그의 모습은 놀랍고 무서웠다.
‘대단한 자.’
감탄을 거듭 삼킨 오세명은 용화전 안으로 진입을 위해 미친 듯이 검을 그어댔다.
진천경혼단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이곳에 혁리검천이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놈을 잡기 위해 은발야는 사력을 다하고 있다.
“혁리세가의 개악적놈들! 다 죽이리라!”
처절한 분노를 토해내며 은천검을 휘두르는 은발야의 공격에 진천경혼단 무사들은 주춤주춤 밀려갔다.
워낙에 대단한 놈들이지만, 은천검이 만들어 내는 가공할 위력 앞에 병기를 맞대기 어렵고 은발야의 저돌적인 공세 때문이다.
모든 걸 도외시한 저 공격은 그야말로 무섭기 그지없었다.
“혁리검천이 나왔다!”
별동대 가운데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 소리를 따라 은발야와 오세명과 호일도는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용화전 안에서 혁리검천이 나왔다.
진천경혼단의 호위를 받으며 들것에 실린 그는 어디론가 피신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용화전에도 불길이 옮겨 붙었기 때문이다.
“네 이놈 혁리검천!”
격렬한 외침을 터트리며 은발야갸 혁리검천을 향해 달려갔다.
그 앞을 진천경혼단이 막았지만 오세명과 호일도가 사력을 다해 그들과 맞섰다.
그런데 혁리검천이 피신하는 앞쪽을 명세기와 비격과 모금량이 막았다.
“더러운 악적놈아! 어딜 가려느냐!”
명세기의 중검이 검풍을 일으키며 대호분격류를 토해냈다.
비격은 창두자루를 잡아 돌리며 선풍을 일으켰고, 모금량은 대동보 적호단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검을 휘둘렀다.
그 뒤로 별동대무사들이 합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서운 존재, 남악권사 무천룡이 달려갔다.
“네 놈은 아무데도 못 간다!”
사력을 다해 방어하는 진천경혼단을 비호처럼 넘어간 무천룡은 남악권의 벽력을 사방으로 터트렸다.
흐릿한 그림자와 같은 그의 모습이 스쳐갈 때마다, 정확하게 그의 권이 스칠 때마다, 진천경혼단 무사들은 튕겨나갔다.
그 허물어진 틈으로 은발야와 오세명과 명세기 등이 파고들어갔다.
“물러서라 이놈들!”
혁리검천을 에워싼 최후 방어 무사들을 향해 무천룡은 남악진천붕(南嶽振天崩)을 풀어냈다.
남악진천세 속의 절기, 좁지만 강렬한 보폭으로 진각을 밟듯이 일곱 걸음을 찍으며 권세를 터트리는 순간, 보보마다 점층 된 위력을 더한 스물한개의 권이 터져나간다. 그 권들이 육합과 팔극의 장벽을 부수는 절기다.
한순간 진천경혼단 무사들이 검과 함께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바람을 맞은 꽃잎처럼 밀리며 튕겨나가는 그들의 얼굴과 몸은 부서졌다.
남악진천붕의 권세에 격중 당한 탓이다. 혁리검천을 호위하던 열둘이 모두 그랬다.
놀라운 절기와 경악할 무위로 적들을 처리한 무천룡은 혁리검천 앞에 섰다.
“혁리검천, 네놈의 죄를 물을 시간이 됐다.”
들것에 누운 채로 아무 표정이 없던 혁리검천은 갑자기 키들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정강이가 잘렸다지만 상황을 지켜보면서 도주할 생각도 하지 않은 것도 그랬다.
혁리검천은 마치 모든 걸 포기한, 아니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방임한 모습이었다.
“혁리검천! 씹어 먹을 놈아!”
은발야가 처절한 분노를 토해내며 혁리검천에게도 달려들었다.
도주하기 시작한 진천경혼단을 베어 넘기던 그의 은천검은 혁리검천의 목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그의 복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명세기가 그 검을 쳐냈다.
“무슨 짓이오!”
분노를 드러내며 명세기를 죽일 듯 보려보는 은발야, 그를 무천룡이 말렸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찾게. 그놈을 지금 죽이면 은장주의 포한을 풀 것이지만 살해된 딸의 원한을 풀기엔 부족할 것이야. 저놈은 살려서 말하게 해야 하네. 모두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저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눈을 부릅뜬 채 은발야가 어깨를 들썩거리는 사이, 무천룡은 혁리검천의 혈도를 짚었다. 그리고 다시 은발야와 시선을 맞추고 나직하게 말했다.
“진정한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나? 이제 거의 다 되었네.”
이글거리던 은발야의 눈동자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무천룡은 주변을 향해 다시 외쳤다.
“혁리세가와 남궁세가의 악적들을 쳐부수고 놈들의 음모를 세상에 알리자!”
별동대가 함성을 지르는 순간 용화전에서 무금이 나왔다.
그녀를 보고 무천룡은 눈을 치떴다.
딸의 손엔 피를 떨어뜨리는 머리가 잡혀 있었다.
‘해 냈구나.’
딸 무금에게 자애롭고 대견한 시선을 던지던 무천룡은 다시 모두에게 소리쳤다.
“혁리검천을 앞세우고 남궁륜과 혁리명에게로 가자!”
정문을 막고 있는 진천경혼단의 배후에서 목계백은 성난 범처럼 칼부림을 했다.
느닷없는 그 공격에 진천경혼단은 나뭇가지들처럼 잘려나갔다.
채 대응을 할 사이도 없이 유린당했다. 그들의 사이를 목계백은 뚫고 나갔다.
정문 밖으로 나온 목계백은 수없이 널린 시체들 사이를 달려갔다.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창룡대와 진천경혼단, 무림의용군과 혁리세가 측 무림인들, 그들의 사이를 달려가 남궁륜과 혁리명을 찾았다.
둘의 모습은 피투성이였고 지쳐있었다. 승부를 내지 못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궁륜과 혁리명, 두 가주를 시린 눈빛으로 응시하던 목계백은 그를 찾아냈다.
남궁이룡 남궁여강이다.
창룡대를 지휘하며 진천경혼단과 대적중인 그에게 바로 달려갔다.
앞을 막는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베어 넘겼다.
물살을 가르고 나가는 잉어처럼 접전의 한가운데를 치고 들어간 목계백은 남궁여강의 등 뒤에까지 달려가 멈춰 섰다. 그리곤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남궁여강.”
그가 돌아섰다.
목계백을 알아본 그의 눈은 경악으로 커졌다.
“너, 너는? 대동보의?”
목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다.”
“네, 네놈이 어떻게?”
시린 미소가 목계백의 입가에서 피어올랐다.
“너희 같은 자들의 손에 죽지는 않아. 그러기엔 내가 살아온 날들이 아깝지.”
남궁여강은 이해를 할 순 없지만 모종의 예감을 했다.
“네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해를 했구나.”
검을 겨누는 남궁여강에게 목계백은 간단히 말했다.
“방해라기보다는 너희를 죽이려는 거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순간, 남궁여강은 섬전처럼 검을 찌르며 나왔다.
목계백은 장도를 치켜세웠다가 사선으로 내리쳤다.
끝